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705년) 2.7.1. 곡나라 등나라

본문

환공 7년 봄, 곡나라 군주와 등나라 군주가 우리나라를 예방했다. 『춘추』에 이름을 쓴 까닭은 그들을 천시한 것이다.


2.7.1. 七年春, ·來朝. , 賤之也.


해설


은 국명이다. 곽말약의 『은계수편殷契粹篇』의 복사의 “王氏□”에 대해 당란과 우성오는 모두 이 글자를 “곡”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것은 우성오의 『쌍검치은계변지삼편雙劍誃殷契駢枝三篇』에 보인다. 그들은 곡나라를 은상 시대부터 존재해 온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공영달은 “곡나라는 어떤 성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통지·씨족략』에선 영성嬴姓이라고 주장한다. 그 옛성은 호북성 곡성현穀城縣 서북쪽이다.


춘추좌전 지도 - 곡나라, 등나라


은 만성曼姓 국가로서 장공 16년에 초나라 문왕에게 멸망되었다. 옛성은 하남성 등현鄧縣 혹은 양번시襄樊市 북쪽의 등성鄧城이라고도 주장한다. 옛 이기로서 현재 알 수 있는 것은 등공기鄧公旣·등백희궤鄧伯姬簋·등공자기鄧公子旣 등이 있다. 이들 이기에선 “등”자를 모두 “□” 혹은 “□”등의 형태로 쓴다. 두예: “예방을 총칭해서 한 번 쓰지 않고 두 번 쓴 까닭은 따로 예방을 했기 때문이다.” 은공 11년의 “등후와 설후가 예방을 왔다(滕侯·薛侯來朝)”라는 상황과는 다른데, 등후와 설후는 동시에 내조하여 서로 선후를 다투었고, 이번은 각각 따로이 예방을 온 것이기 때문에 각각 나누어서 기록했다. 이 해엔 가을과 겨울에 계절의 이름도 달의 이름도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선 환공 4년의 『춘추』 주석을 참조하라.

七年春, 穀伯·鄧侯來朝: 『춘추』는 “여름”으로 쓰고, 『좌전』에선 “춘”이라고 쓴 까닭에 대해 두예는 “봄에 와서 여름에야 예방을 거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익趙翼 『해여총고陔餘叢考』에서 이들 두 나라는 주나라 달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춘추』와 『전』에서 서로 계절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춘추』는 주나라 달력을, 『좌전』은 하나라 달력을 쓰기 때문이고 이 사례 역시 그러하다고 설명한다. 이 해는 실제로 은나라의 건축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력으로는 3월에 해당할 때의 일이고, 건축으로는 4월에 해당하기 때문에 『춘추』에선 “여름”이라고 썼다.

, 賤之也: 『춘추』에서 곡백과 등후의 이름을 쓴 것에 대한 해석이다. 『공양』과 『곡량』은 두 나라의 군주를 모두 나라를 잃은 군주로 해석하여 그 이름을 적었다고 했지만 신뢰할 수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등나라의 멸망은 장공 16년에 있었기 때문에 노나라의 사관이 이를 예지하여 썼을 리는 없고, 곡나라가 멸망한 때는 『춘추』와 『좌전』에 모두 기록이 없고 누구에 의해 멸망당했는지도 알 수 없다. 노나라 사관이 역사를 편찬할 때 이처럼 후에 멸망한 나라의 군주가 예방을 온 것을 쓴 사례, 즉 주공州公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노나라에 예방을 와서는 끝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던지, 기후가 예방을 왔지만 끝내 제나라에게 멸망당했다 등에서 모두 그 이름을 적고 있지 않다. 유독 곡백과 등백에 대해서만 이름을 적고 있으므로 『공양』과 『곡량』이 억측을 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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