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나라를 방치한 노나라를 질책하는 진나라 (춘추좌전.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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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사신이 증나라 문제로 우리나라로 와서 질책하였다 . “어떤 연유로 증나라를 망하게 방치하였는가 ? ” 계무자가 진나라로 가서 도공을 접견하고 , 또 명을 받았다 . 원문 (9.6.6.)  晉 人以 鄫 故來討 , 曰 : “ 何故亡 鄫 ? ” 季武子 如 晉 見 , 且聽命 . 주석 ⊙ 季孫宿 如 晉 : “숙 宿 ”을 『국어』에선 “숙 夙 ”으로 쓴다 . 공영달의 『소』에선 『세본』과 『예기·단궁』의 정현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는데 역시 “ 夙 ”으로 쓴다 . 『설문』에선 숙자는 𠈇 의 소리를 따른다고 설명한다 . 𠈇 와 夙 은 형태가 다르지만 같은 글자이다 . 그러므로 “숙 宿 ”은 곧 “숙 夙 ”과 같다 . 계손숙은 행보의 아들이다 . 노나라의 경은 자손이 대대로 잇는다 . 숙은 부친의 뒤를 이어 경이 되었지만 당시 노나라의 집정은 중손멸이었다 . 춘추시대 지도. 증나라   ▣ 晉 人以 鄫 故來討 , 曰 : “ 何故亡 鄫 ? ” : 증나라가 이미 노나라의 부용국이 되었는데 거나라가 증나라를 멸망시킬 때 노나라가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책망한 것이다 . 사실은 노나라가 증나라를 버린 것으로서 스스로 증나라를 보호할 힘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 ▣ 季武子 如 晉 見 , 且聽命 : 진나라의 처분을 들은 것 .

숙손표 주邾나라를 빙문하다 (춘추좌전.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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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 목숙 穆叔 ( 숙손표 ) 이 주 邾 나라로 가서 빙문하고 또 우호를 맺었다 . 원문 (9.6.5.)  冬 , 穆叔 如 邾 , 聘 , 且修平 . 주석 춘추시대 지도. 주나라 ▣ 冬 , 穆叔 如 邾 , 聘 , 且修平 : 양공 4 년에 주나라와 전쟁을 치렀고 노나라가 호태에서 패배했었는데 이는 증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 이제 증나라는 이미 거나라에게 멸망되었기 때문에 숙손표와 주나라가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이다 .

증나라를 멸한 거나라 (춘추좌전.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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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라가 증 鄫 나라를 멸하였는데 , 증나라가 노나라에 바친 뇌물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원문 (9.6.4.)  莒 人滅 鄫 , 鄫 恃賂也 . 주석 춘추시대 지도. 거나라 ▣ 莒 人滅 鄫 , 鄫 恃賂也 : 뇌물을 받은 이가 누구인지 『좌전』에 언급이 없다 . 어떤 이는 노나라에 뇌물을 주었다 하고 , 어떤 이는 거나라라고도 말한다 . 모두 근거가 없다 . 이때 증나라는 이미 노나라의 부용국에서 벗어난 상태로서 노나라가 구원해줄 수 없음을 명확히 알고 있었는데 뇌물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 『전국책·위책』 4 는 “증나라가 제나라를 믿고 월나라를 화내게 했다 . 제나라에 화자의 변란이 생기자 월나라는 증나라를 멸망시켰다 . ”고 말하는데 , 이것은 전국시대 책사의 말로써 믿을만한 역사로 보긴 어렵다 . 『공양』과 『곡량』은 “또 다른 성의 증나라 ( 立異姓 ) “의 설을 만들었지만 더욱 믿을 수 없다 . 춘추시대 지도. 증나라의 위치

등 성공이 노나라를 예방하다 (춘추좌전.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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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등 성공이 와서 예방하였는데 처음으로 양공을 조견한 것이다 . 원문 (9.6.3.)  秋 , 滕成公 來朝 , 始朝公也 . 주석 춘추시대 지도. 등나라 ▣ 秋 , 滕成公 來朝 , 始朝公也 : 등나라 군주는 은공 11 년 , 환공 2 년 , 문공 12 년에 노나라를 예방한 후 『춘추』와 『좌전』에 예방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 마지막 예방으로부터 48 년 만이고 양공이 즉위한 지 6 년째 되는 해이다 . 『좌전』은 “ 始朝公 ”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는데 모두 오랫동안 예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송나라의 화약華弱과 악비樂轡 (춘추좌전.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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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화약 華弱 과 악비 樂轡 는 어릴 적부터 허물없이 지냈고 장성해서도 서로 놀리고 또 상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 어느 날 조정에서 자탕 子蕩 ( 악비 ) 이 분노하여 활로 화약의 머리를 쇠고랑 채우듯이 하였다 . 평공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 “무 武 를 관장하는 이 ( 사마 ) 가 조정에서 쇠고랑이 채워졌으니 전쟁에서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 ” 곧 화약을 축출했다 . 여름 , 화약이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다 . 사성 자한 子罕 이 아뢰었다 . “같은 죄에 형벌이 상이하니 형의 집행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 조정에서 멋대로 남을 모욕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있습니까 ? ” 자탕 역시 내쫓았다 . 자탕은 자한의 집 대문에 활을 쏘며 말했다 . “조만간 내 뒤를 따르지 않겠는가 ! ” 그런데도 자한은 그를 예전처럼 잘 대우했다 . 원문 (9.6.2.)  宋華弱 與 樂轡 少相狎 , 長相優 , 又相謗也 . 子蕩 怒 , 以弓梏 華弱 于朝 . 平公 見之 , 曰 : “ 司武而梏於朝 , 難以勝矣 . ” 遂逐之 . 夏 , 宋華弱 來奔 . 司城 子罕 曰 : “ 同罪異罰 , 非刑也 . 專戮於朝 , 罪孰大焉 ? ” 亦逐 子蕩 . 子蕩 射 子罕 之門 , 曰 : “ 幾日而不我從 ! ” 子罕 善之如初 . 주석 ⊙ 夏 , 宋華弱 來奔 : “약 弱 ”자를 『공양』에선 “익 溺 ”으로 쓴다 . 『당석경』에선 그대로 “ 弱 ”으로 쓴다 .   춘추시대 참고도. 송나라의 주요 공족 ▣ 宋華弱 與 樂轡 少相狎 : 『좌전·환공원년』의 공영달의 『소』에서 인용한 『세본』의 “화보독은 대공의 손자이며 호부열의 아들이다”와 『예기·단궁하』의 공영달의 『소』에서 인용한 『세본』의 “대공이 악보술을 낳고 , 술이 석포원역을 낳았다”는 말에 근거하면 , 화씨와 악씨는 모두 송 대공의 후예이고 , 대대로 송나라의 대부였다 . 압은 습의 뜻으로서 매우 친밀한 관계여서 서로 허물을 주고받는 사이를 말한다 . ▣ 長相優 : 두예 : “우는 희롱함이다 . ” ▣ 又相謗也 ...

동맹국의 부고는 이름을 쓴다. (춘추좌전.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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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 6 년 봄 , 기 杞  환공이 타계했다 . 처음으로 이름을 써서 부고했는데 동맹했기 때문이다 . 원문 (9.6.1.)  六年春 , 杞桓公 卒 . 始赴以名 , 同盟故也 . 주석 ⊙ 六年春王三月 : 정월 14 일 을미일이 동지였고 건자이다 . ⊙ 壬午 : 임오일은 2 일이다 . ⊙ 杞伯姑容 卒 : 공영달의 『소』에서 『세본』을 인용 , 고용 姑容 은 기 성공의 아우라고 말하고 있다 .   춘추시대 지도. 기 杞 나라 ▣ 六年春 , 杞桓公 卒 . 始赴以名 , 同盟故也 : 기 환공은 희공 24 년에 즉위하여 70 년간 재위했다 . 노 성공 5 년 , 7 년 , 9 년에 노나라와 동맹했고 양공 당시 동맹한 기사는 찾아볼 수는 없다 . 본문의 동맹은 전대의 일이다 . 기나라는 춘추시대 이래로 군주의 부고에 이름을 적은 적이 없었다 . 성공은 희공 23 년에 죽었지만 역시 “기자가 서거했다”라고만 적고 있다 . 이 해 이후로 기나라 군주의 사망과 장례가 모두 『노춘추』에 기재되고 있다 . 『춘추·희공 23 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

계문자季文子의 죽음 (춘추좌전.9.5.10.)

계문자 ( 계손행보 ) 가 타계했다 . 대부의 소렴에는 군주가 참석한다 . 계씨의 가재는 집안의 물건으로 장례에 쓸 비품을 준비했는데 , 비단옷을 입은 첩이 없었고 ,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으며 , 금과 옥 등을 쌓아 두지 않았고 , 여벌의 기구도 없었다 .  군자는 이로써 공실에 대한 계문자의 충성을 알 수 있었다 . “세 군주를 보필하였지만 사사롭게 축적한 재물이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원문 (9.5.10.)  季文子 卒 . 大夫入斂 , 公在位 . 宰 庀 家器爲葬備 , 無衣帛之妾 , 無食粟之馬 , 無藏金玉 , 無重器備 , 君子是以知 季文子 之忠於公室也 : “ 相三君矣 , 而無私積 , 可不謂忠乎 ? ” 주석 ▣ 季文子 卒 . 大夫入斂 , 公在位 : 『예기·상대기』에 따르면 , 대부의 대렴에는 군주가 몸소 참석하고 동쪽 서단 序端 에 군주의 자리를 설치하여 서쪽을 향한다 . 대렴은 당상에서 거행하는데 당은 남향이며 동서 양쪽에 벽이 있는데 이 벽의 앞쪽을 고대에 서단이라고 불렀다 . ▣ 宰 庀 家器爲葬備 : 재는 계씨 집안의 가신의 우두머리 . 비 庀 의 음은 비 庇 이고 구비하다 . 집안에 있던 기물로 장례에 쓰일 비품을 준비하였다 . ▣ 無衣帛之妾 , 無食粟之馬 , 無藏金玉 , 無重器備 : 기비는 모든 용구이다 . 무중의 중은 평성으로 그저 한 벌만이 있고 여벌이 없다 . ▣ 君子是以知 季文子 之忠於公室也 : “ 相三君矣 : 계손행보는 『춘추·문공 6 년』에 처음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적었을 때부터 출사했음을 알 수 있다 . 선공 8 년 양중이 죽은 후 , 계손이 재상이 되었으며 선공과 성공 그리고 양공 3 대를 거치며 총 33 년을 재상으로 있었다 . ▣ 而無私積 , 可不謂忠乎 ? ” : 「노세가」에서 이 문구를 채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