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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와 진나라의 교섭 (춘추좌전.8.9.14.)

12 월 , 초 공왕이 공자신 公子辰 을 진 晉 나라에 파견하여 종의를 사자로 삼아 돌려보낸 일에 답례하고 우호 및 화친을 맺기를 요청하였다 . 원문 (성공 9년 열네번째 기사)  十二月 , 楚子 使 公子辰 如 晉 , 報 鍾儀 之使 , 請修好 · 結成 . 주석 ▣ 十二月 , 楚子 使 公子辰 如 晉 : 다음 해의 『좌전』에 따르면 , 공자신의 자는 자상이고 관직은 대재 大宰 이다 . ▣ 報 鍾儀 之使 , 請修好 · 結成 : 「년표」는 “초 공왕 9 년 겨울 ,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 ”라고 쓴다 .

내성 증축 (춘추좌전.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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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나라 ) 도성에 내성 內城 을 증축했다 . 『춘추』에 기록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 . 원문 城中城 , 書 , 時也 . 주석 ▣ 城中城 , 書 , 時也 : 주석 없음 .  ⊙ 城中城 :  『곡량전』에 따르면 ,  중성은 내성 內城 이다 .  그렇다면 이 중성은 노나라 국도 곡부의 내성이다 .  두예는 중성을 노나라의 성읍의 이름으로 보고 있다 .  “중성은 동해 후구 厚丘 ( 각본에는 늠구 廩丘 로  잘못 쓰여 있는데 ,  여기서 금택문고본과 남송소자본에 근거하여 정정했다 ) 현의 서남쪽이다 . ”라고 주장한다 .  현 강소성 목양현 경내로서 노나라 변경에 닿지 않는다 .  그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 .  강영의 『고실』에 설명이 자세하다 .  정공  6 년의 “ 城中城 ”역시 본문과 같다 . 노국고성의 변천: 서주 시기에는 성이 없었다. 춘추시대에 현재 고성의 대성(외성)이 축조되었고, 전국시대에 대성 내의 서남부에 소성(궁성)이 축성되어 내성외곽의 제도가 완성되었다. 통일제국 한나라 때 외성은 제거되었고 내성을 현의 청사로 사용하였다. (허굉, 김용성 옮김, 『중국 고대 성시의 발생과 전개』, 191쪽)

정나라, 허나라 공격 (춘추좌전.8.9.12.)

정나라가 허나라 도성을 포위하여 군주의 억류가 시급한 일이 아님을 진나라에 보였다 . (좌전.8.9.7.)  이것은 공손신 公孫申 의 생각이었는데 , 그는 “우리가 출병하여 허나라 도성을 포위하고 새 군주를 옹립하는 것처럼 위장하며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일을 늦추면 저들은 필시 군주를 돌려보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 원문(성공 9년 열두번째 기사)  鄭 人圍 許 , 示 晉 不急君也 . 是則 公孫申 謀之 , 曰 : “ 我出師以圍 許 , 僞 [1] 將改立君者 , 而紓 晉 使 , 晉 必歸君 . ” [1] “위 僞 ”를 각 본에서는 모두 “위 爲 ”로 쓴다 . 금택문고본에선 “ 僞 ”로 쓰는데 , 『석문』에서 인용한 혹본과 부합하여 여기서 그를 따른다 . 주석 ▣ 鄭 人圍 許 , 示 晉 不急君也 : 정 성공이 진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정나라는 진나라에 성공이 억류된 일은 우리로선 급선무가 아니고 병력을 동원하여 허나라를 공격할 ( 여유가 ) 있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 ▣ 是則 公孫申 謀之 : 공손신은 『좌전·성공 4 년』의 주석을 함께 참조 . ▣ 曰 : “ 我出師以圍 許 , 僞將改立君者 : “위 僞 ”를 각 본에서는 모두 “위 爲 ”로 쓴다 . 금택문고본에선 “ 僞 ”로 쓰는데 , 『석문』에서 인용한 혹본과 부합하여 여기서 그를 따른다 . 즉 새로운 군주를 옹립하는 것처럼 위장함이다 . ▣ 而紓 晉 使 : 잠시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다 . ▣ 晉 必歸君 . ” : 진은 다음 해 성공을 돌려보낸다 .

백적白狄 (춘추좌전.8.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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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秦 나라와 백적 白狄 이 진 晉 나라를 공격했는데 , 제후들이 진나라에 다른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 원문 秦 人 · 白狄 伐 晉 , 諸侯貳故也 . 주석 ▣ 秦 人 · 白狄 伐 晉 , 諸侯貳故也 : 다수의 제후가 진나라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진과 백적이 진을 정벌했다 .

거나라의 멸망 (춘추좌전.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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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1 월 , 초나라의 자중 子重 ( 공자영제 ) 이 진 陳 에서 출발해 거 莒 나라를 정벌하고 거구 渠丘 를 포위했다 . 거구의 성벽은 조악했고 백성은 뿔뿔이 흩어져 도성 거 莒 로 도망쳤다 . 술신일 (5 일 ), 초군이 거구로 쳐들어갔다 . 거나라 병사들이 초나라의 공자평 公子平 을 사로잡았다 . “죽이지 말라 . 네 포로들을 돌려 주겠다 ” 라고 초군이 말했지만 거나라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 초군이 거를 포위했다 . 거의 성벽 역시 부실했고 경신일 (17 일 ) 거성이 붕궤되었다 . 초나라는 그 길로 운 鄆 으로 쳐들어 갔는데 거나라에 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 ( ☞ )  군자는 말한다 . “외진 곳에 있다는 것만 믿고 대비를 하지 않았으니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크다 .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은 선 중에서도 가장 크다 . 거나라는 궁벽한 지리만 믿고 성곽을 보수하지 않았기에 겨우 열이틀만에 초나라가 세 곳의 성 都 을 점령할 수 있었으니 모두 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 『시』는 말한다 . ‘실과 삼이 있더라도 거친 솔새와 기름사초를 버려서는 안 되며 , 희성과 강성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더라도 박색의 여인을 내쳐서는 안된다 . 무릇 군자는 이것이 부족하면 저것으로 대체하지 않음이 없나니 . ’ 이는 대비는 중지할 수 없는 일임을 말한 것이다 . ” 원문 冬十一月 , 楚子重 自 陳 伐 莒 , 圍 渠丘 . 渠丘 城惡 , 衆潰 , 奔 莒 . 戊申 , 楚 入 渠丘 . 莒 人囚 楚公子平 . 楚 人曰 : “ 勿殺 , 吾歸而俘 . ” 莒 人殺之 . 楚 師圍 莒 . 莒 城亦惡 , 庚申 , 莒 潰 . 楚 遂入 鄆 , 莒 無備故也 . 君子曰 : “ 恃陋而不備 , 罪之大者也 ; 備豫不虞 , 善之大者也 . 莒 恃其陋 , 而不修城郭 , 浹辰之間 , 而 楚 克其三都 , 無備也夫 ! 『 詩 』 曰 : ‘ 雖有絲 · 麻 , 無棄菅 · 蒯 ; 雖有 姬 · 姜 , 無棄蕉萃 ; 凡百君子 , 莫不代匱 . ’ 言備之不可以已也 . ” 주석 ▣ 冬十一月 , 楚子重 自 陳 伐 莒...

남관南冠을 쓴 영인泠人 종의鍾儀 (춘추좌전.8.9.9.)

진 경공이 군부 軍府 를 시찰하다가 종의 鍾儀 를 보고 , 그에 대해 물었다 . ( ☞ 8.7.4.) “남관 南冠 을 쓴 채 잡혀 있는 자가 누구인가 ? ” 관리가 대답했다 . “정나라에서 바친 초나라의 포로입니다 . ” 경공이 명하여 그를 석방했다 . 종의를 불러 위로하자 그는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 경공이 그의 족 族 ( 세관 世官 ) 을 물었다 . 종의가 대답했다 . “음악을 담당하는 영인 泠人 입니다 . ”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가 ? ” “선친의 직관인데 감히 다른 일에 종사했겠습니까 ? ” 사람을 시켜 그에게 금 琴 을 주니 남방 지역의 음악을 연주했다 . “초나라 군왕은 어떤 사람인가 ? ” “감히 소인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 경공이 집요하게 묻자 , 대답했다 . “군주께선 태자 시절에 사 師 와 보 保 가 보좌하여 아침에는 영제 ( 자중 ) 에게 , 저녁에는 측 ( 자반 ) 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게 했습니다 . 그 외는 알지 못합니다 . ”  경공이 범문자에게 종의에 대해 말하니 , 그가 말했다 . “초나라의 포로는 군자입니다 . 아뢸 때 선친의 직분을 언급했으니 근본을 배신하지 않았고 ; 고향의 음악을 연주했으니 고국을 잊지 않았으며 ; 초군의 태자 때의 일을 언급한 것을 보면 사심이 없습니다 ; 두 경을 호칭할 때 이름으로 아뢰었으니 군주를 높인 것입니다 . 근본을 배신하지 않았으니 인 仁 이요 , 고국을 망각하지 않았으니 신 信 입니다 . 사심이 없으니 충 忠 이고 , 군주를 높일 줄 아니 총명함입니다 . 인으로 업무를 대하고 , 신의로 일을 지키며 , 충으로 일을 성취하고 , 총명으로 일을 실행합니다 . 설사 큰 일이라도 반드시 성사시킬 것입니다 . 어찌하여 군주께선 그를 돌려보내 양국 간의 우호를 성취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 ” 경공은 그의 조언을 따라 , 종의를 후하게 예우하고 초나라로 돌아가 양국의 우호를 구하게 했다 . 원문 晉侯 觀于軍府 , 見 鍾儀 . 問之曰 : “ 南冠而 縶 者 , 誰也 ? ” 有司對...

사신을 죽인 진나라 (춘추좌전.8.9.8.)

진나라의 난서가 정나라를 정벌했고 정나라는 백견 伯蠲 을 사자로 보내 화친을 구했지만 진나라가 그를 죽였으니 예가 아니다 . 교전 중에도 사신은 서로 오갈 수 있다 . 초나라의 자중이 진 陳 나라를 침략하여 정나라를 구원했다 .  원문 欒書 伐 鄭 , 鄭 人使 伯蠲 行成 , 晉 人殺之 , 非禮也 . 兵交 , 使在其間可也 . 楚子重 侵 陳 以救 鄭 . 주석 ▣ 欒書 伐 鄭 , 鄭 人使 伯蠲 行成 , 晉 人殺之 , 非禮也 . 兵交 , 使在其間可也 : 『후한서·래흡전 來歙傳 』에 “고대에 열국 간 교전 시에도 사신이 그 사이를 오갔으니 이는 전쟁을 중시하면서도 화평을 귀하게 여겨 전쟁이 제멋대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 ”고 말한 대목은 이에 근거한 것이다 . ▣ 楚子重 侵 陳 以救 鄭 : 진은 본래 초나라에 복종했었지만 혹 이때 다시 진나라로 돌아섰는지 모르겠다 .

사로잡힌 정 성공 (춘추좌전.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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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정 성공이 진나라를 예방했는데 진나라에선 그가 초나라를 추종하려는 마음을 품었다며 동제 銅 鞮 ( 산서성 심현 沁縣 의 남쪽 ) 에 잡아 가두었다 . 원문 (성공 9년 일곱번째 기사)  秋 , 鄭伯 如 晉 , 晉 人討其貳於 楚 也 , 執諸 銅 鞮 . 주석   ▣ 秋 , 鄭伯 如 晉 , 晉 人討其貳於 楚 也 , 執諸 銅 鞮 : 제 鞮 의 음은 제 題 이다 . 『좌전·양공 22 년』에 근거하면 , 동제 銅 鞮 에는 진 군주의 별궁이 있다 . 또 『좌전·소공 28 년』에 따르면 , 동제는 과거 양설적의 식읍이었다고 한다 . 정 성공은 사로잡혀 별궁에 감금되었다 . 『가경일통지』에 따르면 동제는 현 산서성 심현 沁縣 의 남쪽이다 .

잉녀媵 (춘추좌전.8.9.6.)

진 晉 나라 사신이 와서 잉녀를 보냈는데 예에 맞다 . 원문(성공 9년 여섯번째 기사)  晉 人來媵 , 禮也 . 주석 ▣ 晉 人來媵 , 禮也 : 두예는 “동성의 제후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

미망인 목강 (춘추좌전.8.9.5.)

  여름 , 계문자가 백희를 호위하여 송나라로 갔다가 돌아와 복명했고 , 성공은 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계문자가 「한혁」의 다섯 번째 장을 노래하자 , ( 백희의 모친 ) 목강이 곁방에서 나와 그에게 재배를 하고 말했다 . “대부께서 욕보셨습니다 . 선군을 잊지 않고 그 마음이 현 군주에 이르고 은혜가 미망인에까지 뻗쳤습니다 . 선군께서도 바라셨던 일일 것입니다 . 감히 대부의 큰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 ” 그녀는 「녹의」의 마지막 장을 읊고 방으로 들어갔다 . 원문 (성공 9년 다섯번째 기사) 夏 , 季文子 如 宋 致女 , 復命 , 公享之 . 賦 「 韓奕 」 之五章 . 穆姜 出于房 , 再拜 , 曰 : “ 大夫勤辱 , 不忘先君 , 以及嗣君 , 施及未亡人 , 先君猶有望也 . 敢拜大夫之重勤 . ” 又賦 「 綠衣 」 之卒章而入 . 주석 ▣ 夏 , 季文子 如 宋 致女 , 復命 , 公享之 : 『의례·연례』의 가규의 『소』에서 정현의 『목록』을 인용한 것을 보면 , 제후의 경대부가 외국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 군주가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푼다 . 본문의 성공이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 ▣ 賦 「 韓奕 」 之五章 : 「한혁」은 『시·대아』의 시이다 . 5 장의 뜻은 궤보가 한나라 군주에게 딸을 출가시키려 했고 , 한길이 출가한 후 그 생활이 안락하고 편안했다는 뜻이다 . ▣ 穆姜 出于房 : 당시 제후들의 궁실 법도를 보면 노침의 북쪽 중앙을 실 室 이라 하고 , 동서 양쪽의 방을 방 房 이라 했다 . 실의 북쪽에는 벽이 있었지만 양쪽 방의 북쪽에는 벽은 없고 계단만 있다 . 연례는 노침에서 거행했는데 목강은 백희의 모친이며 이때 그녀는 동방에 있었고 노침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 계손행보가 「한혁」의 다섯 번째 장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동방에서 나와 노침으로 나간 것이다 . ▣ 再拜 , 曰 : “ 大夫勤辱 , 不忘先君 : 선군은 선공을 말한다 . 즉 목강의 남편이며 백희의 부친이다 . ▣ 以及嗣君 : 사군은 성공...

등鄧 회합 (춘추좌전.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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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가 정나라에 큰 뇌물을 주고 화친을 구했다 . 정 성공이 등 鄧 에서 초나라의 공자성 公子成 과 회합했다 . 원문 (성공 9년 네번째 기사)  楚 人以重賂求 鄭 , 鄭伯 會 楚公子成 于 鄧 . 주석 ▣ 楚 人以重賂求 鄭 , 鄭伯 會 楚公子成 于 鄧 : 등 鄧 은 두 번 나온다 . 하나는 채나라 땅으로서 『춘추·환공 2 년』의 주석을 참조 . 하나는 등나라인데 , 『춘추·환공 7 년』의 주석을 참조 . 등나라는 노 장공 16 년에 초나라에 멸망했다 . 『좌전·장공 6 년』의 기사를 참조 . 본문의 등은 멸망당해 초나라에 속한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춘추시대 지도 - 등 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