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709년) 2.3.1. 한만韓萬

본문

환공 3년 봄, 곡옥 무공이 익(산서성 익성현)을 정벌하여 형정陘庭(익성현 동남쪽)에 군사를 주둔했다. 한만韓萬이 무공의 전차를 몰았고, 양홍梁弘이 거우였다. 무공이 익후를 분습汾隰까지 뒤쫓았는데 익후의 전차의 좌우 말이 나뭇가지에 걸려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야밤에 익후를 사로잡았고 난공숙도 함께 잡았다.


2.3.1. 三年春曲沃武公次于陘庭. 韓萬御戎梁弘爲右. 翼侯汾隰, 絓而止夜獲之欒共叔.


해설

三年春曲沃武公次于陘庭: 『좌전·장공3년』: “군사와 관련한 범례에 따르면, 하루 숙영(一宿)을 사, 이틀 신, 이를 넘어서면 차 한다.” 즉 본문의 차는 삼일 이상을 머무는 것을 말한다.

韓萬御戎: 은 본래 국명으로서 『죽서기년』에 근거하면 춘추 시대 이전인 진 문후21년에 멸망했다. 『좌전·희공24년』의 “우나라·진나라·응나라·한나라는 무왕의 아들들이 봉건받은 나라이다”라는 기사를 참조. 본문의 한나라는 곧 옛 한나라이다. 『한서·위표전담한왕신전魏豹田儋韓王信傳』과 『찬』의 주석을 보면 옛 한나라와 한궐韓闕은 선조가 같다고 말하지만 상고할 만한 것은 적은 것 같다. 한만은 환숙의 아들이다. 한의 지역을 봉건받아 대부가 되었다. 즉 이 사람이 전국 시대 한나라의 시조이다. 『국어·진어』8에 한선자가 숙향에게 “저의 시조 환숙이하 모든 조상들이 그대의 충고에 감사드립니다(其自桓叔以下, 嘉吾子之賜)”라고 사례한 말로써 입증할 수 있다. 은 현재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 동쪽이다어융御戎은 전차를 모는 사람이다. 『주례·하관』에선 융복戎僕이라고 부른다.


춘추좌전 지도 - 한韓


梁弘: 『좌전·희공33년』을 보면, 진나라에도 양홍梁弘이 언급되었는데 두 사람은 83년의 차이를 보이므으로 동일인은 아니다위우爲右는 거우車右이다. 『주례·하관夏官』에선 “융우戎右”라고 한다. 그는 융거의 병혁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전시에 군주와 함께 전차를 타고, 전차의 우측에서 창과 방패를 들고 비상시를 대비한다. 아울러 병사, 무기와 기타 군중에 필요한 부역 등을 충원한다. 『좌전·성공2년』과 『공양전』의 기사를 보면, (포로가 될 위급 상황에서) 제 경공頃公 봉축보逢丑父 대신 융우로 위장했고, 축보는 경공을 시켜 물을 떠오게 함으로써 도망칠 수 있게 하고 있다. 또 『곡량전·성공5년』의 진나라 백존伯尊 손수레가 피하지 않자 거우車右 하여금 내려서 채찍질을 하게 한 일 등을 보면 거우가 맡았던 일이 무엇인지 뒷받침할 수 있다. 보다 상세한 것은 『주례·융우戎右』의 손이양의 『정의』를 참고하라. 고대의 병거에서 주장은 중앙에 위치하고 어융은 왼쪽에 거우는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翼侯汾隰: 익후는 곧 진나라 애후이다. 분습汾隰 분수의 습지인데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후한서·서강전西羌傳』의 “2(주나라 선왕38), 진나라가 북융을 분습에서 패퇴시켰다”에 대해 장회태자는 “분습”을 “두 개 하천의 이름二水名”이라고 주석했는데 검토할만하다. 분수汾水 산서성 영무현寧武縣 서남쪽의 관잠산管涔山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정락현靜樂縣 서쪽을 지나고, 동남쪽으로 흘러가 태원시太原市 지난 후 물길을 꺾어 서남쪽을 향한다. 그리고 개휴介休·영석靈石·곽·홍동洪洞·임분臨汾 등 여러 현의 서쪽을 지나 신강新絳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꺾어 흐른다. 결국 하진현河津縣의 서남쪽에 도달해서는 황하로 합류한다. 본문에서 익후를 추격하던 곳은 현재의 양분襄汾 곡옥의 사이 지역이다. 『사기·진세가』에서 “분방에서 진나라를 토벌했다”라는 기사의 분방은 분습을 말한다.


고대의 병거 - 참마와 복마, 거우와 어융


絓而止: 『좌전·성공2년』에서 안 전투를 서술할 때, “양끝의 말이 나무에 걸려 나갈 수 없었다(絓於木而止)”란 기사가 보이는데, 이 역시 참마驂馬 나무 때문에 도망갈 수 없었다는 뜻이다. 고대 전차에는 말 네 마리가 메여 있는데, 가운데 두 마리를 복이라 한다. 『시·정풍·대숙우전大叔于田』의 “가운데 두 말이 앞에서 끌고(兩服上襄), “가운데 두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兩服齊首)” 등의 복이 이 뜻이다. 전차 좌우의 말을 참이라 한다. 『시·대숙우전』의 “양 끝의 말은 손처럼 움직이고(兩驂如手), “양 끝의 말은 뒤에서 따라가네(兩驂雁行)” 등의 참이 이 뜻이다. 은 또 비라고도 하는데, 참은 전차의 양 끝에 자리하기 때문에 길이 좁을 경우 쉽게 나무에 걸려 장애가 된다.

의 음은 괘이다. 『곡량전·소공8년』의 “어딘가 걸려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轚者不得入)”에 대해 범녕范寧은 “어떤 장애물에 걸려 문을 들어서지 못한”것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육덕명의『석문』: “격의 소리는 고와 제의 반절이고 걸리다라는 뜻이다. 유조劉兆라 풀이했는데 괘 걸리적거림이다.” 즉 『좌전』의 “괘”는 『곡량전』의 “격”과 같고 모두 장애물에 걸림의 뜻이다. 는 규 소리를 따르고, 소리를 따른다. 두 글자의 성모聲紐 같고, 운은 평성운과 입성운의 운미가 서로 바뀌는 평입대전平入對轉으로서 고음에서 본래 통가될 수 있는 요건을 가졌다.

夜獲之欒共叔: 공숙共叔은 환숙의 보좌인 난빈欒賓의 아들로서 이름은 성이다. 애후의 대부였다. 『국어·진어1』의 “무공이 익을 공격하고 애후를 죽였다. (자살하려는) 난공자를 제지하며 말하였다. ‘부탁건대 죽지 말라! 나는 그대를 천자에게 알현케 하고 상경으로 삼아 진나라의 정치를 맡길 것이다.’” 그러나 난공자는 이를 사양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진세가」: “애후 9년 진나라를 분습에서 토벌하고 애후를 사로잡았다.” 이때 애후와 난공숙은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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