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정명正名論 (춘추좌전.8.2.2.)

위 목공이 손량부孫良夫, 석직石稷, 영상, 상금장向禽將에게 명하여 제나라를 침략하게 했고 제나라 군과 대치했다. 석자石子(석직)는 회군하고 싶었다. 손자孫子(손량부)가 말했다. “불가합니다. 군을 동원해 정벌에 나서 적과 마주쳤는데 퇴각한다면 장차 군주께 어떻게 보고하겠습니까? 싸울 수 없음을 알았다면 출정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제 기왕에 적과 마주쳤다면 일전을 벌이는 것이 옳습니다.” 

여름, (……). 

석성자石成子(석직)가 말했다. “패전하고도 그대는 지원군이 도착하길 잠시도 기다리지 않으니 병사들은 전멸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귀하는 군대를 잃고서 무엇이라고 보고하시겠습니까?” 모두 대답이 없었다. 또 말했다. “귀하는 나라의 경이니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치욕입니다. 귀하는 군대를 인솔해 퇴각하십시오. 제가 여기서 적을 막겠습니다.” 석성자는 대규모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말을 널리 군중에 퍼뜨렸다. 제나라 군대가 공격을 멈추고 국거鞫居(미상)에 주둔했다. 신축新築(하북성 위현魏縣의 남쪽)의 대부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손환자孫桓子(손량부)를 구원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위나라는 중숙우해에게 읍을 하사했지만 그는 이를 사양하고, 제후의 예에 해당하는 곡현曲縣을 자신의 집에 설치하고, 말에 반영繁纓을 장식하고 조견할 수 있게 청하였다.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뒷날) 중니가 이 얘기를 듣고 말했다. “애석하다. 더 많은 읍을 그에게 하사하는 것이 낫다. ‘기물’과 ‘명칭/이름’만은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군주가 장악해야 할 바의 것이다. 이름은 신을 드러내고, 신은 기물을 지키며, 기물은 존비와 귀천의 예를 드러내고, 예는 각자의 합당한 도리()를 실천하며, 도리는 이익을 생산하며, 이익은 백성을 편안케 한다. 이것이 정치의 큰 줄기이다. 만약 기물과 명칭을 남에게 빌려준다면 이는 그에게 정령을 주는 것과 같다. 정령을 잃으면 나라도 뒤따라 잃을 것이니 이를 막을 수 없게 된다.


원문

衛侯使孫良夫·石稷··向禽將師遇. 石子欲還. 孫子: 不可. 以師伐人遇其師而還將謂君何? 若知不能則如無出. 今旣遇矣不如戰也.

, ……

石成子: 師敗矣子不少須衆懼盡. 子喪師徒何以復命?皆不對. 又曰: , 國卿也. 隕子辱矣. 子以衆退我此乃止.且告車來甚衆. 師乃止次于鞫居. 新築仲叔于奚孫桓子桓子是以免.

人賞之以邑請曲縣·繁纓以朝. 許之.

仲尼聞之曰: 惜也不如多與之邑. 唯器與名不可以假人君之所司也. 名以出信信以守器器以藏禮禮以行義義以生利利以平民政之大節也. 若以假人與人政也. 政亡則國家從之弗可止也已.” 




관련 주석

衛侯使孫良夫·石稷··向禽將: 두예의 주석에 근거하면, 손량부孫良夫는 손림보孫林父의 부친이다. 석직石稷은 석작石碏 4대손이다. 영상은 영유寗兪의 아들이다. 영상의 “상”의 구독은 거성이다. 상금장向禽將의 금장은 이름이다. 어떤 이는 “상금”을 성명으로 보고 장자는 별도로 읽는다고 했지만 정확하지 않은 주장같다. 「위세가」: “목공 11년 손량부가 노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제나라를 정벌했다.” 사마천은 이번 출정을 노나라를 구원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師遇: 양국 군대가 만난 곳에 대해 『좌전』은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제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정벌한 후 돌아가는 중이었다면 길을 돌아 위나라의 신축까지 갈 필요는 없다. 『휘찬』은 두 나라의 군사가 조우한 곳이 신축이라고 주장하며 “사정을 고려할 때, 아마 제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일으킨 군사는 위나라의 영역 내에 있었는데, 노나라를 정벌한 제나라가 승기를 잡자 위나라까지 연이어 공격하여 양군은 신축에서 만나 전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통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제나라가 진짜 위나라를 공격한 것이라면 위나라의 장수 석직이 퇴군을 주장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다음의 두 가지 주장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첫째, 두 나라 군사가 조우한 곳은 신축이 아니라 제나라와 위나라 경계지역이다. 제나라는 자신의 군대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위나라 군사를 만나서 그들을 압박하여 후퇴시키고 그 뒤를 쫒은 후 신축에서 회전을 한 것이다. 둘째, 조우한 곳은 신축이지만 그 곳은 위현의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 경계지역에 있었다. 왕부지의 『패소』는 신축은 “제나라와 위나라의 경계지역이다”라고 설명하고, 현 산동성 혜민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근거한 바가 오류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결론 역시 믿을 수 없다. 또 혜민현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두 나라 군사가 반드시 그 곳을 경유해야 했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제나라와 위나라의 경계지역이다”라는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라 말할 수는 없다.

石子欲還. 孫子: 不可. 以師伐人遇其師而還將謂君何?: 군주 앞에서 어떻게 복명할 것인가?

若知不能: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의 뜻.

則如無出: 는 응당. 구법은 『좌전·희공22년』의 “만약 거듭 상처를 입히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면 애초에 상처를 입히지 말았어야 합니다(若愛重傷, 則如勿傷)”와 같다.

今旣遇矣不如戰也.: 주석 없음.

, ……: 원문이 탈락된 것이 있다. 이 단락은 문맥 상 신축의 싸움에 대해 기술해야 옳다. 신축의 싸움은 여름 4월에 있었기 때문에 “하”자가 여름이라는 뜻은 알 수 있다.

石成子: 석성자는 석직이다.

師敗矣子不少須衆懼盡: 는 기다리다. 손량부가 잠시 구원군의 도착 등을 기다리지 않고 적과 대치하여 갑자기 후퇴하게 된다면 모든 군사가 섬멸당할까 걱정했다. 유월의 『평의』에 근거한 설명이다. 장병린의 『독』은 “수”를 후퇴로 풀이했지만 정확하지 않다.

子喪師徒: 앞의 “衆盡”과 같다.

何以復命?皆不對: 손량부 등 모든 사람이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들은 그곳에서 방어한다는 것에 조금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又曰: , 國卿也. 隕子辱矣: 자를 『설문』에선 “운”으로 인용하고, “잃는 것이 있다(有所失也).”라고 풀이했다. 운을 실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말은 손량부를 향해 한 말이다. 멈춰서 저항하면 죽거나 포로가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당신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치욕이다”라고 말했다. 석직은 다른 장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적을 저지할 생각이 없음을 보고 다시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

子以衆退, 我此乃止: 내가 이 곳에서 제나라 군사를 저지하겠다. 我此乃止”는 “我乃止此”의 변구이다.

且告車來甚衆: 는 연사이다. 『좌전·선공2년』의 “싸우며 밖으로 도망쳤다(鬭且出), 『좌전·성공13년』의 “적과 호응하면서도 증오하다(狄應且憎)”의 차자의 용법과 같다. 는 신축을 지원한 군대의 전차를 말한다. 이는 석직이 저항을 그칠 수는 없고, 또 원군의 전차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군중에 알려 병사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師乃止次于鞫居: 제나라는 위나라 군사가 잠시 멈추고 후퇴한 후, 다시 저항하려는 것을 봤고, 또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전진하지 않았다. 국거鞫居 『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현 하남성 봉구현封丘縣이다. 그러나 봉구현은 신축에서의 거리나 위나라 도읍 제구(현 복양현 서남쪽)에서의 거리가 비교적 멀다. 또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제나라 군사의 행군 목적지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확정짓지 않은채로 두는 것이 옳다.

新築仲叔于奚孫桓子환자는 손량부이다신축인이란 곧 신축의 대부이다.

桓子是以免『가자·심미편』“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자숙손우해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 군사를 맞아 크게 무찔렀다.” 숙손우해는 곧 중숙우해이다제나라 군사가 대패했지만 『좌전』은 기술하지 않았다.

人賞之以邑“기”는 “기이旣而”이다『좌전·문공원년』“초 성왕은 상신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그후() 다시 왕지직을 태자로 세우려했다.” 「주어상」“영공이 약용하면 주나라는 필패다그후() 영공은 경사가 되었다.” 여러 “기”자가 모두 이 용법이다『가자·심미편』“위나라는 이 때문에 온 땅을 상으로 하사했다.


전국시대 증후을편종



請曲縣·繁纓以朝: “현”은 “걸다()”과 같다. 종이나 경 등의 악기를 막대에 걸어 놓는 것이다. 고대에 천자는 악기를 사방에 걸어 놓아 마치 궁실의 사면에 마치 벽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궁현宮懸”이라 부른다. 제후들은 남쪽에는 악기를 두지 않고 삼면에 걸었는데 이를 “헌현軒縣 혹은 “곡현曲縣”이라 부른다. 자는 고대에 “ ”로 썼는데, 이는 사방의 한 면이 빈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부는 좌우에만 악기를 걸어 놓는데 이를 “판현判縣”이라 부른다. 사는 동면 혹은 계단 사이에 걸어 놓는데 이를 “특현特縣”이라 한다. 중숙우해는 “곡현”을 요청했다. 이는 대부로서 제후의 예를 참람되게 사용하려 한 것이다. 나머지는 『주례·춘관·소서』의 『정의』에 설명이 자세하다. 의 음은 반이다. 『설문』에서 “번”으로 쓴다. 말갈기 앞의 장식이며 역시 제후가 사용하는 예다. 『주례·춘관·건거』손이양의 『정의』에 상세하다.

許之: 주석 없음.

仲尼聞之曰: 惜也不如多與之邑. 唯器與名: “기”는 “곡현”과 “번영” 등의 기물을 가리키고, “명”은 당시의 작호爵號를 가리킨다.

不可以假人君之所司也: “기”와 “명”은 모두 인주가 장악하여 지휘하고 신하와 백성을 통치하는 기구로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다.

名以出信: 어떤 작호가 있다는 것은 모종의 위신을 부여한 것과 같다.

信以守器: 어떤 위신이 있다는 것은 그가 획득한 기물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器以藏禮: 각종 기물을 제정하여 존비와 귀천을 표시하는 것이 당시의 예를 체현하는 것이다.

禮以行義: 의는 예를 따라 실천된다.

義以生利: 의를 실천한 후에야 대중의 이익을 생산할 수 있다.

利以平民: 다스리다. 『맹자·이루하』의 “군자가 그 정치를 잘 다스린다면(君子平其政)”으로 입증할 수 있다. 平治”로 연이어 쓸 수도 있다. 『맹자·공손추하』의 “대저 하늘은 아직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夫天未欲平治天下也)”로 입증할 수 있다.

政之大節也. 若以假人與人政也. 政亡則國家從之弗可止也已.: 『공자가어·정론해』에 이 일화가 기재되어 있다. 대체로 내용이 같다. 『가자·심미편』에 이 일화가 기재되어 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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