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자중이 오나라를 정벌하다 (춘추좌전.9.3.1.)


초나라 자중이 오나라를 정벌하다


양공 3년 봄, 초나라의 자중子重이 오나라를 정벌할 때 정예 병사를 선발했다. 구자鳩茲(안휘성 무호시蕪湖市 동남쪽 25)에서 승리를 거두고 형산衡山까지 이르렀다. 자중은 등료鄧廖에게 전차병 300명과 보병 3,000명을 이끌고 가서 오나라를 침략하게 했다. 오나라는 초군의 중앙을 요격하여 등료를 사로잡았다. 살아남은 병사는 전차병 80명과 보병 300명뿐이었다.

(등료의 패배를 몰랐던) 자중은 귀국하여 음지를 거행했고 사흘 뒤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여 가(안휘성 무위현無爲縣) 빼앗았다. 가는 초나라의 큰 읍이었고, 등료도 초나라의 훌륭한 신하였다. 군자가 평하였다. “자중은 이 전쟁에서 득보다 실이 컸다.” 초나라는 이 때문에 자중을 탓하였고 자중은 이를 괴로워하다가 곧 마음의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원문

(9.3.1.) 三年春楚子重爲簡之師. 鳩茲至于衡山. 使鄧廖帥組甲三百·被練三千, 以侵. 人要而擊之, 鄧廖. 其能免者組甲八十·被練三百而已.

子重至三日人伐. 良邑也; 鄧廖之良也. 君子謂 子重於是役也所獲不如所亡. 人以是咎子重. 子重病之遂遇心疾[1]而卒.


(1) “질”자가 완각본에는 “병”자로 쓰여 있다. 금택문고본에 근거하여 글자를 정정했다.



주석


三年春: 정월 12일 경진일이 동지였고 건자이다.

楚公子嬰齊帥師伐: 『휘찬』은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강역에 관련된 전쟁은 이때가 최초였다.”고 말한다. 공자영제는 자중이다. 그에 대해선 선공 11년과 성공 2년의 『춘추』와 『좌전』에 자세하다.

 

三年春楚子重爲簡之師: 두예는 “간 훈련된 병사를 선발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대체로 출병하기 전에 먼저 연습하고 군리와 사졸을 선발한다.

鳩茲: 구자는 오나라 읍이다. 현 안휘성 무호시蕪湖市 동남쪽 25리 떨어진 곳.


춘추시대 지도. 구자鳩茲


至于衡山: 형산 역시 오나라 땅이다. 고사기의 『지명고략』에선 당도현當塗縣 동북쪽 60리 떨어진 곳의 횡산橫山이라고 한다.

使鄧廖帥組甲三百·被練三千: 마융은 조갑組甲 꼰실로 갑옷의 안쪽을 댄 것으로 공족이 입는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가규와 복건은 꼰실로 갑옷의 미늘을 꿰맨 것이라고 여겼고 (공족이 아닌) 전차병이 입는다고 말한다. 『초학기』22를 보면 『주서』를 인용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는 꼰실로 갑옷을 꿰매지 않는다(年不登, 甲不纓組), 또 「연책」에는 “자신은 갑옷의 미늘을 깎고, 처는 갑옷을 꿰맨다(身自削甲札, 妻自組甲絣).”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병은 명주로 꼰실인데 그것으로 갑옷의 미늘을 꿰맨다. 이것을 조갑組甲이라고 한다. 한 줄의 끈으로 갑옷의 미늘을 엮은 것에 비해 견고하다. 갑옷을 지을 때 한 줄의 실로 미늘 구멍을 통과시켜 몸에 입히면 힘을 잘 받지 못한다. 그러나 실을 꼬는 작업은 품이 많이 들고 풍년이 들지 않으면 꼰실을 갑옷을 꿰매는데 쓸 수 없다. 이런 내용을 고려하면 가복과 복건의 주장이 마융의 주장보다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 마융은 또 피련이란 생사로 갑옷의 안을 꾸민 것이고 미천한 병사가 입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규는 명주실로 갑옷을 꿴 것이라고 하고 보졸이 입는 옷이라고 주장했다. 『여씨춘추·거우편』에 “주나라의 옛 법은 한 줄의 명주실로 갑옷을 꿰맨 것이다. 공식기가 주나라 군주에게 건의했다. ‘이것은 꼰실로 갑옷을 꿰매는 것만 못합니다. 갑옷이 견고해지는 방법은 구멍이 모두 채워져야 합니다. 지금 실로 미늘의 구멍을 기웠는데도 힘을 다 받지 못하고 절반만 받고 있습니다. 꼰실로 꿰매면 그렇지 않습니다. 꼰실로 구멍을 채우면 힘을 온전히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가규의 주장이 근거가 있다. 생사를 삶은 것으로 부드럽고 백색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갑옷의 미늘을 꿰매어 지으면 명주로 꼰 실로 꿰맨 것보다는 만들기가 용이하지만 견고함은 떨어진다. 組甲三百”과 “被練三千”은 혹 조갑은 전차를 탄 병사이고 피갑은 보졸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모기령의 『경문』에선 “조갑이란 겉에 옻칠을 하여 꿰맨 것이고, 피련이란 솜을 삶아 꼬아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古代甲

以侵. 人要而擊之: 길을 막고 있다가 공격함.

鄧廖. 其能免者: 면은 죽거나 포로로 잡히지 않은 병사.

組甲八十·被練三百而已: 주석 없음.

子重至三日: 다음 글에 따르면, 초나라 군사가 상당한 포로를 잡았기 때문에 음지를 거행했었다. 음지에 대해선 『좌전·은공5년』의 주석 참조.

人伐: 는 현 안휘성 무위현無爲縣 부근이다. 『좌전·성공17년』참조.


良邑也; 鄧廖之良也. 君子謂子重於是役也所獲不如所亡. 人以是咎子重. 子重病之遂遇心疾而卒: “질”자가 완각본에는 “병”자로 쓰여 있다. 금택문고본에 근거하여 글자를 정정했다. 고대에 소위 심질은 현대의 심장병이 아니라 정신병에 해당한다. 고대에서 청대 중엽에 이르기까지 심장의 작용을 뇌의 작용으로 오인했었다. 벨기에 사람인 페르비스트가 저술한 『궁리학』에서 기억은 뇌에 있다고 했는데 그 책 역시 청나라 때 훼손되었다. 동함의 『삼강식략』에 그 일이 기록되어 있다. 『좌전·소공원년』의 “明淫心疾” 역시 생각이 과도하여 뇌에 병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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