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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무자季武子(춘추좌전.9.19.3.)

  계무자 季武子 가 진나라로 가서 출병에 감사를 표했고 , 진 평공은 그에게 향례를 베풀었다 . 범선자가 집정으로서 「서묘 黍苗 」 ( 『시·소아』 ) 를 노래했다 . 계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 “소국이 대국을 우러러봄은 마치 백곡이 단비를 고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 만약 늘 단비가 내린다면 천하가 모두 화목해지니 어찌 폐읍만 그 혜택을 입겠습니까 ? ” 그는 「유월」 ( 『시·소아』 ) 로 화답하였다 . 원문 (9.19.3.) 季武子 如 晉 拜師 , 晉侯 享之 . 范宣子 爲政 , 賦 「 黍苗 」 . 季武子 興 , 再拜稽首 , 曰 : “ 小國之仰大國也 , 如百穀之仰膏雨焉 . 若常膏之 , 其天下輯睦 , 豈唯敝邑 ? ” 賦 「 六月 」 .  주석 ▣ 季武子 如 晉 拜師 : 두예 : “제나라를 토벌한 일에 감사를 표했다 . ” 그리고 “곽수를 경계로 하여 주나라 땅을 떼어준 것”에 대해 사례했다고도 말한다 . ▣ 晉侯 享之 . 范宣子 爲政 : 중군의 보좌였지만 중군의 장수로 승진했다 . ▣ 賦 「 黍苗 」 : 『시·소아』의 편명이다 . 처음에 “무성한 기장의 싹 ( 芃芃 黍苗 ) 장맛비가 적셔 주네 . ”라는 두 구절이 있다 . ▣ 季武子 興 : 자리에서 일어나다 . ▣ 再拜稽首 , 曰 : “ 小國之仰大國也 , 如百穀之仰膏雨焉 . 若常膏之 : 고 膏 는 윤택하게 하다 . 고우 膏雨 의 고는 형용사인데 여기서는 동사로 쓰였다 . ▣ 其天下輯睦 : 기 其 는 將 의 뜻 . ▣ 豈唯敝邑 ? ” : 어찌 우리나라만 이 혜택을 받으리오까 ? ▣ 賦 「 六月 」 : 『시·소아』의 편명 . 윤길보가 주 선왕을 보좌하여 정벌에 나섰을 때의 시 . 진후를 윤길보에 비유했다 .

난방欒魴 (춘추좌전.9.19.2.)

  진의 난방 欒魴 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손문자를 따라 제나라를 정벌했다 . 원문 (9.19.2.) 晉欒魴 帥師從 衛孫文子 伐 齊 . 주석 ▣ 晉欒魴 帥師從 衛孫文子 伐 齊 : 이것은 『춘추』 의 “위나라의 손림보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했다 . ”에 대한 『전』이다 . 경문의 순서에 따르면 마땅히 “계무자가 진나라를 예방했다 . ”의 뒤에 나와야 하지만 『좌전』은 여기에 배열하고 있다 . 어떤 학자는 난영이 “제나라 정벌의 일을 계승하겠다”라고 한 말 때문에 이곳에 배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좌전』에서 “난방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손문자를 따랐다”고 했는데 이것으로써 충분히 위나라의 손림보가 주장임을 입증할 수 있다 . 『춘추』에서 손림보만을 언급한 까닭이다 . 난방은 난씨의 족일인 뿐이다 .

순언荀偃 (춘추좌전.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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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 19 년 봄 , 제후들이 기수 沂水 가에서 돌아와 독양 督揚 ( 산동성 장천현 長淸縣 동북쪽 ) 에서 결맹하고 맹세했다 . “대국은 소국을 침략하지 말라 . ” 진 평공이 주 邾 도공을 잡아들였는데 우리 노나라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 이어 사수 泗水 가에 주둔하고 우리 노나라의 영역을 확정했다 . 주나라의 땅 일부 , 곽수 漷 水 의 ( 서쪽 땅을 ) 우리에게 귀속시켰다 . 진 평공이 먼저 귀국했다 . 양공은 포포 蒲圃 에서 진나라의 육경에게 향례를 베풀고 , 그들에게 삼명의 예복과 수레를 하사했고 ; 군위 軍尉 · 사마 司馬 · 사공 司空 · 여위 輿尉 · 후엄 候奄  등에게는 일명의 예복과 수레를 하사했다 . 별도로 순언에게는 5 필의 비단과 벽옥 그리고 네 필의 말을 하사하고 이어 오나라의 수몽이 바쳤던 청동예기를 하사했다 . 순언은 후두부에 종기가 있었는데 머리에도 종기가 생겼다 . 황하를 건너 저옹 著雍 ( 진나라 ) 에 이르렀을 때 병세가 심해져 눈이 튀어나왔다 . 앞서 갔던 대부들이 모두 되돌아왔다 . 사개가 접견을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 그의 후계를 묻자 말했다 . “정생 鄭甥 ( 순오 ) 이 좋다 . ”   2 월 갑인일 (19 일 ), 순언이 타계했는데도 눈을 감지 않고 입도 열려 함을 물릴 수 없었다 . 선자가 손을 씻고 어루만지며 말했다 . “감히 ( 순 ) 오를 당신을 섬기듯 하지 않겠습니까 ! ” 여전히 눈을 감지 않았다 . 난회자 欒懷子 ( 난영 ) 가 “아직 제나라 문제를 마무리짓지 못해 그러십니까 ? ”라고 말하고 , 다시 얼굴을 어루만지며 “당신 ( 主 ) 이 임종하신 후 만약 제나라 정벌의 일을 잇지 않는다면 황하의 신이 벌을 내릴 것입니다 ! ”라고 말했다 . 그러자 순언이 비로소 눈을 감았고 입에 함도 물릴 수 있었다 . 선자가 나오며 탄식했다 . “참으로 장부를 천박하게 생각하였구나 ! ” 원문 (9.19.1.) 十九年春 , 諸侯還自 沂 上 , 盟于 督揚 , 曰 : “ 大毋侵小 . ” 執 邾 悼公 ,

불곡不穀 (춘추좌전.9.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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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의 음악( 南風) 정나라의 자공 子孔 이 진나라를 따르는 대부들을 제거하려 했는데 진을 배신하고 초군을 동원해 그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 초 영윤 자경 子庚 ( 공자오 ) 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생각을 알렸지만 그는 수락하지 않았다 . 초 강왕이 이 소식을 듣고 돈윤 豚尹 양의 楊宜 를 보내 자경에게 말했다 . “국인들이 과인(불곡 不穀) 에 대해 , 사직을 주관하면서 군사를 내지 않으니 죽어서 선군처럼 예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 과인이 즉위하고 이제 5 년이 흘렀는데 군사를 한 번도 내지 않으니 사람들은 과인이 안일함에 빠져 선군의 위업을 잊었다고 생각한다 . 대부는 이를 어찌해야 할 지 생각해 보라 . ” 자경이 탄식하였다 . “군왕께선 아마도 나 오 午 가 편히 지낼 궁리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나는 사직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 ” 자경이 왕의 사자를 접견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대답했다 . “제후들이 바야흐로 진과 화목하니 청컨대 신이 시험해 보겠습니다 . 만약 일이 가능해 보이면 군주께서 이에 호응하시고 , 어렵다 싶으면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십시오 . 그러면 아무 해가 없을 터이고 군주 역시 치욕이 없을 것입니다 . ” 자경이 군사를 이끌고 분 汾 ( 허창시 서남쪽 ) 에서 검열했다 . 이때 정나라의 자교 子 蟜 , 백유 伯有 , 자장 子張 은 정 간공을 모시고 제나라 정벌에 나가 있었고 , 자공 子孔 , 자전 子展 , 자서 子西 가 도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 자전과 자서는 자공의 음모를 눈치채고 더욱 수비를 강화하고 보루에 들어가 지켰다 . 자공은 섣불리 초군과 합류할 수 없었다 . 초군이 정나라를 정벌하여 어릉 魚陵 에 군을 주둔했다 . 우군은 상극 上棘 ( 우현 禹縣 의 남쪽 ) 에 성을 쌓고 이어 영수 潁水 를 건너 전연수 旃然水 ( 형양현 滎陽縣 남쪽 35 리 ) 가에 주둔했다 . 위자풍 蒍 子馮 과 공자격 公子格 이 정예를 이끌고 비활 費滑 ( 언사현 偃師縣 의 남쪽 ), 서미 胥靡 ( 언사현의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