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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북융北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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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북융 北戎 이 정나라를 침략했다 . 정 장공이 이를 방어하며 융의 군대를 걱정하여 말하였다 . “저들은 보병이고 , 우리는 전차 부대이다 . 그들이 갑자기 배후에 나타나 공격할까 두렵다 . ”  공자돌 公子突 이 말했다 . “용감하나 후퇴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병사에게 적을 탐색한 후 재빨리 후퇴하게 합니다 . 군주께선 세 곳에 매복을 지시하고 기다리십시오 . 적은 경솔하고 무질서하며 탐욕스럽고 친밀함이 없습니다 . 승리는 양보하지 않으나 패색이 보이면 서로 구제하지 않습니다 . 선봉이 적을 잡는 것을 보면 필시 돌진할 것이나 진격하다가 매복을 만나면 필경 재빨리 도망칠 것입니다 . 뒤를 따르는 군사가 이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므로 선봉에 지원이 없는 셈입니다 . 이리하면 걱정을 더실 수 있을 것입니다 . ” 장공은 그의 말을 따랐다 .  융의 선봉으로 매복과 마주친 병사들이 도망쳤고 , 축담 祝聃 이 뒤쫓아 융의 중앙을 돌파하며 앞뒤로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 융의 군사는 모두 도망쳤다 . 11 월 갑인일 (11 월엔 갑일인이 없다 ) 에 정나라는 융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 1.9.6.  北戎 侵 鄭 . 鄭伯 禦之 , 患 戎 師 , 曰 : “ 彼徒我車 , 懼其侵軼我也 . ” 公子突 曰 : “ 使勇而無剛者 , 嘗寇而速去之 . 君爲三覆以待之 . 戎輕而不整 , 貪而無親 ; 勝不相讓 , 敗不相救 . 先者見獲 , 必務進 ; 進而遇覆 , 必速奔 . 後者不救 , 則無繼矣 . 乃可以逞 . ” 從之 .  戎 人之前遇覆者奔 , 祝聃 逐之 , 衷 戎 師 , 前後擊之 , 盡 殪 . 戎 師大奔 . 十一月甲寅 , 鄭 人大敗 戎 師 . 해설 ▣ 北戎 侵 鄭 : 북융 北戎 은 장공 28 년의 기사에 언급된 대융과 소융 ( 현재 산서성 교성현 交城縣 에 있던 ), 혹은 성공 원년에 보이는 모융 茅戎 ( 현재 산서성 평륙현 平陸縣 에 소재하던 ) 으로 생각된다 . 이들 융적들은 정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침범할 수 있었다 . 만약 산융...

1.9.5. 방防 회합, 은공과 제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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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겨울 , 은공이 제 희공과 방 防 ( 산동성 비현 동북쪽 ) 에서 회합하여 송나라 정벌을 논의했다 . 1.9.5.  冬 , 公會 齊侯 于 防 , 謀伐 宋 也 . 해설 ▣ 冬 , 公會 齊侯 于 防 , 謀伐 宋 也 : 정 장공이 회합에 참여하지 못한 까닭은 혹 정나라에 북융이 침입했기 때문일 수 있다 . 이 때문에 은공 10 년 다시 중구의 회합이 있었다 .  ◉   “방 防 ” ,  『공양』에선 “병 邴 ”으로  쓴다 .  방 方 과 병 丙 의  소리를 따르는 글자들은 다수 고음이 같다 ( 方 과   丙  두 글자는 고음에서 방모양부 方母陽韻 에  속한다 ).  그러므로 방 防 과 병 邴 은  통가할 수 있다 .  노나라에는 방 防 이 두 곳 있다 .  당시 서쪽의 방은 아직 노나라 땅이 아니었다 .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방은 동쪽의 방임을 알 수 있다 .  현재 산동성 비현 費縣  동북쪽  40 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대대로 장씨의 식읍이었다 .  나머지 상세한 설명은 『춘추·양공 13 년』의 주석에 상세하다 .  석온옥 石 鞰玉 의  『독좌치언 讀左卮言 』에선 “방 防 ”자를 혹 “붕 / 팽 祊 ”의  와전된 글자가 아닌가 말하는데 ,  붕 / 팽 祊 은  정나라의  ( 탕목 ) 읍이었다가 새로 노나라에 귀속된 땅이다 .  당시 정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할 것을 알려온 차였으므로 노나라는 제나라와 방 防 에서 회합을 가진 것이다 .  그저 수록하여 참고하게할 뿐이다 .  춘추좌전 지도 - 방 防

1.9.4. 송나라 정벌 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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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가을 , 정인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송나라를 정벌할 것임을 알렸다 . 1.9.4.  秋 , 鄭 人以王命來告伐 宋 . 해설 ▣ 秋 , 鄭 人以王命來告伐 宋 : 앞서 정나라가 송나라를 토벌했지만 아마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 그래서 정나라는 재차 송나라 공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왕명으로 노나라에 알려온 것이다 . 춘추좌전 지도 - 정나라와 송나라 지리적 위치

1.9.3. 정장공, 송나라를 토벌하다

본문 송 상공이 왕을 조견하지 않자 정 장공은 주 환왕의 좌경사로서 왕명을 받들어 송나라를 토벌했다 . 송나라는 정나라가 외성에 침입했을 때 , 사신의 거짓말로 은공을 분노케 한 적이 있어 아예 통보를 하지 않았다 . ( ☞ 1.5.8.) 은공은 격분했고 송과의 사신 교류를 끊었다 . 1.9.3.   宋公 不王 , 鄭伯 爲王左卿士 , 以王命討之 . 伐 宋 . 宋 以入 郛 之役怨公 , 不告命 . 公怒 , 絕 宋 使 . 해설 ▣ 宋公 不王 :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왕 王 ”이라 한다 . “ 宋公不王 ” 은 송나라 군주가 천자를 조견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 두예는 왕실에 쓰일 물품을 제 때에 공급하지 않음 ( 不供王職 ) 이라고 해석했는데 옳지 않다 . 왕인지의 『경의술문』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 그러나 춘추시대에 왕을 조견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 노나라의 사례로 보자 . 12 명의 군주 약 240 여 년에 걸쳐서 『춘추』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하면 , 희공이 진 晉 문공의 패업으로 인해 두 번 왕소 王所 ( 경사에 가서 직접 조견한 것이 아니라 회맹 등 천자가 행차하여 머문 곳에서 조견 . 옮긴이 ) 에서 조견을 했고 , 성공 때 진 秦 나라 토벌 때문에 경사에 가서 한 번 조견했으며 , 은공과 환공 29 년 동안 주나라 왕은 사신을 보낸 것이 끊이지 않았지만 두 군주는 한번도 조견한 적이 없다 . 그러므로 정 장공이 송 상공의 조견하지 않음을 이유로 송나라를 토벌한 것은 마치 제 환공이 초나라를 토벌하면서 주나라 왕실의 제사에 쓰일 물품을 보내오지 않은 것을 이유로 삼은 것과 같아 그저 토벌의 명분을 찾기 위함일 뿐이다 . ▣ 鄭伯 爲王左卿士 , 以王命討之 . 伐 宋 . 宋 以入 郛 之役怨公 , 不告命 : 송나라가 정나라의 외성을 공격했던 사건은 은공 5 년에 있었던 일이다 . 은공은 7 년에 송나라를 위해 주 邾 나라를 공격하여 송나라를 기쁘게 하려했지만 오히려 송나라는 마음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 그래서 공격당...

1.9.2. 낭郎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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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여름 , 낭 郎 ( 곡부 근처 . 은공 원년 비백이 축성한 곳과 다른 곳이다 .) 에 성을 쌓았다 . 『춘추』 에 기록한 것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1.9.2.  夏 , 城 郎 . 書 , 不時也 . 해설 ◉ 夏 , 城 郎 : 은공 원년 봄 , 비백 費伯 이 낭에 성을 쌓았었다 . 그런데 이 해에 다시 낭에 성을 쌓았다 . 아마 노나라엔 낭 郎 이 두 곳이 있었던 것 같다 . 비백이 쌓은 곳은 구 舊 어대현 魚臺縣 동북 80 리 떨어진 곳으로서 노나라 곡부로부터 약 200 리 떨어진 먼 곳이다 . 또 여기의 낭은 곡부 근교의 읍이다 . 자세한 것은 강영 江永 의 『춘추지리고실 春秋地理考實 』을 참조하라 . 또 장공 31 년의 『춘추』와 『좌전』의 주석에 상세하다 . 춘추좌전 지도 - 낭郎 ▣ 夏 , 城 郎 . 書 , 不時也 : 이 해는 건축으로서 주력 여름은 하력 봄에 해당하여 농사에 매우 바쁜 시기이다 .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농번기엔 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 . 그래서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

(B.C.714년) 1.9.1. 장마霖

본문 은공 9 년 봄 왕력 3 월 계유일 (10 일 ), 며칠간 큰 비가 내리고 천둥이 쳤다 . 『춘추』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을 적었다 . 경진일 (17 일 ) 에 큰 눈이 내렸다 . 역시 내리기 시작한 날을 적었다 . 『춘추』에 기록한 까닭은 이런 현상들이 절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 비에 관한 범례에 따르면 , 사흘 이상 내리는 것을 장마 ( 림 霖 ) 라 하고 , 평지에 한 척 이상 쌓이는 것을 대설이라 한다 . 1.9.1.  九年春王三月癸酉 , 大雨霖以震 , 書始也 . 庚辰 , 大雨雪 , 亦如之 . 書 , 時失也 . 凡雨 , 自三日以往爲霖 , 平地尺爲大雪 . 해설 ▣ 九年春王三月癸酉 , 大雨霖以震 , 書始也 : “ 大雨霖以震 ”가 한 구이다 . 이 以 는 연사로서 여 與 의 뜻이다 . 『상서·금등』의 “천둥 번개와 큰 바람이 일었다 ( 天大雷電以風 ) ”는 문구가 이와 똑 같은 구법이다 . 장림 臧琳 의 『경의잡기 經義雜記 』에선 “ 大雨霖 ”과 “ 以震書始也 ”를 각각 하나의 구로 보았는데 , 옳지 않다 . “ 書始也 ”는 두예의 주석에 근거하면 계유일이 큰 비가 시작된 날이다 . 장마는 오랫동안 비를 내리고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 . 『춘추』에서 “ 大雨 , 震電 ”로 쓰고 『좌전』에선 “ 大雨霖以震 ”으로 쓴 것은 문장은 차이가 있지만 의미는 같다 . 소위 두예가 말하는 착종성사 錯綜成辭 ( 경문을 종합하여 그 변화를 자세히 설명한다 ) 이다 . 두예의 주석과 공영달의 『소』에선 『춘추』의 문장에 “ 霖以 ” , 두 글자가 탈락된 것이며 , “전 電 ”자는 후인이 임의로 덧붙인 글자라고 설명한다 . 그러나 『곡량』과 『공양』그리고 『한서·오행지』를 보면 , 모두 “ 大雨震電 ”으로 쓰여 있다 . 모두 오류는 없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장수의『경의잡기』와 홍이훤 洪 頤煊 의 『독서총록 讀書叢錄 』에 보인다 . ▣ 庚辰 , 大雨雪 , 亦如之 : “ 亦如之 ”는 대설이 하루에 그친 것이 아니라 경진일에 시작한 것이고 , 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