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성공 복귀 (춘추좌전.8.10.3.)



정나라의 공자반公子班이 숙신叔申의 계책을 들었다. (8.9.12.) 3, 자여子如(공자반)가 공자수公子를 옹립했다. 여름 4, 정나라 국인들이 공자수를 살해하고 곤완髡頑을 옹립하자 자여는 허나라로 도망쳤다. 진의 난무자가 말했다. “정나라가 군주를 옹립했으니 우리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을 구금하고 있을 뿐이다. 무슨 이익이 있겠나? 차라리 정나라를 토벌하고 군주는 돌려보내 화친을 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진 경공이 병환에 들었다. 5, 진나라는 태자 주포州蒲를 군주로 옹립하고 제후들을 소집해 정나라를 정벌했다. 정나라의 자한이 양공의 사당에 보관하던 예기 종을 뇌물로 바쳤고, 자연子然이 수택修澤(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남쪽)에서 결맹했으며 자사子駟가 인질이 되었다. 신사일(11), 정 성공이 귀국했다.


원문 (성공 10년 세번째 기사) 

鄭公子班叔申之謀. 三月子如公子. 夏四月人殺髡頑子如. 欒武子: 人立君我執一人焉, 何益? 不如伐而歸其君以求成焉.晉侯有疾五月大子州蒲以爲君而會諸侯伐. 鄭子罕賂以[1]子然盟于修澤子駟爲質. 辛巳鄭伯.



(1) “종”자를 완각본에선 “종”으로 쓴다.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그리고 금택문고본을 따라 정정했다.


주석

鄭公子班叔申之謀: 숙신의 계략은 지난해의 『좌전』을 참조.

三月子如公子: 자여는 공자반이다. 「정세가」: “정나라는 진나라의 처사에 우려하여 공자여가 성공의 서형 수를 옹립했다.” 공자수는 정 양공의 아들이고 성공의 서형이다. 사마천은 자여가 공자수를 옹립한 이유는 진의 난서가 정나라를 포위했기 때문으로 봤고, 『좌전』은 자여가 숙신의 “가짜 군주를 세우는 계략”을 들은 결과라고 봤다. 두 주장이 같지 않다.

夏四月人殺髡頑: 양공 7년의 『춘추』와 『좌전』에 근거하면, 곤완髡頑 정 성공의 태자 정 희공이다. 양공 7년의 『공양』과 『곡량』에선 모두 “곤원髡原”으로 쓰고 「정세가」는 “운”으로 쓴다. 「정세가」에선 “곤완을 옹립했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또 공자수는 성공이 귀국한 후 그 앞에서 피살되었다고 적었다. 근거한 바가 서로 다를 수 있다.

子如. 欒武子: 人立君我執一人焉, 何益? 不如伐而歸其君以求成焉.晉侯有疾五月大子州蒲以爲君: 공영달의 『소』는 응소의 『구군휘의』를 인용하여, “과거 주 목왕의 이름은 만滿이고, 진 려공의 이름은 주만州滿이었다.” 한나라 말 응소가 근거한 『좌전』에선 “주포州蒲”가 “주만州滿”으로 쓰여 있었다. 「진세가」는 “수만壽曼”으로 썼는데, · 滿·은 음이 가까워 통할 수 있다. 그래서 당나라 유지기의 『사통·잡박편』이후로 학자들은 현재 판본의 “포”자를 “만”자와 형태가 유사하여 생긴 오류라고 여기고 있다. 『석문』역시 “어떤 판본에선 주만州滿으로 쓴다.”고 설명하고 있다. 진 경공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태자를 옹립한 것에 대해 고염무의 『일지록』권14는 “같은 혈연에서의 선양(內禪)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而會諸侯伐. 鄭子罕賂以: “종”자를 완각본에선 “종”으로 쓴다.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그리고 금택문고본을 따라 정정했다. 자한子罕 목공의 아들로서 『춘추·성공14년』의 공자희公子喜이다. 고대인의 이름이 희인 경우 다수 그의 자는 한을 쓴다. 송나라 악희樂喜 역시 자가 자한이다. 양종은 정 양공의 사당에 있는 종이다.

子然盟于修澤: 자연子然은 목공의 아들이다. 양공 원년과 19년의 『좌전』에 보인다. 수택修澤은 정나라 땅으로서 현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남쪽이다.

子駟爲質: 자사는 『좌전·양공9년』과 『춘추·양공10년』에 언급되는 공자비公子騑로서 역시 정 목공의 아들이다.

辛巳: 신사일은 11일이다.

鄭伯: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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