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문자季文子의 죽음 (춘추좌전.9.5.10.)



계문자(계손행보)가 타계했다. 대부의 소렴에는 군주가 참석한다. 계씨의 가재는 집안의 물건으로 장례에 쓸 비품을 준비했는데, 비단옷을 입은 첩이 없었고,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으며, 금과 옥 등을 쌓아 두지 않았고, 여벌의 기구도 없었다

군자는 이로써 공실에 대한 계문자의 충성을 알 수 있었다. “세 군주를 보필하였지만 사사롭게 축적한 재물이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문

(9.5.10.) 季文子. 大夫入斂公在位. 家器爲葬備無衣帛之妾無食粟之馬無藏金玉無重器備君子是以知季文子之忠於公室也: 相三君矣而無私積可不謂忠乎?



주석

季文子. 大夫入斂公在位: 『예기·상대기』에 따르면, 대부의 대렴에는 군주가 몸소 참석하고 동쪽 서단序端 군주의 자리를 설치하여 서쪽을 향한다. 대렴은 당상에서 거행하는데 당은 남향이며 동서 양쪽에 벽이 있는데 이 벽의 앞쪽을 고대에 서단이라고 불렀다.

家器爲葬備: 재는 계씨 집안의 가신의 우두머리. 의 음은 비이고 구비하다. 집안에 있던 기물로 장례에 쓰일 비품을 준비하였다.

無衣帛之妾無食粟之馬無藏金玉無重器備: 기비는 모든 용구이다. 무중의 중은 평성으로 그저 한 벌만이 있고 여벌이 없다.

君子是以知季文子之忠於公室也: 相三君矣: 계손행보는 『춘추·문공6년』에 처음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적었을 때부터 출사했음을 알 수 있다. 선공 8년 양중이 죽은 후, 계손이 재상이 되었으며 선공과 성공 그리고 양공 3대를 거치며 총 33년을 재상으로 있었다.

而無私積可不謂忠乎?: 「노세가」에서 이 문구를 채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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