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초周公楚 (춘추좌전.8.11.5.)
주공초周公楚는 혜왕과 양왕의 일족들의 핍박을 싫어했고 또 백여伯輿와 정권을 다투다 이기지 못하자 분노하여 주나라를 떠났다. 양번陽樊(하남성 제원현濟原縣의 동남쪽 약 20리 고양성古陽城)까지 갔을 때, 간왕이 유자劉子를 보내 그를 돌아오게 하니, 견鄄에서 유자와 맹세를 한 후 들어왔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경사를 떠나 진나라로 떠났다.
원문 (성공11년 다섯번째 기사)
周公楚惡惠·襄之偪也,且與伯輿(1)爭政,不勝,怒而出. 及陽樊,王使劉子復之,盟于鄄而入. 三日復出, 奔晉.
(1) : “伯輿”는 어떤 본에서는 “백여伯與”로 쓰는데 『석문』에 근거하여 정정했다.
주석
▣周公楚惡惠·襄之偪也: 『좌전·희공30년』에 주공열周公閱이 보이는데, 주공초는 그의 후손이다. 고동고의 『대사표』는 열의 증손이라고 주장하는데 큰 오류이다. 혜와 양은 주 혜왕과 주 양왕의 후예들을 가리킨다.
▣且與伯輿爭政: “伯輿”는 어떤 본에서는 “백여伯與”로 쓰는데 『석문』에 근거하여 정정했다. 『좌전·양공10년』에 보면 주 왕실에 백여가 나오는데 이 두 사람간 약 18년의 차이이므로 동일인일 수도 있다.
▣不勝,怒而出. 及陽樊: 양번은 곧 『좌전·은공11년』의 번樊이고, 『좌전·희공25년』에도 언급된다. 상세한 내용은 은공의 주석을 참조. (하남성 제원현濟原縣의 동남쪽 약 20리 고양성古陽城) 이 당시에는 이미 진나라의 땅이 되었다.
▣王使劉子復之,盟于鄄而入: 견鄄은 주나라의 읍으로 소재지는 상세하지 않다.
▣三日復出, 奔晉: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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