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수갈繻葛 전투 - 어리진魚麗陳

본문

환왕이 정 장공의 경사 직분을 빼앗자 장공이 조근하지 않았다. 가을, 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했고 장공은 이에 맞섰다.

왕의 군대가 중군이었고, 괵공 임보林父가 우군을 지휘했는데 채나라와 위나라는 우군에 속했다. 주공흑견周公黑肩이 좌군을 거느렸고 진나라는 이에 속했다.

정나라의 자원子元(공자돌)이 좌거左拒(방형의 진형)를 만들어 채나라와 위나라를 상대하고, 우거를 만들어 진나라를 상대하게 하며 말하였다. “진나라는 혼란스러워 군사들이 싸울 의지가 없습니다. 먼저 그들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도망칠 것입니다. 왕의 군사들은 이들을 돌아보느라 필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채나라와 위나라는 이런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로 먼저 도망칠 것입니다. 그후 군사들을 왕의 군대에 집중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자원의 의견을 따랐다. 만백이 우거를 지휘하고, 채중족이 좌거를 맡았으며 원번原繁과 고거미高渠彌에게 중군을 이끌고 장공을 따르게 하여 어리진魚麗陳을 펼쳤다. 선두에 편을 앞세우고 뒤에 오를 배치하여 오로 하여금 편의 빈틈을 메꿨다.

수갈繻葛(하남성 장갈현 동북)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장공이 좌우거에 호령했다. “군기를 흔들고 북을 쳐라!” 채나라, 위나라 그리고 진나라 군사는 모두 도망쳤고, 왕의 병사들이 혼란에 빠지자 정나라 군대는 군사를 집중하여 중군을 공격하여 왕의 군사를 대파했다. 축담祝聃이 활을 쏴 왕의 어깨를 적중시켰지만 왕은 여전히 군사를 지휘할 수 있었다. 축담이 왕을 추격할 것을 요청하자, 장공이 말렸다. “군자는 타인을 능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물며 천자를 능멸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구제하여 사직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충분하다.” 

밤에 정 장공이 채족을 보내 왕을 위로하였고 또 주위 신하들을 위문하였다.


2.5.3. 王奪鄭伯鄭伯不朝. 王以諸侯伐鄭伯禦之王爲中軍; 虢公林父將右軍·人屬焉; 周公黑肩將左軍人屬焉鄭子元請爲左拒以當·; 爲右拒以當: 民莫有. 若先犯之必奔. 王卒顧之必亂. ·不枝固將先奔. 既而萃於王卒可以集事.從之. 曼伯爲右拒祭仲足爲左拒原繁·高渠彌以中軍奉公, 爲魚麗之陳. 先偏後伍伍承彌縫 

戰于繻葛. 命二拒曰: 旝動而鼓!··皆奔王卒亂師合以攻之王卒大敗. 祝聃射王中肩王亦能軍. 祝聃請從之. 公曰: 君子不欲多上人況敢陵天子乎? 苟自救也社稷無隕, 多矣. 

鄭伯使祭足勞王且問左右.



해설

王奪鄭伯: 공영달의 『소』: “『좌전·은공3년』의 ‘왕이 괵공에게 정무를 나누었다(王貳于)’는 기사는 국정을 괵공에게 나누어 정 장공이 전임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평왕이 죽자 주나라는 괵공에게 정무를 맡기려 했고 주나라와 정나라 사이에 원한이 쌓여갔고 여전히 이를 풀지 못했다. 또 『좌전·은공8년』의 ‘괵공 기보가 처음으로 경사로서 왕실에 출사했다’이때 비로소 국정에 참여하여 정 장공과 왕정을 나눴다. 또 『좌전·은공9년』의 ‘정 장공이 왕의 좌경사가 되었다’는 언급은 괵공이 우경사가 되었다는 말이고 정백과 함께 왕을 보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문은 왕이 정 장공의 권한을 빼앗아 모든 일을 괵공에게 전임하고 장공은 다시는 왕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鄭伯不朝. 王以諸侯伐鄭伯禦之: 주석 없음.
王爲中軍; 虢公林將右軍: 괵공 임보는 왕의 경사이다.
·人屬焉; 周公黑肩將左軍: 흑견黑肩 주 환공桓公(주공 단의 후손)이다. 이 때 정 장공을 대신하여 경사가 되었다.
人屬焉: 주석 없음.
鄭子元請爲左拒: 자원은 공자돌의 자. 방형의 군대 진형이다. 육조 시대의 사본에선 “구”로 쓰는데 아래에서도 동일하다.
以當·; 爲右拒以當: : 이때 진 환공이 죽고 국내는 정권을 다투며 서로 죽이고 죽었다.
民莫有. 若先犯之必奔. 王卒顧之必亂: 는 현대의 돌보다와 같은 말이다. 왕의 군대는 한쪽으론 진나라 군대가 붕궤되는 것을 살피는 동시에 정나라와 전투를 벌여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진영이 혼란에 빠질 것임을 의미.
·不枝: 는 지로도 쓴다. 『전국책·서주책』의 “위나라는 막아낼 수 없었다(不能支)”에 대한 고유의 주석, “지는 지키다()의 뜻이다.” 기실 오늘날의 지지/지탱의 뜻이다.
固將先奔. 既而萃於王卒可以集事.: 모여들다. 성취하다. 채·위·진의 군사들이 도망쳐 흩어진 후 왕의 군대에 군사를 집중하면 성공할 수 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의미.
從之. 曼伯爲右拒: 만백曼伯은 공자홀이다.
祭仲足爲左拒原繁·高渠彌以中軍奉公: 자원·만백·채중족·원번 등의 인물에 대해서는 『좌전·은공5년』에 이미 언급했다. 『사기·진본기』의 “정나라 고거미高渠가 군주 소공昭公 시해했다”는 기사에서 미와 미는 통한다.
爲魚麗之陳: 군대의 진영 같다. 『후한서·개훈전蓋勳傳』의 “훈은 나머지 백여 명을 모아 어리진을 펼쳤다(收餘衆百餘人, 爲魚麗之陳)”는 기사를 보면 이 진법은 후한 때에도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先偏後伍: 두예: “『사마법』에 따르면, 전차전에서 전차 25대를 이라 부른다. 병거를 앞세우고 오를 뒤에 배치한다. ‘’(전차 부대)의 틈을 오로 메꾼다. 병사 다섯을 오라고 부른다. 대체로 이것이 어리魚麗 진법이다.” 강영江永은 『주례·하관·사우司右』의 “대체로 군대가 회동할 때 전차에 부속된 졸오卒伍 뒤따르게 한다(凡軍旅會同, 合其車之卒伍而比其承)” 그 주석을 보면 “전차에도 졸오가 있다” 또 『사마법』을 인용, “전차 25대를 편이라 하고, 125대를 오라 한다”고 적고 있다. 즉 이것은 25대를 선두에 세우고, 125대를 그 뒤에 배치하여 틈이 없게 하는데 마치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나아가는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두예가 말한 병졸 다섯을 오 한다는 설명은 오류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군경보의群經補義』에 보인다. 『사마법』 자체가 이미 춘추 시대의 전법이 아니므로 두예의 주석을 따르기는 어렵다. 강영의 주장처럼 전차 125대로 25대의 빈 틈을 메운다는 것 역시 이치상 합리적이지 않다. 후대에 많은 이설이 있고 통일되지 않았다. 문헌이 부족하여 입증하기 어렵다. 고고학적으로도 역시 입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비워두는 것이 옳다.
伍承彌縫: 의 역할은 전차 편대의 뒤에서 그 틈을 메꾸는 것이다.
戰于繻葛: 음은 수이다. 수갈繻葛은 즉 은공 5년에 나왔던 장갈이다.


춘추좌전 지도 - 수갈繻葛



命二拒曰: 旝動而鼓!: 음은 회. 대장이 사용하는 군기로서 이를 잡고 호령한다. 진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그림 등의 꾸밈은 없다. 가규는 괴를 발석發石 혹은 비석飛石(고대의 전투도구의 하나. 돌을 큰 나무 위에 놓고 적에게 발사한다. 옮긴이.)으로 설명했다. 단옥재의 『설문해자주』: “비석飛石은 범려范蠡의 『병법』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좌전·양공20년』의 ‘몸소 화살과 돌을 맞아가며(親受矢石)’에서 언급된 석은 내 생각으로는 (범려가 말한) 비석은 아니다.” 단옥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가규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皆奔王卒亂師合以攻之王卒大敗. 祝聃射王中肩王亦能軍: 왕이 비록 어깨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군대를 지휘할 수는 있었다. 왕인지는 『경의술문』에서 “”은 “”의 오류라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없다.
祝聃請從之: 종지從之란 왕을 추격하겠다는 뜻.
公曰: 君子不欲多上人況敢陵天子乎?: 은 남을 모욕하다.
苟自救也社稷無隕, 多矣.: 多矣 당시의 상용어이다. 『좌전·성공16년』: “우리 군신들은 뜻을 모아 군주를 섬길 수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我若羣臣輯睦以事君, 多矣).” 이 문장의 뜻은 나라가 패망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鄭伯使祭足勞王且問左右: 거성으로 위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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