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리鍾離의 회합, 오나라와의 첫 통교 (춘추좌전.8.15.6.)


11, (숙손교여 진나라의 사섭, 제나라의 고무구, 송나라의 화원, 위나라의 손림보, 정나라의 공자추, 나라 군주와) 종리鍾離(안휘성 봉양현鳳陽縣 동북쪽)에서 오나라와 회합을 가졌는데 중원의 나라들이 처음으로 오나라와 통교한 것이다.


원문


(8.15.6.) 十一月鍾離始通.


주석


참고 『춘추』원문. 

冬十有一月叔孫僑如晉士燮·齊高無咎·宋華元·衛孫林父·鄭公子鰌·人會鍾離.


『춘추』에서 두 개의 “회”자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두예는 오나라가 이의 나라이고 그 이전에 중원의 나라들과 왕래한 적이 없었으며 이때가 처음이다. 그래서 진나라가 제후의 여러 대부를 이끌고 그들과 회합했기 때문에 두 개의 “회”자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명대 왕초의 『춘추집전』에선 제후들의 대부들끼리 먼저 회합한 후 오나라와 회합을 가졌기 때문이며, 『춘추』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고 주장했다. 음은 추이다. 종리鍾離『노사』에선 국명이라 한다. 상세한 내용은 『좌전』의 주석을 참조.


춘추시대 지도. 종리鍾離


十一月鍾離: 두예: “종리鍾離는 초나라 읍이다.” 그러나 제후들과 오나라가 서로 초나라 경내에서 만난다는 것은 자못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두예의 그런 주석은 『좌전·소공4년』의 “초 함윤 의구가 종리에 성을 쌓았다”는 말에 근거한 것인데 이 성은 오나라를 대비했던 일이다. 종리는 본래 소국으로서 『수경·회수주』와 『사기·오자서열전』의 『색은』에서 『세본』을 인용하여 종리는 영성의 나라로(『통지·씨족략3』에선 희성이라 말하는데 믿기 어렵다)서 이 당시 존속했는지 멸망당했는지는 상세하지 않다. 또 종리는 오나라와 초나라의 경계에 위치한 적도 있는데, 『곡량전·소공4년』의 “경봉을 오나라 종리에 봉했다”는 기사를 보면 종리는 이미 멸망하여 오와 초 두 나라가 서로 분할했었을 수도 있다. 즉 인용문 당시는 종리가 오나라의 읍이었다. 종리는 현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동북쪽이다.

始通: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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