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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의 반란 (춘추좌전.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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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12 년 봄 , 간왕이 사자를 보내 주공의 변란을 알려왔다 . 『춘추』는 “주공이 진나라로 도망쳤다 ( 周公 出奔 晉 ) ”고 썼다 . 무릇 주나라 입장에선 천자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므로 ‘출’이란 있을 수 없지만 주공 스스로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다 . 원문 十二年春 , 王使以 周公 之難來告 . 書曰 “ 周公 出奔 晉 ”, 凡自 周 無出 , 周公 自出故也 . 주석 ▣ 十二年春 , 王使以 周公 之難來告 . 書曰 “ 周公 出奔 晉 ” : 주공초가 진나라로 망명한 사건은 지난해다 . 『춘추』에서 올해 이 사건을 기록한 까닭은 주나라에서 이 때 알려왔기 때문이다 . ▣ 凡自 周 無出 , 周公 自出故也 : 이 문구는 『춘추』 의 “출분”에 대한 설명이다 . 『좌전』이 말한 것은 “드넓은 하늘 아래 천자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이다 . 그러므로 주 왕실로부터 떠나는 것에 “출”자를 사용할 수 없다 . 그런데도 여기서 “출”자를 쓴 까닭은 주공초가 스스로 떠났음을 보여준 것이다 . 주 왕실의 신하가 망명을 떠난 사건을 『춘추』에선 모두 세 차례 기록한다 . 양공 30 년의 “왕자하가 진나라로 망명했다” , 소공 26 년의 “왕자조가 초나라로 망명했다” 등인데 이 두 경우는 모두 “출”자를 쓰지 않고 “ 분 ” 자만 썼다 . 본문에서만 “출”자를 썼다 . 두예는 “천자에게 ‘ 밖 ’ 이란 없다 . 그러므로 망명한 자에게 ‘출’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 주공의 경우 왕에게 되돌아왔지만 스스로 주나라와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출자를 써서 그를 비난했다 . ”고 설명한다 . 

주공초周公楚 (춘추좌전.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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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초 周公楚 는 혜왕과 양왕의 일족들의 핍박을 싫어했고 또 백여 伯輿 와 정권을 다투다 이기지 못하자 분노하여 주나라를 떠났다 . 양번 陽樊( 하남성 제원현 濟原縣 의   동남쪽 약 20 리 고양성 古陽城 ) 까지 갔을 때 , 간왕이 유자 劉子 를 보내 그를 돌아오게 하니 , 견 鄄 에서 유자와 맹세를 한 후 들어왔다 .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경사를 떠나 진나라로 떠났다 . 원문 (성공11년 다섯번째 기사)  周公楚 惡 惠 · 襄 之偪也 , 且與 伯輿(1) 爭政 , 不勝 , 怒而出 . 及 陽樊 , 王使 劉子 復之 , 盟于 鄄 而入 . 三日復出 , 奔 晉 . (1)   : “ 伯輿 ”는 어떤 본에서는 “백여 伯與 ”로 쓰는데 『석문』에 근거하여 정정했다 . 주석 ▣ 周公楚 惡 惠 · 襄 之偪也 : 『좌전·희공 30 년』에 주공열 周公閱 이 보이는데 , 주공초는 그의 후손이다 . 고동고의 『대사표』는 열의 증손이라고 주장하는데 큰 오류이다 . 혜와 양은 주 혜왕과 주 양왕의 후예들을 가리킨다 . ▣ 且與 伯輿 爭政 : “ 伯輿 ”는 어떤 본에서는 “백여 伯與 ”로 쓰는데 『석문』에 근거하여 정정했다 . 『좌전·양공 10 년』에 보면 주 왕실에 백여가 나오는데 이 두 사람간 약 18 년의 차이이므로 동일인일 수도 있다 . 춘추지도. 양번(번) ▣ 不勝 , 怒而出 . 及 陽樊 : 양번은 곧 『좌전·은공 11 년』의 번 樊 이고 , 『좌전·희공 25 년』에도 언급된다 . 상세한 내용은 은공의 주석을 참조 . ( 하남성 제원현 濟原縣 의   동남쪽 약 20 리 고양성 古陽城 )  이 당시에는 이미 진나라의 땅이 되었다 . ▣ 王使 劉子 復之 , 盟于 鄄 而入 : 견 鄄 은 주나라의 읍으로 소재지는 상세하지 않다 . ▣ 三日復出 , 奔 晉 : 주석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