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릉전쟁鄢陵 (춘추좌전.8.16.5.)



진 여공이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범문자范文子가 말했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바를 만족시키려면 모든 제후들이 우리를 배반해야 진은 우환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정나라만 배신한다면 진의 우환은 즉시 찾아올 것이다.” 난무자가 말했다. “우리 당대에 제후들을 잃을 순 없으니 반드시 정나라를 정벌해야 한다.” 이에 진은 군을 동원했다. 난서欒書(난무자)가 중군을 지휘하고 사섭士燮(범문자)이 그를 보좌했다. 극기가 상군을 지휘하고 순언荀偃이 그를 보좌했다. 한궐韓厥이 하군을 지휘하고, 극지가 신군을 보좌했다. 순앵荀罃은 국도를 수비했다. 극주郤犨는 위나라로 갔다가 이어 제나라로 갔으니 모두 출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난염欒黶은 우리 노나라로 와서 군사를 요청했다. 맹헌자가 말했다. “진나라가 승리할 것이다.” 무인일(12), 진나라는 군사를 일으켰다.


정나라가 진나라의 출병 소식을 듣고, 초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보고했고, 요구이姚句耳가 사자와 함께 갔다. 초 공왕은 정나라를 구원했다. 사마 자반이 중군을 지휘하고 영윤 자중이 좌군을 지휘했으며 우윤右尹 자신子辛이 우군을 지휘했다. 땅을 지날 때, 자반이 신숙시를 접견하고 물었다. “이번 출정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신숙시가 대답했다. “덕·형·상·의·예·신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이다. 덕으로 은혜를 베풀고, 형으로 잘못을 바로잡고, 순종으로 귀신을 섬기고, 의로움으로 이익을 세우고, 예로써 때를 따르고, 신뢰로 만물을 지킨다. 민생이 넉넉하면 덕이 바르게 되고, 유리한 시기를 활용하면 일이 절도에 맞고, 계절을 어기지 않으면 생산이 성취를 이루어 상하가 화목하고 행동에 어김이 없게 되어 구하여 갖추지 못하는 것이 없고 각자 지켜야 할 준칙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주송·사문』)에 ‘우리 백성을 일으켜 세운 것이 선왕의 준칙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신령은 복을 내리고, 때에 맞춰 행동하니 재해가 없으며, 백성들의 삶이 넉넉하여 한 마음으로 명을 따르고 힘을 다해 윗사람의 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고, 목숨을 바쳐 빈 곳을 채우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초나라는 안으로 민의 삶을 내버리고 밖으로 우호를 끊고 신령을 두고 한 맹세를 모독하고 약속을 어겼다. 때를 어겨 백성을 동원하여 백성을 피폐하게 하여 군주의 뜻을 만족시키려 한다. 백성들은 신의를 알 수 없어 나아가도 물러나도 모두 죄가 된다. 사람마다 닥칠 일을 근심하니 누가 목숨을 바치겠는가? 그대는 노력하라! 내 그대를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요구이는 먼저 귀국했고 자사가 그에게 상황을 묻자 대답했다. “행군을 서두르고 험지를 지날 때도 대열을 정비하지 않습니다. 서두르면 계획을 놓치고, 대열을 정비하지 않으면 질서를 잃습니다. 계획도 잃고 질서도 잃고서 장차 무엇을 가지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초나라 군사가 쓸모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5, 진군이 황하를 건넜다. 초군이 곧 당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범문자는 회군하려고 마음먹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초나라를 피해 도망가는척 한다면 나라의 우환을 늦출 수 있습니다. 무릇 제후를 규합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이니 후대의 유능한 이에게 남겨야 합니다. 우리는 신하들이 화목하게 군주를 섬길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무자가 말했다. “그럴 수 없다.


춘추시대 지도. 언릉鄢陵



6, 진과 초가 언릉鄢陵(하남성 언릉현鄢陵縣 북쪽)에서 만났다. 범문자는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극지가 말했다. “한의 전쟁에서 혜공께서 무위를 떨치지 못했고, 의 전쟁에서 선진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의 전쟁에서 순백(순림보)이 다시 초나라에 싸움을 걸지 못했던 일들은 모두 진의 치욕입니다. 귀하 역시 선대의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초나라를 피한다면 또다시 치욕을 더하는 일입니다.” 문자가 말했다. “우리 선군들이 자주 싸웠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라, , 제나라, 초나라는 모두 강국으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약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강력한 세 적이 복종했고 초나라만 대적하면 될 뿐입니다. 오직 성인만이 안팎으로 우환을 없앨 수 있습니다. 성인이 아니라면 밖이 편안해지면 필경 안에 근심이 생기는 법이니 왜 초나라를 이대로 보내 밖의 근심으로 삼으려 하지 않습니까?


갑오일 그믐, 초군이 이른 아침부터 진군을 압박해 오며 진을 펼쳤다. 군리가 이를 걱정했다. 범개가 급히 앞으로 나가 말했다. “우물을 메꾸고 아궁이를 허물어 땅을 평탄한 후 군중에 진을 치되, 행렬의 간격을 넓게 하십시오. 진·초가 모두 하늘의 도움을 받는 나라이니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문자가 창을 들어 범개를 내쫓으며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하늘에 달렸는데 어린 녀석이 무엇을 안단 말인가?” 난서가 말했다. “초군은 경박하니 보루를 견고히 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흘이면 필시 물러갈 터, 그때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극지가 말했다. “초나라에는 여섯 가지 틈이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자중과 자반이 서로 반목하고, 초왕의 친위대는 유구한 내력의 집안의 자제로만 구성되었고, 정나라는 진은 펼쳤지만 정돈되지 않았으며, 만이는 진도 펼치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진을 칠 때 그믐을 피하지 않았고, 각자 진영에서 소란을 떨다가 진영을 합했더니 더욱 소란해졌습니다. 각자 뒤를 돌아보고 전의는 없습니다.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은 강병이라 말할 수 없는데 금기까지 범했으니 반드시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공왕이 소거巢車에 올라 진군을 살폈다. 자중이 태재 백주리伯州犁를 왕의 뒤에서 시종하게 했다. 왕이 백주리에게 물었다. “수레가 좌우로 달려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군리를 소집하는 것입니다.” “모두 중군으로 모여들고 있다.” “함께 전략을 세우는 중입니다.” “장막을 쳤다.” “선군의 신주에게 경건히 점을 치는 것입니다.” “장막을 열어젖혔다.” “명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매우 시끄럽고 또 먼지가 일고 있다.” “우물을 메꾸고 아궁이를 허물어 평탄하게 한 후 진을 펼치는 것입니다.” “모두 전차에 올라탔다. 전차 좌우의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전차에서 내리고 있다.” “원수의 맹세를 듣기 위함입니다.” “이제 싸우려는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전차에 올랐다가 좌우의 병사들이 모두 내려서고 있다.” “전쟁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백주리는 진 여공의 군의 상황을 공왕에게 알려 주었다. 한편 묘분황苗賁皇은 진 여공의 곁에서 역시 초왕의 병사들의 행동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장수들이 한결같이 “국사國士(백주리)가 초왕의 곁에 있고 또 적의 세력이 두터워 이길 수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묘분황이 여공에게 아뢰었다. “초나라의 정예는 중군의 왕족에 있을 뿐입니다. 청컨대 우리 정예를 나누어 적의 양측을 공격한 후 삼군이 왕의 정예를 합공한다면 반드시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 여공이 점을 치게 했다. 사관이 아뢰었다. “길합니다. 괘를 얻었고, 점사는 ‘남국이 위축되고 왕에게 화살을 날리니 눈을 적중시킨다’입니다. 나라가 위축되고 왕이 부상을 입으니 적의 패배가 아니면 무엇을 기대하겠겠습니까?” 여공은 점괘를 따랐다.


진 군영의 앞이 진창이었기 때문에 모두 좌우로 늪을 피하며 행군했다. 보의步毅가 여공의 어융이었고, 난침欒鍼이 융우였다. 팽명彭名이 공왕의 어융이었고 반당潘黨이 융우였다. 석수石首는 정 성공의 어융이었고 당구唐苟가 융우였다. 난서와 범문자는 그들의 일족을 인솔하여 여공을 좌우에서 호위하며 행군했다. 여공의 전차가 진창에 빠지자 난서가 여공을 자신의 전차에 태우려 했다. 난침이 외쳤다. “서는 물러나시오! 국가 대사를 어찌 홀로 감당하려 하시오? 또 타인의 직무를 침범하는 것은 모이고, 자신의 임무를 버리는 것은 태만이며, 소속을 이탈하는 것은 간입니다. 옮겨 태우는 것에는 이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여공의 전차를 들어 진창에서 끌어 냈다.


계사일, 반왕의 아들 반당이 양유기와 함께 갑옷을 올려 놓고 화살을 쏘아 일곱 겹의 갑옷을 꿰뚫었다. 이를 공왕에게 보이며 말했다. “군주께 우리 두 명의 신하가 있으니 전쟁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나라를 망칠 놈들! 내일 아침에 활을 쏘면 그 재능 때문에 죽을 것이다.” 여기呂錡가 꿈에 달을 쏘아 적중시키고 물러나다가 진흙탕에 빠졌다. 점을 치니 점인이 말했다. “희성은 해요, 이성은 달인데 필경 초왕입니다. 그를 쏴 적중하고 물러나다가 진흙탕에 빠졌으니 귀하 역시 필경 죽을 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여기가 공왕을 쏴 그의 눈을 적중했다. 왕은 양유기를 불러 화살 두 대를 주고 여기를 쏘게 했고, 목에 적중시켜 활집에 고꾸라져 죽였다. 양유기는 남은 화살 한 대를 가지고 왕에게 복명했다.


극지는 공왕의 친위대와 세 번 마주쳤는데 공왕을 볼 때마다 반드시 전차에서 내려 투구를 벗어 예를 차린 후 바람처럼 내달렸다. 공왕은 공윤 양工尹襄에게 활을 예물로 준비하여 그에게 인사하게 하고 말하였다. “바야흐로 전투가 치열해질 때 붉은 가죽 군복을 입은 사람이 있으니 군자로다. 과인을 알아보고 예를 차린 후 빠르게 달려갔는데 다친 데는 없는가?” 극지가 빈객을 보고 투구를 벗어 명을 받으며 말했다. “군주의 외신, 가 과군을 모시고 종군하였고, 군주의 보우에 힘입어 갑주를 입고 싸움 중에 있으니 감히 절하고 명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감히 고하건대 군주께서 문안을 명하시니 불안한 마음입니다. 전쟁 중이므로 사자에게 숙배로 답하겠습니다.” 극지는 사자에게 세 번 숙배하고 물러갔다.


진의 한궐이 정 성공을 추격하는데 그의 어융 두혼라杜溷羅가 말했다. “서둘러 쫓을까요? 저 마부가 자주 뒤를 돌아보고 말을 보지 않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궐이 말했다. “국군을 두 번이나 욕보일 수는 없다.” 그래서 뒤쫓는 것을 그만두었다. 극지가 성공의 뒤를 쫓았고, 그의 거우 불한호茀翰胡가 말했다. “날랜 병사를 보내 가로막고, 제가 따라잡아 병거에 올라가 사로잡아 내려오겠습니다.” 극지가 말했다. “국군을 해치면 벌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그만두었다. 정 성공의 어융 석수가 말했다. “위 의공은 그의 깃발을 버리지 않았기에 형택에서 패했습니다.” 성공은 이내 깃발을 활집 속에 넣었다. 성공의 융우 당구가 석수에게 말했다. “그대는 군주의 곁을 지키라. 패자는 오로지 군주의 보호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일은 내가 그대만 못하니 그대는 군주를 안전하게 지키라, 나는 적을 막겠다.” 그는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언릉전쟁


초군이 지세가 험한 곳으로 밀리자 숙산염叔山冉이 양유기에게 말했다. “비록 군주의 명이 있었지만 나라를 위한 것이므로 그대는 반드시 활을 쏴야 한다.” 이에 양유기가 활을 집어 두 발을 쐈고 모두 적중하여 사살했다. 숙산염이 적병을 사로잡아 적의 병거에 내던졌는데 횡목에 부딪쳐 목이 부러졌고, 이 때문에 진군이 추격을 멈췄다. 진은 초나라의 공자패公子를 사로잡았다.


난침이 자중의 깃발을 보고 여공에게 청했다. “초인이 저 깃발을 자중의 것이라 하니, 저 자가 자중일 것입니다. 일전에 신이 초나라로 사신을 갔을 때 자중이 진나라의 용기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신이 ‘군의 대열이 정돈된 것을 좋아한다.’고 대답하자, 그가 ‘그외 어떤 것이 있는가?’라고 묻자, ‘여유롭게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양국이 전쟁 중이라 사자가 오갈 수 없다면 이를 정돈된 것이라 말할 수 없고, 싸움에 임해 식언한다면 이를 여유롭다 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저 대신 사람을 보내 그에게 술 한잔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여공이 허락했다. 난침이 행인을 시켜 술통에 술을 담아 자중에게 가서 말하게 했다. “과군이 인재가 부족하여 침을 거우로 삼아 창을 들고 호위케 한 관계로 종자를 직접 대접할 수 없어 제게 대신 술을 대접케 하셨습니다.” 자중이 말했다. “부자가 일찍이 초나라에서 나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필시 그 말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기억력이 좋지 않은가?” 술을 받아 마시고 행인을 돌려보낸 후 다시 북을 치며 독전했다. 새벽부터 싸움을 시작하여 별이 떴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반이 군리에 명하여 병사들의 부상을 살피고, 보졸과 전차병을 보충하고,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며, 전차와 말을 도열시켜 닭이 울면 식사를 한 후 명을 기다리게 했다. 진나라가 초나라의 임전 태세를 우려하자 묘분황이 진중에 널리 알렸다. “전차를 점검하고, 병사를 보충하며, 말을 배불리 먹이고, 무기를 다듬고, 전열을 가다듬어 대오를 견고히 하라. 식사를 마친 후 승리를 기도하라. 내일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초나라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귀환한 포로들을 통해 공왕이 진나라의 준비 상황을 전해 듣고, 자반을 불러 논의하려 했다. 이때 곡양수穀陽豎가 자반에게 술을 올렸고 자반이 취하는 바람에 왕을 접견하지 못했다. 왕이 말했다. “하늘이 초나라를 패하게 하시는구나! 과인은 그를 기다릴 수 없다.” 그리고 야밤에 도망쳤다.


진나라는 초나라 군영으로 쳐들어가 사흘간 그들이 버리고 간 군량을 먹으며 지냈다. 범문자가 여공의 말 앞에 서서 아뢰었다. “군주께선 유약하시고 신하들은 재주가 없는데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군주께선 이를 경계하십시오! 『주서』에 ‘천명은 변함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덕을 쌓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초군이 퇴각하여 하에 이르렀을 때, 공왕이 사자를 보내 자반에게 말했다. “선대부가 전쟁에 패해 군사를 잃었을 때는 군주가 군중에 계시지 않았었다. 그대는 자신의 과오라고 생각하지 말라, 과인의 죄다.” 자반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군주께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시어 죽더라도 그 은혜는 영원할 것입니다. 소신의 병사들이 도망친 것은 사실이므로 신의 죄입니다.” 자중이 사람을 보내 자반에게 말했다. “과거 군대를 잃은 (성득신의) 일을 그대 역시 들었을 것이다. 어찌 그 일을 생각하지 않는가!” 자반이 대답했다. “설사 선대부의 일이 아니라도 대부께서 저 측에게 죽음을 명하신다면 제가 감히 의롭지 않은 삶을 탐하겠습니까? 저 측이 군주의 군사를 잃었는데 감히 죽을 죄임을 망각하겠습니까?”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제지했지만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전쟁 당일, 제나라의 국좌國佐와 고무구高無咎가 군중에 막 도착했고, 위 헌공은 위나라에서 출발했으며, 노 성공은 괴퇴壞隤(산동성 곡부현曲阜縣 경내)에서 출발했다. 목강과 사통한 선백은 계씨와 맹씨를 제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취하려 했다. 노나라 군사가 출발하려 할 때, 목강이 성공을 배웅하며 두 사람을 축출하라고 청했다. 성공은 진나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돌아와서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목강은 분노했고, 공자언公子偃과 공자서公子鉏가 앞을 지나가니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할 수 없다면 저들도 모두 군주가 될 수 있다.” 성공은 괴퇴에서 기다리며, 궁궐의 수비와 경계를 높이고 수비군을 각지에 배치한 후에 출발했다. 성공은 떠날 때 맹헌자에게 궁을 수비하게 했다.


원문


(8.16.5.) 晉侯將伐. 范文子: 若逞吾願諸侯皆叛可以逞. 若唯晉國之憂可立俟也.欒武子: 不可以當吾世而失諸侯必伐.乃興師. 欒書將中軍士燮佐之; 將上軍荀偃佐之; 韓厥將下軍; 佐新軍. 荀罃居守. 郤犨遂如皆乞師焉. 欒黶來乞師. 孟獻子: [1]有勝矣.戊寅師起.

人聞有使告于姚句耳與往. 楚子. 司馬將中軍令尹將左右尹子辛將右. 子反入見申叔時: 師其何如?對曰: ·····, 戰之器也. 德以施惠刑以正邪詳以事神義以建利禮以順時信以守物. 民生厚而德正用利而事節時順而物成上下和睦周旋不逆求無不具各知其極. : 立我烝民莫匪爾極.是以神降之福時無災害民生敦厖和同以聽, 莫不盡力以從上命致死以補其闕此戰之所由克也. 內棄其民而外其好; 瀆齊盟而食話言; 奸時以動而疲民以逞. 民不知信進退罪也. 人恤所底其誰致死? 子其勉之! 吾不復見子矣.姚句耳先歸子駟問焉. 對曰: 其行速過險而不整. 速則失志不整, 喪列. 志失·列喪將何以戰? 懼不可用也.

五月師濟. 師將至范文子欲反, : 可以紓憂. 夫合諸侯非吾所能也以遺能者. 我若群臣輯睦以事君多矣.武子: 不可.

六月·遇於鄢陵. 范文子不欲戰. : 之戰惠公不振旅; 之役先軫不反命; 之師荀伯不復從之恥也. 子亦見先君之事矣. 今我辟又益恥也.文子: 吾先君之亟戰也, 有故. ···皆彊不盡力子孫將弱. 今三彊服矣而已. 唯聖人能外內無患. 自非聖人外寧必有內憂, 盍釋以爲外懼乎? 

甲午晦晨壓軍而陳. 軍吏患之. 趨進, : 塞井夷竈陳於軍中, 而疏行首. ·唯天所授何患焉?文子執戈逐之: 國之存亡天也童子何知焉?欒書: 師輕窕固壘而待之三日必退. 退而擊之必獲勝焉.: 有六間不可失也. 其二卿相惡王卒以舊陳而不整蠻軍而不陳陳不違晦在陳而合而加. 各顧其後莫有; 舊不必良以犯天忌我必克之.

楚子登巢車, 以望. 子重使大宰伯州犁侍于王後. 王曰: 騁而左右何也?: 召軍吏也.” “皆聚於中軍矣.: 合謀也.” “張幕矣.: 虔卜於先君也.” “徹幕矣.: 將發命也.” “甚囂, 且塵上矣.: 將塞井夷竈而爲行也.” “皆乘矣左右執兵而下矣.: 聽誓也.” “戰乎?: 未可知也.” “乘而左右皆下矣.: 戰禱也.伯州犁以公卒告王. 苗賁皇晉侯之側亦以王卒告. 皆曰: 國士在且厚不可當也.苗賁皇言於晉侯: 之良在其中軍王族而已. 請分良以擊其左右而三軍萃於王卒必大敗之.公筮之. 史曰: . 其卦遇: 南國射其元王, 中厥目.·王傷不敗, 何待?公從之.

有淖於前乃皆左右相違於淖. 步毅晉厲公欒鍼爲右. 彭名楚共王潘黨爲右. 石首鄭成公唐苟爲右. ·以其族夾公行. 陷於淖. 欒書將載晉侯. : 退! 國有大任焉得專之? 且侵官冒也; 失官慢也; 離局姦也. 有三罪焉不可犯也.乃掀公以出於淖. 

癸巳養由基蹲甲而射之徹七札焉. 以示王: 君有二臣如此何憂於戰?王怒曰: 大辱國! 詰朝爾射, 死藝.呂錡夢射月中之退入於泥. 占之曰: 日也; 異姓月也楚王. 射而中之退入於泥亦必死矣.及戰共王中目. 王召養由基與之兩矢使射呂錡中項, 伏弢. 以一矢復命.

三遇楚子之卒楚子, 必下而趨風. 楚子使工尹襄問之以弓, : 方事之殷也韋之跗注君子也. 識見不穀而趨無乃傷乎?見客承命曰: 君之外臣從寡君之戎事以君之靈間蒙甲不敢拜命. 敢告不寧君命之辱. 爲事之故敢肅使者.三肅使者而退.

晉韓厥鄭伯其御杜溷羅: 速從之? 其御屢顧不在馬可及也.韓厥: 不可以再辱國君.乃止. 鄭伯其右茀翰胡: 諜輅之余從之乘而俘以下.: 傷國君有刑.亦止. 石首: 衛懿公唯不去其旗, 是以敗於.乃內旌於弢中. 唐苟石首: 子在君側敗者壹大. 我不如子子以君免我請止.乃死.

師薄於險叔山冉養由基: 雖君有命爲國故子必射.乃射再發, . 叔山冉搏人以投中車, 折軾. 師乃止. 楚公子.

欒鍼子重之旌請曰: 人謂夫旌子重之麾也彼其子重. 日臣之使於子重晉國之勇臣對曰: 好以衆整.: 又何如?臣對曰: 好以暇.今兩國治戎行人不使不可謂整; 臨事而食言不可謂暇. 請攝飮焉.公許之. 使行人執榼承飮造于子重, : 寡君乏使使御持矛是以不得犒從者使某攝飮.子重: 夫子嘗與吾言於必是故也. 不亦識乎?受而飮之免使者而復鼓. 旦而戰, 見星未已.

子反命軍吏察夷傷補卒乘繕甲兵展車馬雞鳴而食唯命是聽. 人患之. 苗賁皇徇曰: 蒐乘·補卒秣馬·利兵·修陳·固列, 蓐食·申禱明日復戰!" 乃逸. 王聞之子反. 穀陽豎獻飮於子反子反醉而不能見. 王曰: 天敗也夫! 余不可以待.乃宵遁.

三日穀. 范文子立於戎馬之前: 君幼諸臣不佞何以及此? 君其戒之! 周書: 惟命不于常.有德之謂.

師還王使謂子反: 先大夫之覆師徒者君不在. 子無以爲過不穀之罪也.子反再拜稽首曰: 君賜臣死死且不朽. 臣之卒實奔臣之罪也.子重使謂[2]子反: 初隕師徒者而亦聞之矣. 盍圖之!對曰: 雖微先大夫有之, 大夫命敢不義? 亡君師敢忘其死?王使止之弗及而卒. 

戰之日齊國佐·高無咎至于師衛侯出于公出于壞隤. 宣伯通於穆姜欲去·而取其室. 將行穆姜送公而使逐二子. 公以難告: 請反而聽命.公子偃·公子鉏趨過, 指之曰: 女不可是皆君也.公待於壞隤申宮·儆備·設守, 而後行是以後. 使孟獻子守于公宮.



(1) 각본에는 “진”자가 없다. 『당석경』은 “왈”자 다음에 “진”자를 더했는데 문맥 상 “진”자가 있는 것이 유력하고 여기서는 금택문고본을 따라 더했다.

(2) “사위使謂”가 완각본에는 “復謂”로 잘못 쓰여 있다. 여기서는 『석경』과 각 본에 근거하여 정정한다.


주석

甲午晦: 6월은 소월이다. 갑오일은 29일이다.

晉侯楚子·鄭伯戰于鄢陵: 언릉鄢陵 『좌전·은공원년』의 “언”이다. 정나라가 언을 멸한 후 처음에는 원래 이름을 사용하다가 후에 언릉으로 고쳤다. 현 하남성 언릉현鄢陵縣 북쪽이다. 강영의 『고실』을 참고했다. 『수경·거수주』는 “채택피가 물을 언릉성의 서북쪽으로 내보낸다. 진과 초가 전쟁을 한 곳이다. 제방은 동서로 5, 남북으로 10리이고 하류는 회양부구로 흘러 들어간다.”고 말한다.

楚子·師敗績: 주석 없음.

晉侯將伐. 范文子: 범문자는 사섭이다.

若逞吾願諸侯皆叛可以逞: 두 개 “령”자의 의미는 같지 않다. 앞의 것을 예전에 “쾌”라고 해석했지만 실은 “만족시키다”의 뜻이다. 후자는 “영”의 가차자로서 완화하다 뜻이다. 양수달 선생의 『독좌전』에 설명이 자세하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약 우리 군주께서 원하는 바를 만족시킨다면 장차 모든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진의 환란이 완화될 수 있다. (여공의 무도함과 세 극씨의 교만함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라고 두예는 해석했다. - 옮긴이)

若唯晉國之憂可立俟也.: 정나라를 정벌하고 싶지 않았다.

欒武子: 不可以當吾世而失諸侯必伐.乃興師. 欒書將中軍士燮佐之: 사섭은 순경을 대신했다. 「진어6」은 “난무자가 상군의 장수가 되고 범문자가 하군의 장수가 되었다.”라고 말하여 『좌전』과 다르다.

將上軍: 두예: “사섭을 대신한 것이다.

荀偃佐之: 순언荀偃은 순경의 아들로서 극기를 대신했다.

韓厥將下軍; 佐新軍: 다음 글에 따르면 극주가 신군의 장수였다.

荀罃居守: 순앵은 하군을 거느리고 국내를 수비했다.

郤犨遂如皆乞師焉. 欒黶來乞師. 孟獻子: 有勝矣.: 각본에는 “진”자가 없다. 『당석경』은 “왈”자 다음에 “진”자를 더했는데 문맥 상 “진”자가 있는 것이 유력하고 여기서는 금택문고본을 따라 더했다.

戊寅: 무인일은 12일이다.

師起: 『춘추』에 따르면 진염은 6월에 노나라에 왔고, 극주가 위나라와 제나라에 도착한 때 역시 비슷하다. 진은 군사를 4월에 일으켰으므로 제후의 군사들이 전쟁터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人聞有使告于姚句耳與往: 도구이는 정식 사자가 아니고 단지 수행원일 뿐이다. 그래서 “함께 갔다”고 썼다.

楚子. 司馬將中軍: 사마는 공자측 자반이다.

令尹將左: 영윤은 공자영제 자중이고 좌군사이다. 초나라의 관등에 따르면 영윤은 사마의 위다. 그런데도 자반이 중군의 장수가 된 것은 사마가 군사를 주관하는 관직이기 때문인가? 전해지는 이기에 왕자영차로王子嬰次盧 있는데 왕국유는 이를 공자영제가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右尹子辛將右: 자신子辛은 양공 원년과 5년의 『춘추』에 언급되는 공자임부公子壬夫로서 우군의 장수이다.

子反入見申叔時: 師其何如?對曰: ·····, 戰之器也: 전쟁을 운용하는 6가지 수단이다.

德以施惠刑以正邪詳以事神: 『회남자·범론훈』의 “祥於鬼神”과 같은 뜻. 과 상 통한다. 상은 귀신을 섬기는 태도가 순종적이고 선함이다. 양리승의 『보석』에 설명이 자세하다.

義以建利: 의 근본이다. 의로워야 비로소 리가 확고하게 선다.

禮以順時信以守物: 여기서 물은 광의의 뜻으로서 일체의 만물을 가리킨다. 신은 일체의 사물을 보호하고 지탱하는 수단이다.

民生厚而德正: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롭게 되면 덕이 단정해진다.

用利而事節: 이로움이 있어야 사람을 부릴 수 있고, 모든 행동을 나라에 이로운 방향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되어 거동이 절도에 맞게 된다.

時順而物成: 때에 맞춰 행동하면 생산에 장애를 주지 않아 생산활동에 성과가 있게 된다.

上下和睦周旋不逆求無不具各知其極: 이와 같이 하면 상하가 화목하고 모든 행동이 이로움을 따르게 되며 갖춰어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결국 모든 사람이 지켜야할 준칙을 알게 된다. 준칙/기준이다.

: 立我烝民, 莫匪爾極.: 『주송·사문思文』의 시구이다. 시의 뜻은 주나라 선조 후직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모든 사람이 준칙에 부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은 많음.

是以神降之福時無災害民生敦厖: “민생돈방”은 앞의 “민생후”와 같은 뜻. , 『방언』에서 “풍”으로 풀이한다. 어떤 학자는 “민생”을 “民性”으로 해석하여 백성들의 [인심이] 돈후해진다고 풀이하는데 역시 통하기는 하지만 앞의 “민생후”라는 문맥을 볼 때 전자보다 못하다. “모든 일이 때에 맞게 되면 재해가 없고” 그래서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 글 “한 마음으로 윗 사람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和同以聽)” 등의 말이 나오게 된다. 和同以聽”은 기실 “덕정”을 풀이한 말이다.

和同以聽: 백성이 한 마음으로 일치되어 정령을 따른다.

莫不盡力以從上命致死以補其闕: 을 두예는 “전사자”라고 해석했다. 고염무의 『보정』에선 육찬의 설을 인용하여 “군국의 사무에 결핍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예의 주장에 근거하면, 보는 보충함의 뜻이 된다. 육찬의 설에 따르면 보는 “보급”의 뜻이 된다. 다음 글 “보졸을 보충한다”를 보면 두예의 설이 비교적 옳다.

此戰之所由克也. 內棄其民: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아 덕이 없다.

而外其好: 의로써 리를 확고히 세우지 않았다.

瀆齊盟: 은 존중하지 않음. 제맹齊盟에 대해선 『좌전·성공11년』의 주석 참고. 맹약을 모욕하고 존중하지 않음은 『좌전·성공15년』의 “진나라와의 맹약을 배신하고”를 참조. 고대인은 맹세를 할 때 반드시 귀신이 앞에 임한 듯이 했으므로 맹약을 존중하지 않는 일은 바로 귀신을 섬기는 태도가 순종하지 않음이다.

而食話言: 신의로써 만물을 지키지 못함.

奸時以動: 봄 농사에 힘써야 할 때에 군사를 일으킨 일에 정확히 해당.

而疲民以逞: 호기만을 구하고 피폐해진 백성은 애석해하지 않다. 무력을 형으로 간주하여 [예로써] 사악함을 바로잡지 않음.

民不知信進退罪也: 백성들이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도 물러나도 모두 죄가 된다.

人恤所底: 휼은 근심, 이름.

其誰致死? 子其勉之! 吾不復見子矣.: 신숙시는 초나라의 패전과 함께 자반이 필경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姚句耳先歸子駟問焉. 對曰: 其行速過險而不整: 지세가 험난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행렬이 정돈되지 않았다.

速則失志: 행동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두루 살펴봐야 할 것을 고려하지 못함.

不整, 喪列: 부정제는 행렬의 대오를 잃었다.

志失·列喪將何以戰? 懼不可用也.: 주석 없음.

五月師濟. 師將至范文子欲反: 我僞逃: “위”자는 “위”로 써야 옳다. 만약의 뜻이다. 유월의 『평의』에 설명이 자세하다.

可以紓憂. 夫合諸侯非吾所能也以遺能者. 我若群臣輯睦以事君: 금택문고본엔 “약”자 다음에 “퇴退”자가 있다. 『당석경』역시 “약”자 아래에 “퇴”자가 있다.

多矣.: 다의는 『좌전·환공5년』의 주석을 참조. 『석경』엔 “의”자 다음에 “又何求 세 글자가 더 있다.

武子: 不可.: 주석 없음.

六月·遇於鄢陵. 范文子不欲戰: 「진어6」에 범문자의 말을 기술하고 있다. 참고할 만하다.

: 之戰惠公不振旅: 의 전투는 『좌전·희공15년』을 참조. 진려는 『좌전·희공28년』의 주석을 참조. 부진려는 곧 실패의 뜻.

之役先軫不反命: 선진은 기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좌전·희공33년』의 기사 참조.

之師荀伯不復從: 필의 전투는 『좌전·선공12년』을 참조. 순백은 앞글 “혜공”과 “선진”을 쓴 예로 보면 필의 전투에서 진나라 원수였던 순림보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순앵(심흠한의 『보주』)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신뢰할 수 없다. 불복종 역시 실패의 뜻이다. 이는 아마 당시의 습관적인 말로 생각되며 이에 대해 깊이 탐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고염무의 『일지록』권27에선 “다시 초나라 군사를 쫓아가 싸우지 못했다(不復從事于)”라고 하고, 유월의 『평의』는 “다시 전투에 임하지 못했다(不復役)”를 잘못 쓴 것이라고 하지만 모두 근거가 없다.

之恥也. 子亦見先君之事矣. 今我辟又益恥也.: 「진어6」은 이 말을 난서의 말이라고 쓰는데 내용 상 큰 차이는 없다.

文子: 吾先君之亟戰也, 有故: 거성으로서 자주의 뜻.

···皆彊不盡力子孫將弱. 今三彊服矣而已: 도홍경의 『별소』는 “적은 초나라뿐이다.”라고 읽었는데 역시 통한다(, 而已).

唯聖人能外內無患. 自非聖人: 가설연사이고 약 뜻인데 다수 부정구에서 많이 사용된다. 자비自非란 이와 같지 않다면.

外寧必有內憂, 盍釋以爲外懼乎?: 진나라 대신의 다수가 전쟁을 지지하고 사섭만이 후퇴를 주장했다. 사섭은 여공이 교만하고 사치하며 군신들은 불목하여 만약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국내의 우환이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나라를 그대로 [밖의 우환으로] 두어 국내의 모순을 완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본 것이지 전쟁에 패할 것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甲午晦晨壓軍而陳: 초나라 군사가 이른 아침 진나라 군사에 압박해 들어오면서 진을 쳤다.

軍吏患之. 趨進, : 범개 사섭의 아들 사개이고 시호는 선자이다. 당시 아직 어렸고 반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신속히 앞으로 나갔는데, 그 이유는 하나는 공경을 표함이고 다른 하나는 진언하기 위해서였다.

塞井夷竈陳於軍中, 而疏行首: . 행수는 행도行道이다. 소행이란 군사의 행렬간 간격이 크다는 뜻. 왕인지의 『술문』에 설명이 있다. 심흠한의 『보주』는 행도는 곧 「오어」에 나오는 행두行頭로서 각 행렬의 앞에서 인도하는 부대라고 하여 왕인지의 설명과는 다르다. 고대인은 작전에 있어서 군대간 행렬을 넓게 하려 했다. 『사마법·정작편』의 “군대가 진격할 때는 간격을 넓게 한다(凡進行惟疏)”나 『회남자·도응훈』의 “군대의 간격을 넓혀 공격한다(疏隊而擊之)”등으로 입증할 수 있다.

·唯天所授何患焉?文子執戈逐之: 문자는 그의 부친 사섭이다.

: 國之存亡天也童子何知焉?欒書: 師輕窕: 경조는 가볍고 경박함이다. 견고함의 반대이다.

固壘而待之三日必退: 초나라 군사가 일시 날카로운 기세를 보이므로 난서는 먼저 전투를 개시하지 말자고 한 것. 『한서·주아부전』역시 “초나라 병사가 날쌔고 사나우므로(輕剽) 예봉을 다투기 어렵다”고 말한다.

退而擊之必獲勝焉.: 「진어6」에선 난서가 제나라와 진나라 양국의 군사가 모두 합류했을 때 다시 전투를 하자고 말하여, 『좌전』과는 다르다.

: 有六間: 거성으로서 간극, 틈을 뜻한다.

不可失也. 其二卿相惡: 이경이란 자반과 자중이다. 두 사람은 원수지간으로서 전쟁에 패한 후 자중이 자반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했다. 이것이 하나의 틈이다.

王卒以舊: 이구以舊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두예는 “지치고 피로한 군사를 교대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구”를 “아주 오래 된”으로 풀이했다. 『회전』은 “이는 용. 구는 유구한 집안舊家”이다. 그래서 다음에 보면 “舊不必良”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후자가 비교적 해석이 낫다. 이것이 두 번째 틈이다.

陳而不整: 정나라 군대는 비록 진을 친 위세가 있긴 하지만 가지런하지 못하고 엄숙하지도 않다. 이것이 세 번째 틈이다.

蠻軍而不陳: 「진어6: “남이가 초나라와 함께 왔지만 진을 치지 않았다.” 만은 「진어6」의 남이이다. 비록 군사는 있지만 진용이 없었다. 이것이 네 번째 틈이다.

陳不違晦: 이 날은 그믐날로써 고대 미신에 따르면, 그믐에는 진을 치고 작전을 펴는 것이 좋지 않다. 그래서 극지는 초나라 군사가 진을 치는데 그믐을 피하지 않은 것을 하나의 틈이라고 봤다.

在陳而: 같다. 떠들썩함. 사병들이 진중에서 규율이 없기 때문에 엄숙하지 않았다.

合而加: 진영이 합해진 후 더욱 시끄러워졌다. 이것이 여섯 번째 틈이다.

各顧其後莫有: 「진어6: “정나라는 초나라를, 초나라는 이를 쳐다보며 서로 싸울 의지가 없었다.” 즉 『좌전』의 “각”은 정·초·만을 말한다. 상호 쳐다보며 의지하기만 하고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舊不必良: 왕의 병사들은 모두 역사가 유구한 집안의 자제라 강병이라 말할 수는 없다.

以犯天忌: 천기를 범했다는 말은 그믐에 진영을 친 것.

我必克之.: 이상은 극지가 속전을 주장한 이유로서 난서가 굳게 지키며 며칠 기다리자고 한 전략과는 정반대이다. 「진어6」에 따르면, 진 여공이 극지의 주장을 채택했다고 한다. 「진어6」에선 또 “난서가 이 때문에 극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좌전·성공17년』에서도 “난서는 극지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초나라 군사를 패배시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楚子登巢車, 以望: 소거巢車『설문』에선 “소거”로 인용한다. 이것은 전차의 일종으로 높이가 새집처럼 높아서 적을 살펴볼 때 사용한다. 『좌전·선공15년』에선 “루거樓車”라고 썼다. 『이위공병법』에 소거巢車 나오는데, 바퀴가 8개이고, 수레 위에 높이 막대를 세워 녹로[우산의 살대를 한 곳으로 펴고 접게 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여 막대기 위의 판자를 폈다 접었다 할 수 있게 했다. 판자는 사방이 4척이고 높이가 5척 정도로서 12개의 구멍이 사방으로 나 있다. 이 수레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있고 빙 돌 수도 있어서 먼 곳을 살펴보는데 사용한다. 이것은 대체로 후대의 소거의 형태이고, 춘추시대의 소거의 형태는 현재로선 불확실하다.

子重使大宰伯州犁侍于王後: 백주리는 진나라 백종의 아들이다. 백종이 피살된 후 초나라로 도망쳤고 초나라의 대재가 되었다. 지난해의 『좌전』을 참고.

王曰: 騁而左右何也?: 공왕의 질문은 진나라의 병거가 좌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까닭을 물은 것.

: 召軍吏也.: 백주리의 대답.

皆聚於中軍矣.: 역시 초 공왕의 질문으로 진나라의 군리들이 주군으로 집합하는 까닭을 물었다.

: 合謀也.: 함께 논의함.

張幕矣.: 장막을 친 까닭을 물음.

: 虔卜於先君也.: 고대의 행군엔 반드시 선대 군주의 신위를 수레에 실어 같이 간다. 본문은 선대 군주의 신위 앞에서 성심으로 점을 쳐 묻는 것이다. 신위를 싣는 것에 대해 『예기·증자문』의 “종묘의 신주를 옮김(遷廟主)”에 대해, 손이양은 『주례·소종백』의 『정의』에서 이 신주는 나라의 고조의 부친과 조부의 신주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춘추』로 고증하면 노나라에는 묘를 허무는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애공 3년에도 환궁과 희궁이 존재하고 있었다. 진나라가 이 전투에서 어떤 선조의 신주를 가지고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徹幕矣.: 장막을 걷은 이유를 물었다.

: 將發命也.” “甚囂, 且塵上矣.: 매우 시끄럽고 먼지가 이는 까닭을 물었다.

: 將塞井夷而爲行也.” “皆乘矣左右執兵而下矣.: 모두 전차에 올라타는데 전차에 탄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전차를 내려서고 있다. 고대의 병거를 보면, 원수의 전차에선 원수가 병거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전차를 모는 마부가 왼쪽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일반의 병거에선 마부가 중앙에 서고 장수가 왼쪽에 선다. 본문의 좌우는 일반 전차의 장수와 거우들을 말한다.

: 聽誓也.: 군사들에게 호령을 선포하는 것 역시 서라고 한다. 『상서』에 「감서」·「탕서」가 있고, 『좌전·민공2년』의 “군사들에게 맹세하다(誓軍旅)”라는 말로 입증할 수 있다.

戰乎?: 未可知也.” “乘而左右皆下矣.: 戰禱也.: 전투에 앞서 귀신에게 기도하다.

伯州犁以公卒告王: 공졸은 진 여공의 병사이다. 이상은 초나라가 진나라 진영을 정찰하며 백주리가 진나라 군사들의 행동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서 아직 어떤 전략은 없다.

苗賁皇晉侯之側: 묘분황은 초나라 투초鬭椒 아들이다. 그는 진나라로 망명했는데 『좌전·선공17년』의 주석을 참조.

亦以王卒告: 초 공왕의 병사들의 상황을 진나라 여공에게 말한 것.

皆曰: 國士在且厚不可當也.: 국사는 백주리를 말한다. 그의 재능과 또 그는 진나라의 정황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공영달의 『소』는 복건의 주장을 인용하여, “개왈”이하 문장은 백주리와 묘분황의 뒤에 있으므로 “백주리와 묘분황은 모두 한 목소리로 진나라와 초나라에는 모두 상대방의 인사가 군주 곁에 있고 또 진영도 각각 두터워서 서로 이기기 힘들다고 한 것이다. 주리는 진나라가 강하고, 분황은 초나라가 강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개왈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장림의 『경설잡기』역시 이런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에 나오는 분황의 말과는 모순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공영달의 『소』역시 이 주장을 반박한다.

苗賁皇言於晉侯: 之良在其中軍王族而已. 請分良以擊其左右而三軍萃於王卒必大敗之.: “삼군”은 “사군”으로 써야 옳다. 중군·상군·하군·신군 등 네 군이다. 왕인지의 『술문』에 자세하다. 『좌전·양공26년』에 성자가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추서했다. “언릉의 전투에서 초나라는 새벽부터 진나라군을 압박하며 진을 쳤고 진나라는 싸움을 피하려 했다. 그때 묘분황이 말했다. ‘초나라 군사의 정예는 중군의 왕족으로 구성된 군사뿐이니 [그에 맞게] 우물을 메우고 부뚜막을 허물고서 진을 쳐 대항하십시오; 난과 범이 나아가 그들을 유인하는 사이, 중행과 두 극씨는 반드시 두 목씨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군사가 사방에서 왕족의 군사들을 조여 오면 필시 크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본문보다 상세하다.

公筮之. 史曰: . 其卦遇: 「복괘」는 「진괘」가 아래에 「건괘」가 위에 있다.

: 요사이다.

南國: 같다. 압박해 옴局迫. 국토가 점차 줄어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치 『시·대아·소민召旻』의 “오늘밤 백리의 땅이 줄어들었다(今日夜蹙百里)”와 같다.

射其元王: 어떤 학자는 “원”자에서 끊어 읽고 “왕”자는 아랫구에 잇지만 따를 수 없다.

中厥目.: 두예: “이것은 점을 친 사람의 말이다.” 그러나 “축”자와 “목”은 압운으로서 다음 글에 연계되므로 당연히 요사이다. 『좌전·희공15년』의 “천승의 나라가 세 번 패해 도망치면(千乘三去)” 등의 구절과 같다.

·王傷不敗, 何待?公從之: 묘분황의 계책과 점을 친 결과를 따라 전투를 했다.

有淖於前: 음은 뇨이고 늪이다. 진나라 진영의 앞에 늪이 있었다.

乃皆左右相違於淖: 군사들이 좌우로 늪을 피해 나아갔다.

步毅晉厲公欒鍼爲右: 두 사람은 『좌전·성공13년』의 주석 참조.

彭名楚共王潘黨爲右: 팽명과 반당은 『좌전·선공12년』에 언급.

石首鄭成公唐苟爲右. ·以其族夾公行: 여기 족과 『좌전·선공12년』의 “지장자가 자신의 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에서의 “족”은 같은 뜻이다. 『좌전·선공12년』의 주석에 상세하다.

陷於淖: 다음 글에 따르면 진 여공의 전차가 늪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欒書將載晉侯. : 退!: 난침은 난서의 아들이다. 고대의 예제에 따르면 “군주의 앞에서 신하는 그 이름을 쓴다”(『예기·곡례상』)고 한다. 군주의 면전에서 군신 간엔 모두 그 이름을 불렀다. 난침 역시 부친의 이름을 바로 불렀다.

國有大任焉得專之?: 대임은 대사. 즉 국가의 대사를 어찌 한 사람이 전담하려 하는가라는 뜻. 두예의 주석[대임大任을 원수로 해석]과 공영달의 『소』는 모두 옳지 않다

且侵官冒也: 다른 사람의 직권을 침범하는 것은 침관이 되고, 그것은 모의 죄를 범하는 일이다.

失官慢也: 만약 진 여공을 자신의 전차에 태운다면 원수의 전차가 되는 셈이니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離局: 국은 『예기·곡례상』의 “각각 자신의 부서의 임무를 하다(各司其局)”의 부서 같다.

姦也: 자신의 직책을 내던지는 것은 필시 자신의 부서를 이탈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간이다. 간은 어지럽힘.

有三罪焉不可犯也.乃掀公以出於淖: 흔은 들어서 나감. “흔공”이라 한 것을 보면, 진 여공의 전차를 들어내어 늪에서 꺼낸 것.

癸巳: 계사는 갑오일 하루 전이다. 앞에서 갑오일의 일을 서술했고, 여기서 하루 전의 일을 보충하여 설명하고 있다.

養由基蹲甲而射之: 반왕의 당은 반왕의 아들 반당이란 뜻. 이 어법은 『좌전·양공23년』의 “신선우의 아들 부지(申鮮虞傅摯)”와 같다. 주량공의 『서영』권8에서 “아마도 필시 당시에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서 특별히 그의 부친을 나열하여 구별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완지생의 주장 역시 같다. 반왕과 양유기는 모두 『좌전·선공12년』의 주석을 참조. 준갑蹲甲 갑옷을 어떤 물건 위에 놓아 둔 것.

徹七札焉: 철은 뚫고 지나감. 가죽 갑옷은 두텁거나 얇은 가죽을 7겹으로 겹쳐 놓았다. 손이양의 『주례·고공기·함인函人』의 『정의』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당시의 혁갑은 대체로 7겹으로 만들어졌다. 『여씨춘추·애사편』에 진 혜공의 거우가 진 목공을 몽둥이로 때려서 여섯 겹을 부수고 한 겹만이 부숴지지 않았다고 하고; 『한시외전』8에는 제 경공이 활로 칠찰을 뚫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열녀·변통전』에선 진 평공 역시 활로 칠찰을 뚫었다고 쓰고 있는 것 등으로서 입증할 수 있다.

以示王: 君有二臣如此何憂於戰?王怒曰: 大辱國!: 우창의 『교서』는 “대욕국”은 말로 사람을 꾸짖을 때 쓰는 속어라고 하는데 자못 일리가 있다. 만약 두 사람이 활을 쏴 칠박을 뚫은 사실이 나라를 욕먹이는 일이라면 이는 뜻이 잘 통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는 다만 두 사람이 이를 가지고 과시하는 일을 책망한 것일 뿐이다.

詰朝爾射, 死藝.: 내일 아침에 너희들이 활을 쏜다면 그 활솜씨 때문에 죽을 것이다.

呂錡夢射月: 려기는 진나라의 위기魏錡이다. 『좌전·선공12년』의 주석을 참조.

中之退入於泥. 占之曰: 日也; 異姓月也: 일월은 내외의 뜻이 있다. 진나라는 희성이므로 희성이 안이 되고 이성이 밖이 된다. 장병린의 『독』에 자세하다.

楚王. 射而中之退入於泥亦必死矣.及戰共王中目. 王召養由基與之兩矢使射呂錡中項, 伏弢: 음은 도이다. 활집이다. 려기는 목에 화살을 맞고 활집에 엎어져 죽었다.

以一矢復命: 주석 없음.

三遇楚子之卒楚子, 必下而趨風: 극지가 초 공왕을 우연히 볼 때마다 반드시 전차에서 내려 투구를 벗고 질풍처럼 앞으로 달렸갔다. 공경을 표시하는 행동이다. 추풍은 당시의 상투어로서 『신서·선모편』에도 나온다.

楚子使工尹襄問之以弓: 공윤은 관명. 양은 그의 이름. 문은 안부를 물음. 고대에 안부를 물을 때는 반드시 예물을 함께 보내어 정을 표시한다. 『시·정풍·여왈계명女曰鷄鳴』의 “잡다한 패물과 함께 안부를 물었다(雜佩以問之)”나 『좌전·애공11년』의 “현다에게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을 때 가야금을 가져갔다(使問弦多以琴)” 등으로 입증할 수 있다.

: 方事之殷也: 사란 전쟁이다.

韋之跗注君子也: 의 음은 매이고 적황색이다. 는 부드러운 소가죽이다. 음은 부이고 각배脚背이다. . 두예에 따르면 부주는 당시의 군복인데 오늘날의 바지로서 다리까지 내려온다. 정현의 『잡문지』에선 옅은 붉은색의 부드러운 소가죽으로 군복을 제작한다고 했고, 심흠한의 『보주』역시 이 주장을 지지했다. 죽간 제『손자』에 “말갑末甲”이란 말이 있는데, 곧 매이고 “말갑”은 매위의 부주이다. 그러므로 정현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다. 호배휘의 『연육실잡저석매硏六室雜著釋』역시 참고할 만하다.

識見不穀而趨無乃傷乎?: 은 시간부사로서 마침()의 뜻. 이것은 초 공왕이 공윤양을 파견하여 극지에게 한 인사말이다.

見客: 객은 공윤양.

承命: 주는 투구. 면주는 투구를 벗음.

: 君之外臣從寡君之戎事以君之靈間蒙甲: 은 거성으로서 『좌전·장공10년』의 “又何間焉”의”과 같고, 참여의 뜻. 왕인지의 『술문』에 자세하다.

不敢拜命: 『예기·곡례상』과 「소의」에서 모두 “사신은 절하지 않는다(介者不拜)”라고 쓴다. 본문은 초 공왕이 노고를 치하하는 인사를 절하여 받을 수 없다는 뜻.

敢告不寧: 이 문구는 자신은 아직 부상을 입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녕은 은으로 읽는다. 『방언』은 “은은 다침이다(, 傷也)”로 풀이한다. 유문기의 『소증』에 설명이 자세하다.

君命之辱: 군명지욕은 「진어6」의 “拜君命之辱”과 같은데, 여기서는 초 공왕의 위로에 대해 한 말로서 감히 공왕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

爲事之故: 금택문고본은 “爲執事之故”로 쓴다. 『주례·춘관·대축』의 주석과 두예에 따르면 “집”자는 연문이다.

敢肅使者.: 「진어6」은 “(爲使者故, 敢三肅之)”라고 쓴다. 왕념손은 “爲事之故”에서 “사”는 “초 공왕이 사자를 보내 위문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술문』에 자세하다. 숙은 숙배로서 본래 고대 부녀들이 행하는 에절이고 남자는 배 혹은 고개를 조아리는 행동 등으로서 공경의 뜻을 표한다. 물론 절과 돈수는 모두 허리를 굽힌다. 극지는 비록 투구는 벗었지만 몸에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또 고례에 갑옷을 입은 사는 절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만 숙배의 예를 올린 것이다. 숙배는 몸을 세운 채로 약간 구부려 두 손을 마주잡고 가슴에서 아래로 천천히 이동한다.

三肅使者而退: 주석 없음.

晉韓厥鄭伯其御杜溷羅: 速從之?: 두혼라는 한궐에게 신속하게 뒤쫓을 지 물어본 것.

其御屢顧不在馬可及也.韓厥: 不可以再辱國君.: 성공 2안의 전쟁에서 한궐이 제 경공의 뒤를 쫒은 적이 있었다. 완지생의 『두주습유』는 “한 나라의 군주를 두번 욕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전쟁에서의 일이다. 초왕이 이미 눈을 잃었으므로 군주를 욕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정나라 군주를 욕보일 수는 없음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역시 뜻이 통하는 설명이다.

乃止. 鄭伯其右茀翰胡: 諜輅之: 별도로 무장이 가벼운 날랜 병사를 보내 뒤쫒게 하여 길을 가로막아 공격함. 초순의 『보소』에 상세하다.

余從之乘而俘以下.: 자신은 뒤에서 쫒아서 정나라 군주의 전차에 올라탄 후 사로잡아 내려오겠다는 뜻.

: 傷國君有刑.亦止. 石首: 衛懿公唯不去其旗, 是以敗於.: 형은 형택熒澤이다. 위나라와 적이 형택에서 싸울 때 위 군사가 대패했는데 위 의공은 그의 깃발을 버리지 않아 피살된 일이 『좌전·민공2년』의 기사에 있다.

乃內旌於弢中. 唐苟石首: 子在君側敗者壹大: 오로지. 정나라 군주이다. 즉 패전한 군사는 한 마음으로 군주를 보호해야 한다. 도홍경의 『별소』에 설명이 상세하다. 고염무 역시 “패자일대란 군주가 혹 화를 면하지 못할까 걱정함이다.”라고 설명한다.

我不如子子以君免我請止.乃死: 지는 진나라 군사를 저지함이고 그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師薄於險: 압박.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 군사들에게 압박을 받아 험난한 곳으로 밀리게 되었다.

叔山冉養由基: 숙산이 씨이다. 『장자·덕충부편』에 숙산무지叔山無趾 언급되는 것으로 입증할 수 있다.

雖君有命: 공왕이 앞에서 “너희들이 활을 쏘게 되면 그 재주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책망했다. 여기서 군명이란 활을 쏘는 것을 금지한 것.

爲國故子必射.乃射再發, : 활을 두 번 쏴서 모두 죽였다.

叔山冉搏人以投: 진나라 군사를 사로잡아 던졌다.

中車, 折軾. 師乃止. 楚公子: 공자패는 「진어6」에서 왕자발구王子發 쓴다. 왕인지의 『명자해고』는 이름이 구이고 발은 자라고 말한다. 발과 패는 고음에서 동성이다. 그래서 『좌전』은 패로 썼다.

欒鍼子重之旌請曰: 人謂夫旌子重之麾也: 난침이 자중의 기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로잡힌 초나라 군사에게 들었던 것 같다. 『묵자·기치편』에 “깃발을 세워 써 놓기 때문에 이제 모두 명백히 누구의 깃발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즉 기치에 성씨를 쓰는데 이런 예는 전국시대부터 생긴 제도이다.

彼其子重. 日臣之使於: 과거.

子重晉國之勇臣對曰: 好以衆整.: 又何如?臣對曰: 好以暇.今兩國治戎行人不使不可謂整; 臨事而食言不可謂暇: 전쟁에 임해 과거의 말을 이행하지 않는 일은 침착하다고 말할 수 없다.

請攝飮焉.: 섭은 대신하다(). 난침은 진 여공의 거우였기 때문에 자리를 이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내 자중에게 술을 대접할 수 있게 요청한 것. 유월의 『평의』에 설명이 있다.

公許之. 使行人執榼承飮: 의 음은 개이다. 술을 담는 그릇. 은 받듦.

造于子重: 조는 도달함.

: 寡君乏使使御持矛: 모시다. 군주의 곁을 지키며 손에 창을 들고 있다. 즉 난침이 거우임을 뜻함.

是以不得犒從者使某攝飮.: 다른 사람을 시켜 접대함. 는 대신 온 사람의 자칭. 대체로 신분이 낮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름대신 모라고 쓴다.

子重: 夫子嘗與吾言於: 부자는 난침이다.

必是故也. 不亦識乎?: 기억함의 뜻. 기억력이 좋다는 의미.

受而飮之免使者而復鼓. 旦而戰, 見星未已: 새벽부터 전쟁이 시작되어 황혼이 될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子反命軍吏察夷傷: 자는 후대에는 이 쓴다. 창에 찔린 상처들을 말한다. 이와 상은 같은 뜻의 글자다.

補卒乘: 보병과 전차병을 충원함.

繕甲兵展車馬: 은 늘여 세움.

雞鳴而食唯命是聽. 人患之. 苗賁皇徇曰: 蒐乘·補卒: 검열. 유문기의 『소증』은 『이아·석고』를 인용하여 “모음 뜻”이라고 하는데, 역시 뜻이 통한다.

秣馬·利兵·修陳·固列, 蓐食·申禱: 요식蓐食 『좌전·문공7년』의 주석 참조. 신도申禱 재차 기도하여 승리를 기원함.

明日復戰!" 乃逸: 일부러 포로들을 풀어 초나라에 이 소식이 전달되게 한 것.

王聞之子反. 穀陽豎獻飮於子反子反醉而不能見: 자반은 이 일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그 사건이 「초어상」·『여씨춘추·권훈편』과『한비자』「십과편」·「식사편」, 『회남자·인간훈』, 『사기』「진세가」·「초세가」 그리고 『설원·경신편』등에 모두 기술되어 있는데 상세함과 소략함 등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곡양수穀陽豎 혹 “豎穀陽”이나豎陽穀”으로 쓰기도 한다.

王曰: 天敗也夫! 余不可以待.乃宵遁: 주석 없음.

三日穀: 희공 28년의 성복의 전투때와 같다.

范文子立於戎馬之前: 융마는 진 여공의 전차를 끄는 말.

: 君幼: 금택문고본은 “君幼弱”으로 쓴다. 『석문』에서 말한 어떤 본과 같다. 「진어6」역시 같다.

諸臣不佞何以及此? 君其戒之! 周書: 惟命不于常.: 『상서·강고』의 문구이다.

有德之謂.: 주석 없음.  

師還: 는 환공 6년에 언급된 지명 이다. 강영의 『고실』에 설명이 자세하다. 하는 비록 수나라의 땅이지만 이미 매우 쇠약해져 초나라의 부용국이 되었기 때문에 초나라 군사가 지나갈 수 있었다.

王使謂子反: 先大夫之覆師徒者君不在: 선대부는 성득신(자옥)을 가리킨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성복에서 전투를 치를 때 초 성왕은 당시 군중에 없었다.

子無以爲過不穀之罪也.子反再拜稽首曰: 君賜臣死死且不朽. 臣之卒實奔臣之罪也.子重使謂子反: “사위使謂”가 완각본에는 “復謂”로 잘못 쓰여 있다. 여기서는 『석경』과 각 본에 근거하여 정정한다.

初隕師徒者: 자옥을 가리킨다.

而亦聞之矣: 같다.

盍圖之!: 자중이 자반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 것. 소위 극지의 “초나라의 이경이 반목하고 있다.

對曰: 雖微先大夫有之, 大夫命敢不義?: 설령 선대부 자옥이 자살로서 사죄했던 일이 없었더라도 그대가 내게 죽음을 명하는데 어찌 살고자 불의를 저지르겠는가라는 뜻.

亡君師敢忘其死?王使止之弗及而卒: 『한비자』『여씨춘추』『회남자』는 모두 초 공왕이 “자반을 죽였다.”고 말한다. 『설원』역시 “자반을 주살하였다.”고 말했고, 「초세가」는 “왕이 분노하여 자반을 활로 쏴 죽였다”고 쓰고 있다. 모두 『좌전』과는 다르다. 「진세가」는 『좌전』을 인용하여 “왕이 분노하여 자반을 문책하자 자반이 죽었다[자살했다].”고 한다.

戰之日: 금택문고본엔 “戰之明日”이라고 쓴다.

齊國佐·高無咎至于師衛侯出于公出于壞隤: 전투가 시작된 날 제나라 군사가 막 도착했고, 위나라와 노나라의 군주는 겨우 국내에서 출발하였다. 괴퇴壞隤 고동고의 『대사표』에선 곡부현曲阜縣 경내라고 한다.

宣伯通於穆姜: 선백은 숙손교여이다. 목강은 선공의 모친. 같은 글자이다. 『열녀·얼패전』은 “총명했지만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시로를 무라고 했다.”고 전한다.

欲去·而取其室: 계는 계문자, 맹은 맹헌자를 말한다.

將行穆姜送公而使逐二子. 公以難告: 진난은 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출병하여 함께 정나라를 치자는 것.

: 請反而聽命.: 다음 글을 보면 성공의 이 말은 구실을 붙여 거절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公子偃·公子鉏趨過: 금택문고본 “趨而過”로 쓴다.

指之曰: 女不可是皆君也.: 노 성공을 폐하고 저 두 사람을 군주로 세울 수 있다는 뜻.

公待於壞隤申宮·儆備: 자는 고대에 사자와 항상 바꿔 쓸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장자·대종사』의 신도적申徒狄 『석문』에선 최본에는 “司徒狄”이라고 쓴다고 설명했다. 또 『사기·유후세가』의 “양 신도申徒 여겼다.”에 대해 『집해』에서 서광의 “신도는 즉 사도이다”라는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신궁은 사궁과 같고 守宮 뜻이다. 경비儆備 경계를 높임.

設守: 각지에 수비를 두다.

而後行是以後. 使孟獻子守于公宮: 즉 “신궁”이다. 계문자는 성공을 따라 진나라의 정나라 정벌에 나섰고, 맹헌자는 공궁을 수비했다. 성공이 이 두 사람을 제거할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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