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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의 위급을 전하는 숙손표 (춘추좌전.9.16.5.)

노나라의 위급을 전하는 숙손표 겨울 , 목숙 ( 숙손표 ) 이 진나라로 가서 빙문하고 , 또 제나라 문제를 언급했다 . 진나라 측에서 말했다 . “과군께서 아직 부친의 체제사를 거행하지 못했고 백성이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 그렇지 않다면 어찌 노나라의 상황을 잊고 있겠습니까 ? ”  목숙이 말했다 . “제나라가 조석으로 폐읍의 땅에 분풀이하므로 이처럼 간청드립니다 . 폐읍이 위급하여 아침에 저녁을 기약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 목을 길게 빼고 서쪽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 ‘진나라가 올 것이다 ! ’ 집사께서 한가해질 때를 기다리다 시기를 놓칠까 두렵습니다 . ”  목숙은 중항헌자 中行獻子 를 접견하고 「기보 」 ( 『시·소아』 ) 를 읊었다 . 헌자가 말했다 . “저 , 언 偃 도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 감히 집사와 함께 노나라의 사직을 걱정하지 않고 노나라로 하여금 그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 ”  목숙은 범선자 ( 사개 ) 를 접견하고 「홍안 」 ( 『시·소아』 ) 의 마지막 장을 읊었다 . 선자가 대답했다 . “개 丐 가 건재한 데 어찌 노나라를 평안케 하지 않겠습니까 ? ” 원문 (9.16.5.)  冬 , 穆叔 如 晉 聘 , 且言 齊 故 . 晉 人曰 : “ 以寡君之未 禘 祀 , 與民之未息 , 不然 , 不敢忘 . ” 穆叔 曰 : “ 以 齊 人之朝夕釋憾於敝邑之地 , 是以大請 . 敝邑之急 , 朝不及夕 , 引領西望曰 : ‘ 庶幾乎 ! ’ 比執事之間 , 恐無及也 . ” 見 中行獻子 , 賦 「 圻父 」 . 獻子 曰 : “ 偃 知罪矣 , 敢不從執事以同恤社稷 , 而使 魯 及此 ! ” 見 范宣子 , 賦 「 鴻鴈 」 之卒章 . 宣子 曰 : “ 丐 在此 , 敢使 魯 無鳩乎 ! ” 주석 ▣ 冬 , 穆叔 如 晉 聘 , 且言 齊 故 : 제나라가 다시 노나라를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 ▣ 晉 人曰 : “ 以寡君之未 禘 祀 : 체 제사는 진 도공의 신주를 대묘에 들이는 길제이다 . 상세한 내용은 『좌전·민공 2 년』과 『좌전·희공 23 년』의 주석 참조 . ▣ 與民之未

맹유자속孟孺子速 (춘추좌전.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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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유자속 孟孺子速 가을 , 제 영공이 노나라의 성 成 ( 산동성 영양현 寧陽縣 의 북쪽 ) 을 포위할 때 맹유자속 孟孺子速 은 제나라 군을 요격했다 . 영공이 말했다 . “저 자는 용맹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 군을 물려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해주자 . ” 맹유자속은 이어 해형 海陘 ( 대문하 大汶河 와 사수 泗水 의 사이에 있는 험로 ) 을 막고 돌아왔다 . 원문 (9.16.4.)  秋 , 齊侯 圍 成 , 孟孺子速 徼之 . 齊侯 曰 : “ 是好勇 , 去之以爲之名 . ” 速 遂塞 海陘 而還 . 주석 ⊙ 秋 , 齊侯 伐我北鄙 , 圍 成 : “성 成 ”은 “성 郕 ”으로도 쓴다 . 『석문』역시 그러하다 . 여기서는 『석경』과 송본 그리고 악본에서 “성 成 ”으로 쓴 것을 따랐다 .   ▣ 秋 , 齊侯 圍 成 : “성 成 ”자가 각본에는 모두 “성 郕 ”으로 쓰여 있다 . 사실 두 곳은 같은 지역이다 . 여기서는 감본을 따라 일관성을 택했다 . ▣ 孟孺子速 徼之 : 맹유자 孟孺子 는 맹헌자 孟獻子 의 아들이다 . 이름은 속 速 이고 시호는 장자 莊子 이다 . 요 徼 의 음은 효 驍 이다 . 숨어 있다가 중간을 끊고 공격함이다 . ▣ 齊侯 曰 : “ 是好勇 : 시는 맹유자를 가리킨다 . 『논어·헌문』의 “변장자 卞莊子 의 용맹함” , 조탄의 『보폐재찰기』등에서 “변장자는 맹유자를 말한다 . ”라고 하지만 신뢰할 수 없다 . ▣ 去之以爲之名 . ” : 포위를 풀어 맹속의 용맹한 이름을 이루게 하다 . 『좌전·양공 18 년』 , 제나라의 안영이 제 영공을 가리켜 “참으로 용맹이 없다”는 말은 사실은 겁먹고 도망친 사실을 말한 것이다 . ▣ 速 遂塞 海陘 而還 : 두예는 단지 “해형 海陘 은 노나라에 있는 험난한 길이다 . ”라고 해석했다 . 성 成 은 현 산동성 영양현 寧陽縣 의 북쪽에 있다 . 이미 『춘추·환공 6 년』의 주석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 성읍의 북쪽은 제나라의 경계와 가깝다 . 해형은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의 험난한 길이다

초나라에 복수하는 진나라 (춘추좌전.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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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순언 荀偃 과 난염 欒黶 이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송나라 양량 揚梁 에서의 싸움 ( ☞ 9.12.4.) 에 보복했다 . 초나라의 공자격 公子格 이 군을 이끌고 잠판 湛阪 ( 평정산시 平頂山市 북쪽 ) 에서 진군과 맞붙었지만 초군이 대패했다 . 진군은 이어 방성 方城 의 바깥 지역까지 침략하고 , 다시 허나라를 정벌한 후 회군했다 . 원문 (9.16.3.)  晉荀偃 · 欒黶 帥師伐 楚 , 以報 宋揚梁 之役 . 楚公子格 帥師 , 及 晉 師戰于 湛阪 . 楚 師敗績 . 晉 師遂侵 方城 之外 , 復伐 許 而還 . 주석 ▣ 晉荀偃 · 欒黶 帥師伐 楚 , 以報 宋楊梁 之役 : 제후들의 군은 이미 귀국했고 진나라 홀로 진군했다 . 양량의 전투는 『좌전·양공 12 년』참조 . ▣ 楚公子格 帥師 , 及 晉 師戰于 湛阪 : 담 湛 의 음은 심 諶 혹은 잠 暫 이다 . 잠수는 하남성 보풍현 寶豊縣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섭현을 통과하고 양성현 襄城縣 의 경계에서 북여하 北汝河 에 합류된다 . 잠수의 북쪽 산에 기다란 비탈이 있는데 바로 본문의 잠판이다 . 현 평정산시 平頂山市 북쪽이다 . ▣ 楚 師敗績 . 晉 師遂侵 方城 之外 : 방성은 『좌전·희공 4 년』의 주석을 참조 . 본래 초나라의 북쪽 경계이다 . 그후 초나라는 더욱 확장해서 방성의 바깥에도 초나라를 따르는 속국들을 만들었다 . 진나라 군사는 아직 방성에 진입했던 적이 없다 . ▣ 復伐 許 而還 : 허나라가 천도를 하지 않았기 까닭이다 .  

천도로 국론이 분열된 허나라 (춘추좌전.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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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에 국론이 분열된 허나라 허 영공이 진 晉 의 영토 안으로 천도할 수 있기를 요청했다 . 제후들은 바로 허나라의 천도를 준비했지만 허나라의 대부들이 반대했고 진나라는 제후들을 돌려보냈다 . 정나라의 자교 子 蟜 는 허나라 정벌 소식을 듣고 바로 간공을 보필하여 제후군을 뒤따랐다 . 목숙 穆叔 은 양공을 시종하여 귀국했다 . 노의 제자 齊子 ( 숙노 ) 가 군사를 이끌고 진의 순언과 회합했다 . 『춘추』에 “ ( 숙노가 ) 정백과 회합했다 ( 叔老 會 鄭伯 · 晉荀偃 · 衛 甯 殖 · 宋 人伐 許 . ). ”고 썼는데 서술의 공평함 때문이다 . 여름 6 월 , 진나라가 역림 棫 林 ( 하남성 섭현 葉縣 의 동북쪽 ) 에 군을 주둔하고 , 경인일 (9 일 ), 허나라를 정벌하여 함씨 函氏 에 군을 주둔했다 . 원문 (9.16.2.)  許男 請遷于 晉 . 諸侯遂遷 許 , 許 大夫不可 , 晉 人歸諸侯 . 鄭子 蟜 聞將伐 許 , 遂相 鄭伯 以從諸侯之師 . 穆叔 從公 . 齊子 帥師會 晉荀偃 . 書曰 “ 會 鄭伯 ”, 爲夷故也 . 夏六月 , 次于 棫 林 . 庚寅 , 伐 許 , 次于 函氏 . 주석 ▣ 許男 請遷于 晉 : 허나라 본래의 도읍은 현 하남성 허창시 동쪽 36 리 떨어진 곳이다 . 노 성공 15 년 , 허 영공 때 초나라는 정나라의 위협을 피해 허나라를 섭 葉 으로 천도하게 했다 . 현 섭현 葉縣 의 서남쪽으로 30 리 떨어진 섭현의 옛성이다 . 이때부터 허나라는 초나라의 부용국이 되었다 . 지금 허나라가 진나라에 천도를 요청했는데 초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에 복종하려는 생각이었다 . ▣ 諸侯遂遷 許 : 준비만 하고 실제로는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천도한 땅을 적지 않았다 . ▣ 許 大夫不可 , 晉 人歸諸侯 : 제후들을 모두 귀국시키고 진군만 허나라 대부들을 토벌했다 . ▣ 鄭子 蟜 聞將伐 許 , 遂相 鄭伯 以從諸侯之師 : 이 이하는 초기에 제후의 군사를 동원했던 일을 보충 서술하고 있다 . ▣ 穆叔 從公 . 齊子 帥師會 晉荀偃 . 書曰 “ 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