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영공이 래萊나라를 멸하다. (춘추좌전.9.6.7.)



11, 제 영공이 래나라를 멸하였는데 래나라는 숙사위에게 뇌물을 바쳤기 때문에 그의 대책만 믿고 있었다. (9.2.2.) 


정나라의 자국子國이 와서 빙문했던 작년 4, 안약晏弱이 동양東陽에 성을 쌓고 이어 래나라의 국도를 포위했다. 갑인일, 성벽 주위에 토산을 쌓아 성가퀴로 접근했다. 기 환공이 사망한 달의 을미일(올해 3 15), 래나라의 왕추王湫가 군사를 이끌고 정여자正輿子 및 당의 군사와 함께 제나라 군을 공격했지만 제나라가 이를 크게 물리쳤다. 정미일(27), 래나라로 쳐들어갔다. 래 공공 부유浮柔는 당으로 도망쳤다. 정여자와 왕추는 거나라로 도망쳤지만 거나라는 그들을 죽였다

4, 진무우陳無宇가 래나라의 종기宗器를 혜공(원문은 양공의 사당)의 사당에 바쳤다. 안약은 당읍을 포위하여 11월 병진일(11월에는 병진일이 올 수 없다. 12 10일이다.)에 멸망시켰다. 래나라 백성들을 예이주시켰다. 고후와 최저가 래나라 땅의 경계를 구획했다.



원문

(9.6.7.) 十一月齊侯恃謀也. 鄭子國之來聘也四月晏弱東陽而遂圍. 甲寅堙之環城傅於堞. 杞桓公卒之月乙未王湫帥師及正輿子·人軍師大敗之. 丁未. 萊共公浮柔. 正輿子·王湫人殺之. 四月陳無宇宗器于襄宮. 晏弱十一月丙辰而滅之. . 高厚·崔杼定其田.



주석

十一月齊侯恃謀也: 두예: “숙사위에게 뇌물을 주었던 일이다. 양공 2년의 일이다.


춘추시대 지도. 래나라


鄭子國之來聘也: 자국이 노나라를 예방한 날은 작년 4월이다. 『좌전』에서 “정 희공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혹 그때 동시에 제나라를 예방했을 수 있다.  

四月晏弱東陽: 안약은 이미 양공 2년에 동양에 성을 쌓아 래나라를 압박했고, 양공 5 4월에 다시 성을 쌓았다.

而遂圍. 甲寅: 작년 4월 초하루가 병진일이었기 때문에 다시 갑인일이 올 수 없다.

堙之環城: 으로도 쓰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문구의 뜻은 래나라 성의 사방에 흙으로 토산을 세웠다는 의미. 『손자·모공편』의 “거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고대에 성을 공격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傅於堞: (성가퀴 즉 성 위의 낮은 담장)이고 여장女牆 가리킨다. 『좌전·선공12년』의 주석에 상세하다.

杞桓公卒之月: 이해 3월이었다. 포위한 지 일년이다.

乙未: 을미일은 15일이다.

王湫帥師及正輿子·人軍: 왕추는 제나라 국좌의 무리이다. 제나라에서 국좌를 죽였고 이때 왕추가 래나라로 도망친 일이 『좌전·성공18년』의 기사에 보인다. 정여자는 『좌전·양공2년』의 주석 참조. 은 래나라의 읍이다. 현 산동성 평도현平度縣 동남쪽으로 생각된다. 혹자는 산동성 즉묵현의 남쪽 80리 떨어진 곳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래나라의 영역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는다.

師大敗之: 왕추 등을 패배시켰다.

丁未: 정미일은 27일이다.

. 萊共公浮柔: “공”은 아마 래나라가 망한 후 유민들이 붙여준 시호로 생각된다. 부유는 그의 이름이다. 당은 동남쪽에 있다.

正輿子·王湫人殺之. 四月陳無宇宗器于襄宮: 진무우는 경중의 현손이다. 『사기·전경중세가』를 참조. 양궁에 대해 두예는 “제 양공의 사당이다.”라고 말했는데 양공에서 영공까지는 8대이다. 옛 의례에 따르면 이때 양공의 사당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또 무슨 까닭으로 다른 사당을 제쳐두고 유독 양공의 사당에 바쳤을까? “양”자는 “혜”자로 써야 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실례로 『좌전·문공11년』의 “제 양공”은 “제 혜공”의 오류이다. 해당 주석에 설명이 자세하다. 혜공은 일찍이 노나라 선공 7년과 9년에 래나라를 정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래나라의 종기를 그의 사당에 바쳤던 것이다. 전해지는 기에 숙이종叔夷鐘 있는데, 그 명문을 보면 “[숙이에게] 래나라의 포로 300명과 50가를 노예로 하사했다(僕三百又五十家)” 등등의 말이 있다. 곧 래이고 “래복”은 래나라를 멸망시킨 후 포로를 노예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 종은 래나라가 멸망한 후의 제작된 것이다. 곽말약의 『양주금문사대계고석』에서는 “대체로 이 전쟁에서 숙이가 가장 큰 공적을 세웠다”고 설명하지만 『좌전』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

晏弱十一月丙辰: 11월에는 병진일이 없다. 11월”은 『춘추』에 근거하여 “12월”로 써야 맞다. 병진일은 12 10일이다.

而滅之: 당은 래나라의 한 읍에 불과하다. 『좌전』은 그 달과 날자까지 들어 “멸지”라고 쓰고 있다. 당연히 래나라의 군주는 이곳에 있었을 터이고 역시 사망했다. 『공양』에서 “나라가 망하고 군주는 죽었다”고 썼는데 사실이다.

: 래나라 백성들을 예 이주시킨 것이지 군주가 그 곳으로 옮겨갔다는 얘기가 아니다. 예자에 대해 『설문』은 “제나라 땅”이라고 말했는데, 허신은 즉 이 예를 장공 5년에 언급된 예나라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예 땅은 현재 어디인지 상고할 수 없다.

高厚·崔杼定其田: 래나라 토지의 경계를 구획한 것이다. 제나라는 래나라를 멸망시킨 후 당연히 그 토지를 제나라의 군주와 신하에게 분배했다. 먼저 고후와 최저가 가서 땅을 조사한 후 구획하는 방안을 제출했다. 두예는 “고후는 고고의 아들”이라고 설명했다. 최저는 『좌전·선공12년』의 주석에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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