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나라에 단교를 선언한 진晉나라 (춘추좌전.8.13.3.)



여름 4월 무오일(5), 여공이 여상呂相을 진에 파견하여 진과 단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우리 헌공과 귀국의 목공이 서로 우호하고 힘과 마음과 합치고 이를 신 앞에 맹세로 밝히고 혼인을 맺어 거듭 확인했습니다. 하늘이 우리 진에 재앙을 내려 문공은 제나라로, 혜공은 진나라로 망명했습니다. (5.4.6.) 불행히 헌공께서 타계하셨고 목공은 이전의 덕을 잊지 않고 우리 혜공이 진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도왔습니다. (5.9.6.) 그러나 혜공은 큰 공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한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5.15.4.) 목공 또한 그 마음에 후회되는 바가 있어 우리 문공의 즉위를 성사시켰으니 이는 목공의 공로입니다.

(5.23.6.) 문공께선 몸소 갑주를 두르고 산과 하천을 걷고 험지를 넘어 동쪽의 제후들을 정벌하여, ·하·상·주나라의 후예들이 진나라를 조견하게 하셨으니 이는 목공의 옛 은혜에 보답한 것입니다. 정나라가 군주의 영토를 침범하여 분노케 하자 문공께선 제후들을 인솔하여 귀국과 함께 정나라를 포위했습니다. 귀국의 대부는 과군께 상의하지도 않고 단독으로 정나라와 결맹하여 제후들이 이 사실에 분노하고 귀국을 정벌하자고 주장했을 때, 문공께선 훗일을 걱정하여 제후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귀국의 군사가 무탈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하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서쪽의 나라에 큰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5.30.3.) 복도 없이 문공께서 타계하셨을 때 목공은 조문도 하지 않고 돌아가신 군주를 멸시하고, 양공을 무시하며 우리 효 땅을 침략해 양국의 우호를 절단냈습니다. 우리의 작은 성들을 공격하고 활나라를 진멸하여 우리 형제국의 백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양국의 동맹을 흔들고 나라를 전복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양공께선 여전히 군주께서 베푼 옛 은혜를 잊지 못했으나 나라의 사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려워 효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5.33.3.) 

오히려 목공에게 용서를 바랬지만 목공은 이를 수용치 않고 초나라에 붙어 우리를 도모했습니다. 하늘이 보우하사 초 성왕이 운명을 달리했고 이 때문에 목공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후 귀국의 목공과 우리 양공께서 세상을 떠나고 귀국은 강공이 즉위했으며 우리는 영공이 즉위했습니다. 강공은 우리 공실 여인의 출생인데도 우리 공실에 해를 끼치고 사직을 전복시키려 했습니다. 간사한 무리를 선동하여 변경에 소요를 일으켰고 이 때문에 영호令狐의 싸움이 발발하였습니다. (6.7.4.) 그런데도 강공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우리 하곡河曲(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남쪽)을 침략하여 속천涑川(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동북쪽)을 정벌하고 왕관王官(산서성 문희현聞喜縣 서쪽)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고, 기마羈馬(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남쪽 36)를 공격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곡의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귀국이 동방으로 향하는 길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은 바로 강공이 우리와 우호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6.12.5.)

(강공의 사후) 귀국 군주(환공)이 계승하자 우리 군주 경공께선 애타게 서쪽을 바라보며 “우리를 안정시켜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기원했습니다. 허나 군주께선 결맹의 은혜는 베풀지 않고, 우리에게 적의 난이 발생한 틈을 노려 하현河縣(하곡)을 침입했고, (산서성 포현蒲縣 동북쪽)와 고(산서성 부산현浮山縣 남쪽) 땅을 분탕질하고 우리 농작물을 약탈하고 변경의 백성들을 살륙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보씨輔氏의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7.15.5.) 귀국의 군주 역시 전쟁의 폐해가 길어지는 것을 후회하고 양국의 선군 헌공과 목공께 복을 얻기를 기원하며 백거伯車를 보내 우리 경공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호를 함께 하고 구악을 버려 과거의 덕을 회복하고 전대의 공적을 생각하자.” 이 맹세가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 경공이 별세했기에 과군께서 영호의 회합을 개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귀국 군주는 또다시 불선한 마음으로 맹세를 배신했습니다. (8.11.8.) 

백적白狄은 귀국과 함께 옹주에 소재하나, 백적은 귀국의 원수이고 우리에겐 혼인 관계에 있습니다. 귀국 군주는 사신을 보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백적을 토벌하자.” 과군은 감히 백적과의 혼인 관계조차 돌보지 않고 귀국의 위의를 두려워하여 사자의 요청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귀국 군주는 백적에게 두 마음을 품고 말했습니다. “진이 장차 너희를 토벌하려 한다.” 백적은 귀국에 호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증오하여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왔습니다. 초나라 역시 귀국의 여러 갈래 마음을 미워하여 사신을 보내 알렸습니다. “진이 영호의 맹세를 배신하고 우리에게 와서 결맹을 요청했습니다. ‘밝은 상제님과 진의 세 분의 공, 그리고 초나라의 세 왕께 분명히 고합니다: “우리가 진과 왕래하는 까닭은 오로지 나라의 이익 때문입니다.” 과인은 진의 그러한 부덕을 싫어하여 이 사실을 귀국에 널리 알리고 진의 이중성을 함께 징벌하고자 합니다.’” 제후들이 이를 전해 듣고 통분하여 과인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과인은 군사를 일으켜 귀국 군주의 명을 듣고자 합니다. 오로지 우호를 원할 뿐입니다. 군주께서 만약 은혜를 베풀어 제후들을 돌아보시고 과인을 긍휼히 여기시어 결맹을 약속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과인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 뜻을 받들어 제후의 군사를 뒤로 물릴 것이니 어찌 감히 소란을 일으키겠습니까? 군주께서 이런 큰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면 과인은 불민하여 제후들의 군사를 물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감히 집사께 다 말하노니, 집사께선 무엇이 귀국의 이익인지 잘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진 환공은 이미 진 여공과 영호에서 결맹했었다. 그런데도 다시 적과 초나라를 끌어들여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제후들은 이 때문에 진나라에 가까이 붙은 것이다. 진의 난서가 중군을 지휘하고 순경이 보좌했으며, 사섭이 상군을 이끌고 극기가 보좌하고, 한궐이 하군을 이끌고 순앵이 보좌했으며, 조전이 신군을 이끌고 극지가 보좌했다. 극의는 어융으로 난침은 융우로 참전했다. 맹헌자가 말했다. “진나라 군사는 장수와 병사가 한 마음을 이루었다. 반드시 큰 공을 이룰 것이다. 5월 정해일(4), 진군은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마수麻隧(섬서성 경양현涇陽縣 북쪽)에서 진의 군사와 싸움을 벌여 크게 격퇴했다. 진의 성차成差와 불경 여보女父를 사로잡았다. 조 선공은 진중에서 사망했다. 제후군은 경수를 건너 후려侯麗(경수의 남쪽, 섬서성 예천현禮泉縣)까지 진격한 후 돌아왔다. 신초新楚(섬서성 대려현荔縣)에서 진 여공을 영접했다.

성숙공成肅公은 하에서 전사했다.


원문


(8.13.3.) 夏四月戊午晉侯使呂相:


昔逮我獻公穆公相好戮力同心申之以盟誓重之以昏姻. 天禍晉國文公惠公. 無祿獻公卽世. 穆公不忘舊德俾我惠公用能奉祀于. 又不能成大勳而爲之師. 亦悔于厥心用集我文公之成也. 文公躬擐甲跋履山川踰越險阻征東之諸侯···之胤而朝諸則亦旣報舊德矣. 人怒君之疆場文公帥諸侯及. 大夫不詢于我寡君擅及. 諸侯疾之將致命于. 文公恐懼綏靜諸侯師克還無害則是我有大造于西也. 無祿文公卽世爲不弔蔑死我君寡我襄公迭我我好伐我保城殄滅我費滑散離我兄弟撓亂我同盟傾覆我國家. 襄公未忘君之舊勳而懼社稷之隕是以有之師. 猶願赦罪于穆公. 穆公弗聽而卽謀我. 天誘其衷成王隕命穆公是以不克逞志于我. ·卽世·卽位. 康公, 我之自出又欲闕翦我公室傾覆我社稷帥我蝥賊以來蕩搖我邊疆我是以有令狐之役. 猶不悛入我河曲伐我涑川俘我王官翦我羈馬我是以有河曲之戰. 東道之不通則是康公我好也. 

及君之嗣也我君景公引領西望曰: 庶撫我乎!君亦不惠稱盟利吾有入我河縣焚我·芟夷我農功虔劉我邊垂[1]我是以有輔氏之聚. 君亦悔禍之延而欲徼福于先君·使伯車來命我景公: 吾與女同好棄惡復修舊德以追念前勳.言誓未就景公卽世我寡君是以有令狐之會. 君又不祥背棄盟誓. 白狄及君同州君之仇讎而我昏姻也[2]. 君來賜命曰: 吾與女伐.寡君不敢顧昏姻畏君之威而受命于吏. 君有二心於: 將伐女.應且憎是用告我. 人惡君之二三其德也亦來告我曰: 令狐之盟而來求盟于我: 昭告昊天上帝秦三公·楚三王: 余雖與出入余唯利是視.不穀惡其無成德是用宣之以懲不壹.’” 諸侯備聞此言斯是用痛心疾首暱就寡人. 寡人帥以聽命唯好是求. 君若惠顧諸侯矜哀寡人而賜之盟則寡人之願也其承寧諸侯以退豈敢徼亂? 君若不施大惠寡人不佞其不能以諸侯退矣[3]. 敢盡布之執事俾執事實圖利之.

秦桓公旣與晉厲公令狐之盟而又召欲道以伐諸侯是以睦於. 晉欒書將中軍荀庚佐之; 士燮將上軍佐之; 韓厥將下軍荀罃佐之; 趙旃將新軍佐之. 御戎欒鍼爲右. 孟獻子: 帥乘和師必有大功.五月丁亥師以諸侯之師及師戰于麻隧. 師敗績成差及不更女父. 曹宣公卒于師. 師遂濟侯麗而還. 晉侯新楚.

成肅公卒于.


(1) 는 수가 본자이다. 완각본에는 수자로 쓰고 있지만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그리고 금택문고본 등을 따라 고쳤다.

(2) 완각본에는 “我之昏姻也”로 쓴다. 여기서는 『교감기』와 금택문고본을 따라 “”자를 삭제했다.

(3) 완각본에는 “이”자가 없다.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금택문고본을 따라 “이”자를 더했다.


주석

夏四月戊午: 무오일은 5일이다.

晉侯使呂相: : 여상呂相은 위기魏錡 아들 위상魏相이다. 위기는 여기呂錡라고도 부르며, 위상 역시 려상으로 부른다. 아래의 글은 진과 관계를 끊는 문서로서 혹 여상이 집필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전한 글일 수도 있다. 그 후 진의 「저초문詛楚文」은 이 문서를 본따 쓴 것이다. 두예는 “진 여공의 명을 입으로 전한 것”이라고 풀이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춘추시대 지도. 양진 


昔逮我獻公穆公相好: 원래 뜻은 급이다. 장병린의 『독』은 이 “체”자를 “”으로 해석하면 문맥이 통하지 않으므로 “체”는 “ ”로 읽고 뜻은 라고 한다. 즉 “석체”는 “석고昔古”와 같다. 이 주장이 문맥 상 비교적 잘 통한다.

戮力同心申之以盟誓: 진 목공과 진 헌공은 일찍이 서로 맹세한 적이 있지만 『춘추』의 세 『전』에선 이를 기재하지 않았다.

重之以昏姻: 진 헌공의 여식이 진 목공의 부인이 되었다.

天禍晉國文公惠公: 문공 중이는 각국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했고, 혜공 이오 역시 망명을 하다가 양나라를 떠나 진에서 머물렀다. 여기서는 다만 진과 제 두 나라만을 대표로 거론했다.

無祿: 불행과 같다.

獻公卽世: 즉세는 「월어하」의 “선인들이 세상을 떠남(先人就世)”에서의 “就世”와 같다. 한나라와 위나라 때 사람들은 이를 하세下世 혹은 거세去世라고 말했다. 헌공은 희공 9년에 세상을 떠났다.

穆公不忘舊德俾我惠公用能奉祀于: 진나라가 혜공을 즉위할 때 도움을 준 사실은 『좌전·희공15년』의 기사를 참고.

又不能成大勳而爲之師: 한의 전쟁은 『좌전·희공15년』의 기사 참조.

亦悔于厥心用集我文公: 성취, 완성의 뜻. 集我文公”은 목공이 문공이 진나라로 입성할 때 호위했었던 일을 가리킨다. 『좌전·희공24년』의 기사 참고. 『시·대아·대명』의 “하늘이 땅을 두루 살펴보니 이미 천명이 이루어져 있었다(天監在下, 有命旣集), 『서·문후지명』의 “이에 상제께서 천명을 문왕에게 성취시켜(惟時上帝集闕命于文王), 『모공정』의 “하늘이 천명을 성취하니(惟天將集闕命)”등에서의 집자 역시 뜻이 이와 같다.

之成也: 성은 성취.

文公躬擐甲跋履山川踰越險阻征東之諸侯···之胤而朝諸: 이에 대해선 『춘추』의 세 『전』과 제자서에 기록된 바가 없다. (쪽 제후란 말을 보면, 진 문공이 조나라, 위나라, 허나라, 정나라 등을 정벌한 일을 가리킨다. 진 목공을 위해서라는 문구는 외교적 수사이고 실은 자신의 패권을 위한 일이다. 옮긴이)

則亦旣報舊德矣: 옛 은혜란 혜공과 문공을 옹립하는데 세운 공로.

人怒君之疆場文公帥諸侯及: 진과 진 두 나라가 정나라를 포위했던 사건은 『좌전·희공30년』의 기사 참고. 진 문공의 망명 당시 정 문공이 무례를 범했고, 또 진을 배신하고 초에 협조했었기 때문에 정나라를 포위했다. 본문의 정나라가 진의 영토를 침범했다는 얘기는 혹 그저 외교적 수사인지 당시의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좌전·희공30년』의 기사에서도 다만 진과 진 두 나라가 정나라를 포위했다고만 기술하고 “문공이 제후의 군사를 이끌었다”는 언급은 없다.

大夫不詢于我寡君擅及: 정나라와 맹약을 맺은 사람은 진 목공인데, 여기서 “진의 대부”라고 말한 것은 완곡한 표현이다.

諸侯疾之將致命于: 『좌전·희공30년』의 기사에 따르면, 진나라 군사를 공격하려 한 이는 호언이다.

文公恐懼綏靜諸侯師克還無害則是我有大造于西也: 대조大造 큰 공로.

無祿文公卽世爲不弔: 부조不弔 상서롭지 않게. 다음의 “君又不祥”의 “불상”과 같은 뜻. 『좌전·성공7년』의 주석에도 보인다.

蔑死我君: 혜동의 『보주』와 무억의 『의증』은 모두 『석문』에서 인용한 혹본을 따라 “蔑我死君”으로 쓴다. “사군”의 뜻은 『좌전·희공33년』의 “其爲死君乎”의 “사군”과 같고, 다음의 “寡我襄公”과는 정반대되는 뜻이다. 문맥 상 이렇게 보는 것이 확실히 순조롭다. 그러나 『삼국지·위문제기』의 「종제」에 “돌아가신 선군이신 부친(蔑死君父)”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좌전』의 이 구절을 채용한 것으로서 조비가 읽은 『좌전』에선 “멸사蔑死”를 연문連文으로 보고 있다. 장병린의 『독』을 참고했다.

寡我襄公迭我: 가차했다. 『좌전·은공9년』의 “侵軼, 『좌전·희공32년』의 “過軼”의 일과 같고 갑자기 침략함이다.

我好: 간절은 단절의 뜻. 장병린의 『독』에 설명이 있다. 『당석경』은 “아호”의 사이에 “”자로 주를 달고 있다. “아호”는 곧 “아동호”와 같고 동맹을 맺은 우호적인 국가의 의미. 정나라를 가리킨다.

伐我保城: 고사기의 『지명고략』에선 보성은 지명이 아니고, 는 보 같고 작은 성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보성은 동의사의 연용이다.

殄滅我費滑: 음은 첨이다. 멸절의 뜻. 진멸은 동의사의 연용이다. 이 사건은 『좌전·희공33년』의 일이다. 는 활국의 도성이고 비활은 곧 활나라를 가리킨다.

散離我兄弟: 정나라와 활나라 그리고 진나라는 모두 희성으로 형제의 나라.

撓亂我同盟傾覆我國家. 襄公未忘君之舊勳: 진 문공을 옹립하는데 세운 공로.

而懼社稷之隕是以有之師: 효의 전쟁은 『좌전·희공33년』의 기사 참조.


춘추시대 지도. 효산전쟁


猶願赦罪于穆公: “사”와 “석”은 같은 뜻, 석은 풀다. 왕인지의 『술문』에 자세한 설명. 願赦罪于穆公”은 진 진과 화해를 하려 했었음을 보여준다.

穆公弗聽而卽謀我. 天誘其衷: 天誘其衷”은 『좌전·희공28년』의 주석 참조.

成王隕命穆公是以不克逞志于我: 『좌전·문공14년』과 그 주석에 전말이 자세하다.

·卽世·卽位. 康公, 我之自出: 진 강공은 진나라 군주의 외조카가 된다.

又欲闕翦我公室: 여소객余蕭客 『고경해구침古經解鈎沈』에서 인용한 송본 공영달의 『소』에 따르면, 궐전은 손해의 뜻.

傾覆我社稷帥我蝥賊: 『이아·석충』에 따르면, 는 싹과 뿌리를 갉아먹는 해충이고, 은 싹과 줄기를 먹는 해충이다. 국가의 안위에 위험을 가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

以來蕩搖我邊疆: 앞의 모적은 공자옹이다. 이는 진 강공이 공자옹을 진나라로 호송한 일을 가리키는데 사실은 자신들이 공자옹을 위해 파견한 이들을 대적하기 위한 (이미 조돈이 변심하여 영공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사건이었다. 문공 6년과 7년의 『좌전』을 참조.

我是以有令狐之役: 영호의 전투는 『좌전·문공7년』의 기사 참조.

猶不悛: 음은 권이고, 뉘우침이다.

入我河曲伐我涑川: 음은 속이다. 『방여기요』에 따르면, 속수성은 현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동북쪽인데 즉 지금의 속천이다. 두예는 속천을 속수로 봤지만 속수는 원류가 매우 길고 한 성 한 읍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구를 해석하는데 적당하지 않다.

俘我王官: 포로로 잡은 양민들. 왕관은 『좌전·문공3년』의 주석 참조. 진 강공은 진나라의 속천을 정벌하면서 왕관의 양민들을 포로로 잡았다. 다른 사건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翦我羈馬我是以有河曲之戰: 하곡의 싸움은 『좌전·문공12년』의 기사.

東道之不通則是康公我好也: 진은 진의 동쪽에 있다. 두 나라는 다시 서로 우호적으로 왕래하지 않았고 즉 강공의 시대에 단절되었다.

及君之嗣也: 진 환공은 공공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我君景公引領西望曰: 庶撫我乎!: 두예: “진나라를 향해 우리 진나라를 편하게 해달라고 말한 것이다.

君亦不惠稱盟: 두예: “진의 바람에 부응하여 동맹을 맺지 않았다.” 두예는 칭 부합하다로 해석했는데 옳지 않다. 칭은 거 뜻이다. 칭맹은 곧 맹회이다.

利吾有: 노 선공 15, 진은 출병하여 적적 로씨를 멸했다.

入我河縣: 유문기의 『소증』은 하현은 하곡을 달리 쓴 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장한다.

焚我·: 『춘추·희공33년』을 참조. 에 대해 두예는 주석을 달지 않았다. 심흠한의 『지명보주』는 현 부산현浮山縣 남쪽이라 하나 확실치 않다. 어떤 이는 부산현의 서쪽이라고 말한다. 고사기의 『지명고략』에선 “之邑”이라고 말하지만 거리가 기와 멀지 않아야 한다.

芟夷我農功: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 농가의 수확물을 약탈해 갔다.

虔劉我邊垂: 본자이다. 완각본에는 수자로 쓰고 있지만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그리고 금택문고본 등을 따라 고쳤다. 건류에 대해 두예는 “모두 죽임”으로 풀이했다. 즉 진나라 변방의 백성들을 도살했다는 뜻. 그러나 『상서·여형』의 공영달의 『소』에서 인용한 정현의 주석을 보면, 건류虔劉는 소요의 뜻이라고 한다.

我是以有輔氏之聚: 보씨의 싸움이다. 전쟁은 대중을 소집해야 한다. 그래서 전쟁을 취라고도 한다. 이 전투는 『좌전·선공15년』의 일이다.

君亦悔禍之延而欲徼福于先君·: 진 헌공과 진 목공의 우호관계. 앞에 나온 얘기이다.

使伯車來命我景公: 백거는 진 환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침이고 후자后子라고 부르기도 한다.

吾與女同好棄惡復修舊德以追念前勳.言誓未就景公卽世我寡君是以有令狐之會: 이 문구에서 “과군”을 세 차례, “아군”을 한 차례 썼는데 아마 이것은 사신의 말투 차이로 보인다. “과인” 역시 다섯 차례 사용했는데 역시 진의 군주의 어투로 생각된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문장을 꾸밈에 있어서 엄밀하지 못한 부분이다. 마종연의 『보주』는 이 문장을 두 단락으로 나누어 앞은 “昔逮我先公”에서寡君不敢顧昏姻”까지로 보고 이는 여상의 말투로, 후반부 “君有二心於狄”에서實圖利之”는 여상이 진 여공을 대신하여 진나라를 힐난한 것으로 보는데 반드시 그런 것 같진 않다. 영호의 회합은 『좌전·성공11년』을 참조.

君又不祥: 불상과 앞의 “不弔”의 뜻은 같다.

背棄盟誓. 白狄及君同州: 여기 “급”은 개사로 쓰였다. 의 용법과 같다. 『시·대아·판』의 “내 비록 하는 일은 다르나 너와 함께 동료이다(我雖異事, 及爾同寮), 『주례·태재』의 “집사와 함께 제기를 깨끗이 씻었는지 검사하고(及執事滌濯)” 등의 급자 역시 개사의 용법이다. 동주는 『상서·우공』에 나오는 옹주雍州이다. 나머지 상세한 설명은 『좌전·희공33년』의 주석을 참조.

君之仇讎而我昏姻也: 완각본에는 “我之昏姻也”로 쓴다. 여기서는 『교감기』와 금택문고본을 따라 “”자를 삭제했다.

君來賜命曰: 吾與女伐.寡君不敢顧昏姻畏君之威而受命于吏: “수”자는”의 뜻으로 읽어야 한다. 두 글자는 고문과 금문에서 모두 “”로 쓴다. 命于吏 진과 함께 적을 토벌할 준비를 하게 함.

君有二心於: 는 우 같다.

: 將伐女.應且憎: 兩務之詞[1]. 한편으론 적과 호응하고, 한편으론 적을 싫어하다. 「주어중」의 “그의 숙부가 한편으론 호응하고 한편으로는 미워했다”, 「진어8」의 “그대의 호응과 미움을 두려워하다(懼子之應且增[과 같다])” 등의 예가 있다. 왕념손은 “”자는 모두 이 호응/부응(接受)의 뜻이라고 말한다. 『술문』에 자세하다.

是用告我. 人惡君之二三其德也亦來告我曰: 令狐之盟而來求盟于我: 昭告昊天上帝秦三公·楚三王: 의 음은 호, 광대무변의 뜻. 진의 삼공은 목공·강공·공이다. 초의 삼왕은 성왕·목왕·장왕이다.

余雖與出入: 출입은 왕래.

余唯利是視.: 이는 진이 초에 대해 한 말인데 초를 통해 전해 들었다.

不穀惡其無成德是用宣之以懲不壹.: 이때 진과 초는 이미 화해를 했기 때문에 초가 진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諸侯備聞此言斯是用痛心疾首暱就寡人. 寡人帥以聽命唯好是求. 君若惠顧諸侯矜哀寡人而賜之盟則寡人之願也其承寧諸侯以退: 승녕承寧 지식止息, 곧 안정의 뜻. 앞의 “綏靜諸侯”와 뜻이 같다. 두예는 “군주의 뜻을 받들어 제후를 편안하게 안정시키다(承君之意以寧靜諸侯)”로 풀어서 “승녕”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했지만 정확하지 않다. 장병린의 『독』에 설명이 자세하다.

豈敢徼亂? 君若不施大惠寡人不佞: 불녕은 당시의 관습어로서 『좌전·성공16년』의 “諸臣不寧, 『좌전·소공20년』의 “臣不寧, 「노어상」의 “寡君不寧 등으로 입증할 수 있다. 불녕은 불민하여(不才·不敏)의 뜻.

其不能以諸侯退矣: 완각본에는 “이”자가 없다.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금택문고본을 따라 “이”자를 더했다.

敢盡布之執事俾執事實圖利之: 주석 없음.

秦桓公旣與晉厲公令狐之盟而又召欲道以伐: 「진본기」에 따르면, 영호의 맹약 이후 진 환공은 맹약을 배신하고 적과 함께 진을 공격할 모의를 했다.

諸侯是以睦於. 晉欒書將中軍荀庚佐之: 순경은 순수를 대신했다.

士燮將上軍: 순경을 대신했다.

佐之: 사섭을 대신했다.

韓厥將下軍: 극기를 대신했다.

荀罃佐之: 조동을 대신했다.

趙旃將新軍: 한궐을 대신했다.

佐之: 조괄을 대신했다. 성공 3년 진나라는 6군 체제로 증군했다. 이번 전투와 언릉의 전쟁에서 진은 다만 4군을 출병하여 신상군과 신하군은 모두 없어진듯하다. 제소남의 『주소고증』에 근거한 설명이다.

御戎: 두예의 주석에 따르면, 극의는 극지의 동생이고 『좌전·성공16년』에선 보의步毅로 불린다.

欒鍼爲右: 두예의 주석에 따르면, 난침欒鍼은 난서의 아들이다.

孟獻子: 帥乘和: 군의 장수이고 승은 전차에 올라탄 갑사이다. 수승화란 상하가 일치되었다는 뜻.

師必有大功.五月丁亥: 정해일은 4일이다.

師以諸侯之師及師戰于麻隧: 마수麻隧나라 땅으로서 『청일통지』에 따르면 현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북쪽이고, 『방여기요』에선 涇陽縣 서남쪽이라고 한다. 『청일통지』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師敗績獲秦成差及不更女父: 『한서·백관공경표』와 『속한서·백관지』5의 유소의 주석에서 인용한 유초의 『작제』에 따르면, 불경不更은 진의 상앙이 제정한 4급작에서 사의 가장 높은 등급이지만 대부는 아니다. 그의 작위는 매우 낮은데 『좌전』에서 그가 사로잡힌 사실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까지 적고 있다. 혹 이 춘추시대의 불경은 상앙 이후의 불경과 이름은 같지만 그 실체는 다를 수 있어 그 직위는 상당히 높을 수 있다. 유초는 『작제』에서 또 “불경은 거우車右”라고 말하는데, 본문의 불경은 혹 그럴 수도 있다.

曹宣公卒于師: 『예기·단궁하』에 “제후들이 진을 정벌할 때 조 환공(환자는 선자로 써야 옳다)이 군중에서 사망했다. 제후들이 함 요청하여 그를 염습했다.”고 말한다.

師遂濟: 경수는 경양현의 남쪽을 통과한 후 위수로 합류된다. 「노어하」에 따르면 당시 제후들의 군대는 모두 경수를 건너는 것을 꺼려했다. 진의 숙향이 노의 숙손표를 쳐다보자 노나라 군사들이 제일 먼저 도하하기 시작했고, 각국의 군사들이 이를 따라 건넜다고 한다.

侯麗而還: 당시 진의 국도는 옹(현 섬서성 봉상현의 남쪽)이었고, 진은 동북쪽에서부터 서남쪽을 향해 진군했다. 경수를 건너는 것 역시 서남쪽을 향한다. 후려侯麗는 그러므로 경수의 남쪽 가에 해당한다. 혹자는 현 예천현禮泉縣 부근이라고 한다.

晉侯新楚.: 신초新楚는 진나라 땅이다. 섬서성 조읍현朝邑縣 부근(조읍현은 이미 대려현荔縣 통합되었다)이다.

成肅公卒于: 유강공의 예언의 징험을 말한 것. 진나라 땅으로 『좌전·희공30년』의 주석을 참조.



[1] 용어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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