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趙武 (춘추좌전.8.8.6)

진의 조장희趙莊姬(조동과 조괄에 의해) 조영이 축출된 일로 (8.5.1.) 경공에게 두 사람을 참소하여 말했다. “원(조동)과 병(조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난씨와 극씨가 증인이 되었다

6, 진나라는 조동과 조괄을 토벌했다. 조무趙武는 조장희를 따라 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조씨의 재산을 기해祁奚에게 하사했다. 한궐이 경공에게 아뢰었다. “성계成季(조최)의 공로와 선맹宣孟(조돈)의 충성에도 조씨에 후사가 없게 된다면 선을 행하는 신하들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삼대의 영명한 왕들은 모두 수백 년간 하늘의 복을 받았습니다. 허나 어찌 그 후손들 중에 포악한 군주가 없었겠습니까? 모두 선대의 영명한 덕에 의지하여 화를 면한 것입니다. 『주서』에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덕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에 조무를 조씨의 후계로 세우고 조씨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원문

晉趙莊姬趙嬰之亡故譖之于晉侯: ·將爲亂.·爲徵. 六月趙同·趙括. 姬氏畜于公宮. 以其田與祁奚. 韓厥言於晉侯: 成季之勳宣孟之忠而無後爲善者其懼矣. 三代之令王皆數百年保天之祿. 夫豈無辟王? 賴前哲以免也. 周書: 不敢侮鰥寡’,所以明德也.乃立, 而反其田焉.


관련 주석

晉趙莊姬趙嬰之亡故: 장희는 진 성공의 여식이다. 조영은 성공 5년에 축출되었다.

譖之于晉侯: 문맥을 보면 원동과 병괄을 가리킨다.

: ·將爲亂.·爲徵: 난씨와 극씨는 장희의 참소에 대해 증인이 되었다.

六月趙同·趙括: 「진세가」: “조동과 조괄을 주살하고 일족을 멸했다.

姬氏畜于公宮: 금택문고본엔 “무”자 앞에 “조”자가 있다. 조무는 조삭과 장희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다. 희씨는 장희이다. 공궁은 진 경공의 궁궐이다. 진 경공은 조무의 외삼촌이 된다. 조무가 왜 진 경공의 궁에서 키워졌는지에 대해, 만사대는 『학춘추수필』에서 「조세가」에 기록된 도안가가 조씨를 멸한 사건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영공의 적 조돈의 죄를 다스렸다(靈公之賊致趙盾)”는 말은 『좌전』에 기록된 것과 부합하여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당시 장희가 동과 괄을 참소하여 주살하고 아울러 영공과 관련된 사건(靈一獄)을 치죄했고 조돈까지 언급하여 그 가문을 멸하고자 했다. 무는 당시 매우 어려서 모친을 따라 궁궐에 숨겨져서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심흠한의 『보주』는 『좌전·선공2년』의 기사를 근거로 조돈이 조괄을 공족대부로 삼아 조씨 종족의 주인이 되게 했다. 이때 조괄이 피살당하여 조씨 종족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한궐이 “조씨의 후손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전에 조무는 조괄에 의지했었는데 조괄이 죽자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모친을 따라 외가에서 길러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두 설명 모두 다 신뢰하기는 어렵다.

以其田與祁奚: 씨족의 주요 재산이다. 조씨가 멸족 당했고, 오직 조무만이 공궁에 숨겨져 화를 면했다. 그래서 조씨의 토지는 경공에게 몰수되었고, 타인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기해祁奚 고량백高梁伯 아들이다. 『여씨춘추·거사편』과 「개춘편」의 고유의 주석을 보면, 그의 자는 황양이다. 우성오의 「진기해자황양해」(『문사』제5)에선 열 다섯 명의 학자의 주장을 모아 놓았는데 나름 일리가 있다. 『좌전·양공21년』에선 그를 “기대부祁大夫”라고도 호칭한다. 기는 진의 읍이며 그 옛성은 현 산서성 기현祁縣 동남쪽이다.

韓厥言於晉侯: 成季之勳: 성계는 조최趙衰이고 진 문공을 보좌한 공로가 있다.

宣孟之忠: 선맹은 조돈이다. 「진어6」에 지무자의 말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 역시 “선자의 충성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한다. 즉 당시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조돈에게 충이라는 호칭을 허락했음을 알 수 있다.

而無後爲善者其懼矣. 三代之令王皆數百年保天之祿. 夫豈無辟王?: “피”는 “벽”과 같고 나쁜邪僻.

賴前哲以免也: 전철은 선대의 훌륭한 군주.

周書不敢侮鰥寡: 『상서·강고康誥』의 문구.

所以明德也.: 『좌전·성공17년』의 기사에 근거하면, 한궐은 어릴 적에 조돈에게 양육되었기 때문에 조씨를 위해 진언했다.

乃立, 而反其田焉: 「조세가」는 조씨의 멸족과 조무의 복립을 기재하고 있다. 모두 전국시대 전해진 얘기를 채록한 것인데 『좌전』과 『국어』의 내용과 상이하고 역사적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조세가」에 따르면, 한궐은 진 경에게 조무를 조씨의 가주로 다시 복권할 것을 권한 시기는 사건 후 2년 후인 경공이 병으로 사망한 때가 된다. 그러나 「년표」는 “조무에게 조씨의 재산을 돌려주고 복권했다”는 기사를 이 해에 쓰고 있다. 「진세가」는 이 사건을 『좌전』에 근거하여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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