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순장, 화원과 악거 (춘추좌전.8.2.4.)

8월 (임오일 27), 송 문공이 타계했다. 이때 오랜만에 호화로운 장례를 치렀는데, 생석회와 숯을 묘혈에 두어 습기를 막고, 수레와 말을 법도보다 더해 매장했으며, 또 오랜만에 사람을 순장하고 많은 기물을 갖추었다. 곽에 네 기둥을 세웠고, 관의 좌우와 위 모두 장식을 했다

군자가 화원과 악거에 대해 평하였다. “이때 화원과 악거는 신하답지 못하였다. 신하란 군주의 혼란과 의혹을 제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한다. 지금 두 사람은 군주의 생전에는 그의 미혹을 방치하고, 죽어서는 사치를 더했으니 이는 군주를 악의 구렁텅이에 내던진 것이다. 어찌 신하라 할 수 있겠는가?


원문

八月宋文公始厚葬用蜃·益車·始用殉重器備. 椁有四阿棺有翰·.

君子謂華元·於是乎不臣. 治煩去惑者也是以伏死而爭. 今二子者君生則縱其惑死又益其侈是棄君於惡也何臣之爲?


관련 주석

八月宋文公: 아들 공공共公이 뒤를 이었다.

始厚葬用蜃·: 음은 신이고 큰 민물조개이다. “신탄蜃炭”을 두예는 한 가지 사물로 봤는데 조개를 태운 후 남은 재라고 말했다. “신탄”이 한 단어로 쓰인 예는 『주례·추관·적발씨』에도 보이는 바 두예의 풀이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영달의 『소』는 유현의 주장을 인용하여 “조개껍질을 사용하고 다시 그 뒤에 숯을 사용했다”고 하여 “신탄”을 신과 탄 두 가지 사물로 보고 있다. 다음 글 “거마車馬”가 두 가지 사물임을 볼 때 유현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신”은 조개껍질을 태운 뒤의 잔재, 즉 생석회이다. 그리고 “탄”은 목탄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묘혈에 두어 습기를 막는 데 사용한다. 『여씨춘추·절상편』은 당시 부자들의 화려한 장례식에 대해 “돌을 쌓고 목탄을 쌓아서 묘 주위를 두른다”고 말하고 있어 관곽의 외부에 목탄을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상층 계급의 관습이었다. 그런데 신탄을 사용하는 예는 『주례·지관·장신』에만 보이는데 이는 천자만 사용하는 예이다. 본문에서 “후장”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실제 발굴 현장으로 고증하면 장사 마왕퇴2호 한묘에서도 숯을 사용하고 있다. 『진서·서계용재기하』에 석호石虎 발굴한 춘추시대 조양자의 묘에 “발굴 초기에 숯을 얻었는데 깊이가 일장 여 정도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신과 탄이 두 개의 사물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한서·혹리전』에 상인과 부유층이 매장할 물건들을 매점한 것 중에 목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위지문제기』에 조비의 「종제終制」가 기재되어 있다. 매장에는 탄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한나라 위나라 이후로 장례에 모두 탄이 사용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관곽


益車·: 고대 천자와 제후들은 전차와 말을 함께 매장했다. 신촌 서주묘를 보면 갱 속에서 말의 뼈 72, 수레 12량이 발견되었다. 서주시대 말 춘추 초기의 상촌령 괵국의 묘에선 괵태자의 묘에서 수레 10량 말 24필이 발견되었고 기타의 묘에서는 수레 5, 10필이 발견되었으며, (미발굴된) 소거마갱에선 수레와 마기馬器가 하나 있는 것, 수레와 마기가 3개 있는 것이 있는데 모두 등급에 따라 매장된 물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실제의 말과 수레가 매장된 사례가 이미 발굴되어 이에 대한 증거가 확실하다. 공영달의 『소』에선 『예기·단궁하』의 “흙으로 만든 수레와 풀로 만든 인형(芻靈추령)이 고대로부터 있었다”는 구절로 근거로 매장된 말과 수레가 흙으로 구운 수레나 풀로 만든 말로 보고 있지만 신뢰하기 어렵다.

始用殉: 산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상나라 시대에 가장 심했다. 『광명일보』1950 3 19일 『학술』부간에 곽보작의 「기은상순인지사실」이라는 글이 있는데, 일전형 대묘에 순장한 사람의 수가 400명이 넘는다는 내용을 기술했다. 그후 지하에서 발굴된 사실 역시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서주이후 생산력 제고라는 이유 때문에 노예의 잉여 노동력이 감소될 수 있기 때문에 점차 산 사람을 매장하는 풍속은 쇠퇴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본문의 “순장이 처음 시행되었다”는 말은 아마 송 문공 이전에는 송나라에서 순장한 예가 없었다는 것 같은데, 송나라 땅은 중원에 위치하고 또 은나라의 후예이기 때문에 왜 이때에 “처음 순장이 시행되었다”라는 말이 가능한지는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발굴 성과를 통한 진일보된 증명을 기대해야 한다.

重器備: “중”은 기존에 평성으로 읽었다. 두예: “중 많다.” “기비”는 용품을 가리킨다. 『좌전·양공5년』의 “금과 옥을 저장하지 말고 많은 기물을 준비하지 말라(無藏金玉, 無重器備)”는 문구로 입증할 수 있다. 『좌전·양공9년』의修器備”의 기비는 군용 물품을 가리킨다. 각종 용품을 고대에 다수 매장용품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송 문공의 수장용품이 특별히 많았던 것이다.

有四阿: “사아四阿”는 본래 고대의 천자의 궁실종묘의 건축양식이다. 묘혈 역시 이런 종류의 양식을 채택하여 곽에 시행했기 때문에 “有四阿”라고 말한 것이다. “사아”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손이양의 『주례·고공기·장인』의 “사아중옥四阿重屋”의 『정의』의 해석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 有四阿에 대해 논한 것을 보면, 고대에 외관의 곽을 만드는 방법과 후대의 것은 서로 다른데, 관의 사방 주위에 장방형의 목재를 차례로 쌓아서 만든다. 『의례·사상례』에 따르면, 곽을 잘 쌓은 후에 다시 갱목을 얹는데 가로로 3개 세로로 2개를 쌓는다. 그후 자리를 만들고 흙으로 덮게 되면 사의 곽은 평평하게 된다. 천자의 곽 역시 관의 사방에 목재를 쌓고 관의 목재와 높이를 고르게 하고 이어 위에 겹쳐 쌓는다. 쌓으면서 사각형이 점점 축소되고 사면은 제방처럼 되는데 마치 집을 지을 때 “사방에 기둥을 세운(四阿)” 것처럼 되는 양식이다. 일정한 높이에 다다르면 다시 비교적 작은 사각형 형태의 위에 갱목을 걸치고 깔개를 놓는다.

棺有翰·: 두예의 주석에 근거하면, 관목의 옆 장식이다. 관목 위의 장식으로서 모두 천자의 예이다. 대체 형상과 재료가 어떠했는지는 현재로선 상고할 수 없다. 송 문공은 내년 2월에서야 장례를 치른다. 사망에서부터 7개월 후이다. 『예』에 따르면 천자가 7월장이고 제후는 5월장이다. 송 문공의 이런 후장을 보면 천자의 예를 따른 것임을 볼 수 있다. 『여씨춘추·안사편』: “송나라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동총이 드러났다.” 고유는 이에 대해 “동총”은 송 문공의 묘라고 주석했다. 이를 신뢰한다면 송 문공의 묘는 후장으로 인해 끝내 도굴된 것이다.

君子謂華元·於是乎不臣: 악거는 당시 송나라의 집정대신이다. 그러나 『좌전』에는 겨우 한 차례 언급된다.

治煩去惑者也: 『역림·귀매지대유』: “밤을 틈타 노닐다(依宵夜遊), 군주와 조우한다. 근심과 의혹을 해소하여 마음에 근심이 없게 한다(除解煩惑).『려지소우』 역시: “밤을 틈타 놀다 대신과 함께 하다. 번뇌와 의혹을 없애고(除解煩惑) 나로 하여금 근심을 잊게 한다.” 모두 “除解煩惑”을 사용하는데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번뇌와 근심”으로 사용했지만 본래의 뜻과 꼭 부합하진 않는다. 본문의 번은 마땅히 “란”의 뜻이다. 『주례·고공기·궁인』 정현의 주석: (, 亂也).” 어지럽기 때문에 다스려야 한다.

是以伏死而爭. 今二子者君生則縱其惑: “종기혹”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두예는 문공 18년 동모제 수를 죽인 일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문공 16년 송 소공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모두 신뢰할 만하지 않다.

死又益其侈是棄君於惡也何臣之爲?: 爲何臣之”의 도치이다. 『경전석사』2에선 何臣之有 해석하는데 역시 통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