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곡不穀 (춘추좌전.9.18.4.)


남방의 음악(南風)


정나라의 자공子孔이 진나라를 따르는 대부들을 제거하려 했는데 진을 배신하고 초군을 동원해 그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초 영윤 자경子庚(공자오)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생각을 알렸지만 그는 수락하지 않았다. 초 강왕이 이 소식을 듣고 돈윤豚尹 양의楊宜를 보내 자경에게 말했다. “국인들이 과인(불곡不穀)에 대해, 사직을 주관하면서 군사를 내지 않으니 죽어서 선군처럼 예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인이 즉위하고 이제 5년이 흘렀는데 군사를 한 번도 내지 않으니 사람들은 과인이 안일함에 빠져 선군의 위업을 잊었다고 생각한다. 대부는 이를 어찌해야 할 지 생각해 보라.” 자경이 탄식하였다. “군왕께선 아마도 나 오가 편히 지낼 궁리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사직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자경이 왕의 사자를 접견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대답했다. “제후들이 바야흐로 진과 화목하니 청컨대 신이 시험해 보겠습니다. 만약 일이 가능해 보이면 군주께서 이에 호응하시고, 어렵다 싶으면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십시오. 그러면 아무 해가 없을 터이고 군주 역시 치욕이 없을 것입니다.

자경이 군사를 이끌고 분(허창시 서남쪽)에서 검열했다. 이때 정나라의 자교, 백유伯有, 자장子張은 정 간공을 모시고 제나라 정벌에 나가 있었고, 자공子孔, 자전子展, 자서子西가 도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자전과 자서는 자공의 음모를 눈치채고 더욱 수비를 강화하고 보루에 들어가 지켰다. 자공은 섣불리 초군과 합류할 수 없었다.

초군이 정나라를 정벌하여 어릉魚陵에 군을 주둔했다. 우군은 상극上棘(우현禹縣 남쪽)에 성을 쌓고 이어 영수潁水를 건너 전연수旃然水(형양현滎陽縣 남쪽 35) 가에 주둔했다. 위자풍子馮과 공자격公子格이 정예를 이끌고 비활費滑(언사현偃師縣 남쪽), 서미胥靡(언사현의 동쪽), 헌우獻于, 옹량雍梁(우현의 동북쪽) 등을 침략하고, 매산梅山(신정현新鄭縣 부근)을 우회하여 정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했고 충뢰蟲牢(봉구현封丘縣 북쪽)까지 진격한 후 되돌아갔다. 자경은 국도의 순문純門을 공격하고 성 아래에서 이틀간 농성하다가 돌아가 어치산魚齒 아래에서 치수를 건넜다. 큰 비가 내려 초군의 상당수가 동상에 걸리고 잡일을 맡은 병사들은 거의 모두 죽었다.

진나라가 초군의 출병 소식을 들었다. 사광師曠이 말했다. “피해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북방의 노래를 자주 부르나 또 남방의 노래도 불러 보았는데 남쪽 노래에는 강인함이 없고 죽는 소리가 많습니다. 초나라는 필시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동숙董叔이 말했다. “올해는 세성이 서북에 자주 자리잡고 있어 남쪽의 군사는 천시에 맞지 않습니다. 필경 공적이 없을 것입니다.(천도天道란 목성의 궤도이다. 이해 목성은 황도대에서 취자를 지나고 있었고, 12지 중에서는 해 해당한다. 그래서 천도가 서북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숙향이 말했다. “일의 성패는 군주의 덕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원문 (9.18.4.)

鄭子孔欲去諸大夫將叛而起師以去之. 使告子庚子庚弗許. 楚子聞之使豚尹子庚: 國人謂不穀主社稷而不出師死不從禮. 不穀卽位於今五年師徒不出人其以不穀爲自逸而忘先君之業矣. 大夫圖之其若之何?子庚歎曰: 君王其謂懷安乎! 吾以利社稷也.見使者稽首而對曰: 諸侯方睦於臣請嘗之. 若可君而繼之. 不可收師而退可以無害君亦無辱.

子庚帥師治兵於. 於是·伯有·子張鄭伯子孔·子展·子西. 二子知子孔之謀完守入保. 子孔不敢會.

師伐次於魚陵. 右師城上棘遂涉. 次于旃然. 子馮·公子格率銳師侵費滑·胥靡·獻于·雍梁右回梅山東北至于蟲牢而反. 子庚門于純門信于城下而還, 涉於魚齒之下. 甚雨及之. 師多凍役徒幾盡.

人聞有師曠: 不害. 吾驟歌北風又歌南風南風不競多死聲. 必無功.董叔: 天道多在西北. 南師不時必無功.叔向: 在其君之德也.


주석

鄭子孔欲去諸大夫將叛而起師以去之: 정나라는 양공 11년 소어의 회맹 이래 진나라에 복종해왔다. 8년 동안 참석하지 않은 회합이 없었고 따라나서지 않은 전쟁이 없었다.

使告子庚: 자경은 초 영윤 공자오公子午이다.

子庚弗許. 楚子聞之使豚尹子庚: “양”은 “양”으로 쓰기도 한다. 두 글자는 고대에 통용되었다. ‘양돈윤의는 어떤 사람의 성명인데 여기에 여러 주장이 있다. 송대 임요수의 『춘추좌전보조』에선 양돈을 읍의 이름이라 설명했다. 고염무의 『일지록』4는 양돈윤을 관직의 이름으로 봤다. 모두 신뢰할 수 없다. 양리승의 『보석』은 『설원·봉사편』의 “초 장왕이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돈윤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라는 문구를 근거로 돈윤이 『주관』의 시인豕人이나 양인羊人 속하는 사람으로 보고 양은 그의 씨이고 의는 그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소공 17년의 『정의』에서 『세본』을 인용하여 “목왕이 왕자양王子揚 낳고, 양이 윤 낳고, 윤이 개(영윤 개로 써야 옳다)를 낳았다.”는 설명을 근거로, 윤자 다음에는 “의”자가 있어야 되며, 『세본』에는 탈자가 많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장병린의 『좌전독』은 『좌전·정공6년』의 “버드나무로 만든 방패(楊楯) 60개를 간자에게 바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양돈윤은 곧 양순윤이고 (버드나무) 방패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견강부회한 설명이다. 오직 『설원·봉사』의 초나라에는 돈윤의 관직이 있다는 말은 근거가 있어 보인다. 돈윤을 사자로 보낸 것은 그 사람이 시인이나 양인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양은 씨이고 의가 이름이라는 주장 역시 신뢰할 만하다. 『세본』에서 말한 것은 별도의 다른 것이다. 윤은 목왕의 손자이고 이 당시 초 강왕은 목왕의 증손으로서 연대 역시 차이가 있다.

國人謂不穀主社稷而不出師死不從禮: 두예: “선군의 업적을 따를 수 없어 장차 죽어서 선군이 받았던 예우를 받을 수 없다.

不穀卽位於今五年師徒不出人其以不穀爲自逸而忘先君之業矣: 두예: “자신이 아직 군사를 통솔하여 출정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업은 패업이다.

大夫圖之其若之何?子庚歎曰: 君王其謂懷安乎!: 회안이란 초왕이 자신(자경)을 안일하다고 말한 것을 말함. 안일함을 탐하다.

吾以利社稷也.見使者稽首而對曰: 諸侯方睦於臣請嘗之: 은 시험해 보다.

若何君而繼之: . 『사전』에 용례가 있다.

不可收師而退可以無害君亦無辱.: 군주가 몸소 출정하지 않으므로 욕보지는 않는다.

子庚帥師治兵於: 『전국책·초책1: “초나라 북쪽에 분형汾陘이란 요새가 있다.” 본문의 분이다. 두예는 서진西晉 양성현襄城縣 동북쪽에 분구성汾丘城 있다고 하는데 현 허창시 서남쪽, 영수의 남쪽 가에 해당한다.

於是·伯有·子張鄭伯: 두예: “자장은 공손흑굉公孫黑肱이다.

子孔·子展·子西守. 二子知子孔之謀: 두예: “이자란 자전과 자서이다.

完守入保: 자에는 견고함의 뜻이 있다. 『맹자·이루상』의 “성곽이 견고하지 않다(城郭不完)”으로 입증할 수 있다. 『맹자역주』에 자세하다. 완수란 수비를 더욱 강화함.

子孔不敢會: 나라 안의 강화된 수비 때문이다.

師伐次於魚陵: 과거엔 어릉魚陵을 어치산魚齒山으로 여겼다. 어치산은 현 평정산시 서북쪽인데, 초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할 때 허창시 서남쪽에서 치병하여 군대가 거꾸로 노산현 일대로 후퇴한 셈이다. 고염무의 『보정』은 원수기의 설을 인용하여 이 주장을 의심했는데 옳다. 어릉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춘추시대_상극上棘
춘추시대 지도. 상극上棘


右師城上棘遂涉: 상극上棘 현 우현禹縣 남쪽이다. 두예: “영수를 건너려 했기 때문에 물가에 작은 성을 쌓아 진퇴 시의 대비책으로 삼았다.『수경·영수주』: “영수는 상극성의 서쪽을 경유하여 다시 물길이 구부러져 성의 남쪽을 지난다.” 옳은 설명이다.

次于旃然: 전연수旃然水 형양현滎陽縣 남쪽 35리에서 발원한다. 즉 색수索水이다.

子馮·公子格率銳師侵費滑·胥靡·獻于·雍梁: 위자풍子馮 『좌전·양공25년』의 원자풍薳子馮 같다. 두 글자는 통용된다.

비활費滑은 현 언사현偃師縣 남쪽의 구씨진緱氏鎭인데 『춘추·장공16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서미胥靡는 현 언사현의 동쪽이다.

헌우獻于는 두예의 주석에서 정나라 읍이며 그 위치가 미상이라고 전한다. 우창의 『교서』는 『좌전·성공17년』에 언급된 허이고 진나라의 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언사현의 경계를 기준으로 보면 이 당시에는 그곳이 정나라에 속했는지 역시 잘 알 수 없다. 그저 하나의 주장을 채록하여 보존할 뿐이다.

은 강영의 『고실』에서 옹씨雍氏이며 현 우현의 동북쪽이라고 말한다.

은 한나라 때의 양현梁縣이다. 본래 주나라의 작은 읍이고 현 임여현臨汝縣 동쪽에 있다. 고동고의 『대사표』는 옹량을 하나의 지명으로 봤는데 즉 『좌전·양공23년』의 옹량과 같은 곳으로 봤다. 현 우현의 동북쪽이다. 고동고의 주장이 비교적 믿을 만하다.

右回梅山: 매산은 현 정주시의 서남쪽이고 신정현新鄭縣 접경이다.

東北至于蟲牢而反: 충뢰蟲牢는 현 봉구현封丘縣 북쪽이다. 초군은 세 갈래 길로 좌사는 어릉에 주둔하며 영윤 자경이 지휘했다. 우사는 전연에 주둔했으며, 『좌전·양공15년』의 “초 공자오가 영윤이 되고, 공자파융이 우윤, 위자풍이 대사마가 되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보면 공자파융이 우사를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위자풍은 대사마로서 선봉대(銳師)를 지휘했다. 충뢰까지 진격한 후 돌아갔다.

子庚門于純門: 순문純門은 정나라 도읍 외곽의 성문이다. 『좌전·장공28년』의 주석 참조.

信于城下而還: 은 이틀밤을 주둔한 것. 정나라가 견고하게 지키기만 하고 출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涉於魚齒之下: 두예: “어치산의 아래에 치수滍水 있기 때문에 ‘건너다’라고 썼다.” 어치산은 현 평정산시의 서북쪽에 있다. 치수는 현재 사하沙河라고 부른다.

甚雨及之: 『회남자·설림훈』: “안개가 짙게 낀 아침에도 세밀하게 쓸 수 있다.” 『장자·천하편』: “머리를 감는데 비가 심하게 내리고, 머리를 빗는데 바람이 매우 심하다.” 심무甚霧 심우甚雨 모두 짙은 안개와 큰 비의 뜻이다.

師多凍役徒幾盡: 역도役徒 군중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人聞有師曠: 不害. 吾驟歌北風又歌南風: 자주의 뜻. 풍은 곡조이다. 『시』에 국풍이 있는데 각 나라의 악곡이다. 북풍과 남풍은 요즘말로 북곡, 남곡과 같다. 『좌전·성공9년』 종의가 북과 거문고로 남음南音 연주했을 때 범문자가 그것을 “樂操土風”이라고 말했다. 즉 초나라 곡조를 연주한 것.

南風不競: .

多死聲. 必無功.: 옛 사람들의 미신 중에 음악으로 출병의 길흉을 점친 경우가 여럿 있다. 『주례·대사』의 “대사가 동율을 집어 군의 함성소리를 듣고서 길흉을 알아냈다.”가 이런 예이다. 본문의 사광의 예 역시 이런 부류이다.

董叔: 天道多在西北. 南師不時必無功.: 천도란 목성의 궤도이다. 이해 목성은 황도대에서 취자를 지나고 있었고, 12지 중에서는 해 해당한다. 그래서 천도가 서북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남사(즉 초나라 군사)는 천시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적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叔向: 在其君之德也.: 두예: “천시와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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