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견臧堅 (춘추좌전.9.17.3.)



제나라는 우리 노나라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다. 가을, 제 영공이 우리 북쪽 변방을 공격하여 도(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북동쪽) 포위했다. 고후高厚는 방(산동성 사수현泗水縣 서남쪽)에서 장흘臧紇을 포위했다. 우리 군이 양관陽關(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동남쪽)에서 출병하여 포위된 장흘과 합류하기 위해 여송旅松(방의 근처)에 도착했다. 추숙흘叔紇과 장주臧疇 그리고 장가臧賈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야밤에 제나라 진영을 공격해 장흘을 여송에 있는 아군으로 보낸 후 되돌아갔다. 제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떠났다


제나라가 장견臧堅을 사로잡았는데 영공은 숙사위夙沙衛를 보내 그를 위문하고, 또 말하였다. “죽지 말라.” 장견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했다. “군주의 명에 감사드립니다. 허나 죽지 말라고 은혜를 내리시며 일부러 환관刑臣을 시켜 사에게 예를 베푸셨습니다.” 장견은 날카로운 말뚝으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원문 (9.17.3.)

人以其未得志于我故齊侯伐我北鄙. 高厚臧紇. 師自陽關臧孫至于旅松. 叔紇·臧疇·臧賈帥甲三百宵犯送之而復. 師去之.

人獲臧堅齊侯使夙沙衛且曰無死稽首曰: 拜命之辱. 抑君賜不終姑又使其刑臣禮於士.抉其傷而死.


주석

齊侯伐我北鄙: “도”를 『공양』은 “도”로 쓴다. 두 글자는 모두 조 소리를 따른다. 현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북동쪽으로 약 35리 떨어진 곳이다.

高厚帥師伐我北鄙: “고후”의 앞에 『공양』과 『곡량』은 모두 “제”자가 있다. 장수공: “『춘추』에서 “위도”의 뒷글은 앞글을 잇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가 필요하지 않다. 『공양』과 『곡량』의 ‘제’자는 연문으로 생각된다.

 

人以其未得志于我故: 두예는 작년에 성읍을 포위했을 때 맹유자를 피해 도망친 일이라고 설명한다.

齊侯伐我北鄙. 高厚臧紇: 제나라는 두 개의 군대로 나눠 하나는 제 영공이 몸소 지휘하고, 다른 하나는 고후가 지휘하여 방을 포위했다. 장씨 채읍이다.


춘추시대_도桃


師自陽關臧孫至于旅松: 노나라 군사는 양관陽關에서 출동하여 장흘을 맞이했고 여송旅松 도착해서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양관은 현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동남쪽 약 60리 떨어진 곳. 여송은 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방은 현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서남쪽 28리 떨어진 곳이다. 즉 양관과 60여 리 떨어진 곳.

叔紇·臧疇·臧賈帥甲三百宵犯送之而復: 추숙흘叔紇 곧 공구(공자)의 부친. 나머지 두 사람은 장흘의 형제이다. 『좌전·양공23년』의 주석에 나머지 설명이 자세하다.

師去之: 주석 없음.

人獲臧堅: 두예: “견 장흘의 일족이다.

齊侯使夙沙衛: 살아있는 사람을 위문함.

且曰無死 稽首曰: 拜命之辱. 抑君賜不終姑又使其刑臣禮於士.: 은 역접(전절연사)이고, ‘그러나의 뜻. 사부종은 “曰無死”의 변형. 과거 학자들의 많은 설은 명료하지 않다. 가차이고 ‘고의로’의 뜻. 형신은 숙사위를 말하는데 그가 환관이기 때문이다. 는 장견 스스로를 말함. 환관을 보내 사에게 명을 내리는 일은 당시로서는 예에 맞지 않기 때문에 치욕을 느꼈다.

抉其傷而死: 음은 익이고 작은 말뚝이다. 한쪽 끝이 날카롭게 비스듬히 깍여 있다. 의 음은 결이고 후벼 파다의 뜻. 상은 입을 상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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