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新田, 진나라의 천도 (춘추좌전.8.6.5.)

진나라가 수도 고강故絳의 천도를 논의하자 여러 대부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순과 하의 땅에 거처해야 합니다. 땅이 기름져 풍요하고 염지 가까워 나라에 이롭고 군주께 편안한 곳이므로 이곳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한헌자는 당시 신중군의 장수였고, 또 궁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복대부僕大夫 자리에 있었다. 경공이 조회를 마치고 신하들에게 읍하여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헌자가 그 뒤를 따랐다

경공이 노침의 뜰에 서서 헌자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그가 대답했다. “그 곳은 아니됩니다. 순과 하씨의 땅은 척박하고 하천은 얕아 오물이 쉽게 쌓입니다. 오물이 쉽게 쌓이면 백성들이 걱정하고 근심거리가 많아지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이 때문에 풍습과 부종이 발생합니다. 신전新田(산서성 후마시)이 낫습니다. 그 곳은 토양이 두텁고 하천도 깊어 백성이 거주해도 질병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분수와 회수가 있어 오물이 흘러가고 또 그곳 사람들은 교화를 잘 따르니 먼 훗날에도 나라에 이로울 것입니다. 무릇 산택과 숲과 염지는 나라의 귀한 보배입니다. 나라에 물자가 풍부하면 백성들이 교만해지고 게을러집니다. 국인이 이런 풍요로운 물자를 가까이하면 농사에 태만해져 공실이 가난해지니 군주의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경공은 그의 주장을 옳게 여기고 따랐다. 여름 4월 정축일(13), 진나라는 신전으로 천도했다.


원문

人謀去故絳諸大夫皆曰: 必居·瑕氏之地沃饒而近國利君樂不可失也.韓獻子將新中軍且爲僕大夫. 公揖而入. 獻子. 公立於寢庭獻子: 何如?對曰: 不可. ·氏土薄水淺其惡易覯. 易覯則民愁民愁則墊隘於是乎有沈溺重之疾. 不如新田, 土厚水深居之不疾·以流其惡, 且民從十世之利也. 夫山···國之寶也. 國饒則民驕佚. 近寶公室乃貧. 不可謂樂.公說從之. 夏四月丁丑遷于新田.


관련 주석

人謀去故絳: 진은 이후로 신전新田으로 천도하였고, 신전 역시 강이라고 호칭했다. 그래서 옛 국도를 고강으로 쓴 것이다. 강에 대해선 『좌전·은공5년』의 주석을 참조.


춘추좌전 지도 - 신전 천도


諸大夫皆曰: 必居·氏之地: 앞서 『좌전·희공24년』의 주석에 언급. 는 『좌전·희공30년』의 주석 참조. 진의 국도의 면적이 매우 커서 그 전부를 구획할 수는 없다. 여기서 “순과 하의 땅”이라고 말한 것은 그 일부분을 택하여 말한 것이다. 두예는 순과 하를 진의 옛 나라 이름이라고 설명했지만 옳지 않다. 방준익의 『철유재이기고석』권9에서 이미 이에 대해 반박했다.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중국역사지도집』에선 현재의 산서성 예성현芮城縣의 남쪽이라 한다. 강영의 『고실』은 『좌전·문공13년』에 언급되는 진 대부 첨가詹嘉 읍이며 현재의 하남성 섬현陝縣의 남쪽 40리 떨어진 곳이라고 주장한다.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했다. 『전국책』에서 누차 초·곡옥曲沃을 언급하고 있는데, 는 곧 곡옥임을 알 수 있다. 영실현靈實縣 동쪽에 곡옥진이 있다. 음은 순이고, 『일통지』에 따르면 현재의 산서성 임의현臨猗縣 서남쪽이다.

沃饒而近: 염지鹽池이다 오늘날은 해지解池라고 부른다. 『목천자전』의 “염에 도달해서(至于)”에 대해 『설문』은 “염은 하동河東 염지鹽池이다”라고 풀이했다. 이들로써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國利君樂不可失也.韓獻子將新中軍且爲僕大夫: 복대부는 옛 주석에서 모두 『주례·하관』의 대복지관大僕之官 해당하고 궁중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관리라고 설명했다.

公揖而入: 진 경공과 그 신속들이 조례를 마치고 로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다. 당시의 예를 보면, 제후는 삼문과 삼조가 있는데, 첫 번째 중문 안쪽을 외조外朝, 두 번째 중문 안을 치조治朝라고 하며, 세 번째 대문이 노문이고 그 안쪽을 연조燕朝라고 한다. 진 경공이 조회를 하는 곳은 치조가 아니라 외조이다. 전기錢綺『찰기』에선 천도를 토론하는 곳은 응당 외조여야 한다고 말한다. 공읍은 여러 신하들에게 한 것이지 한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다. 당시의 예에 따르면 군주가 조회를 할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읍을 한 후 퇴장한다.

獻子: 한궐은 그때 복대부를 겸하고 있었다. 『주례·사사司士』와 「대복大僕」에 따르면, 신하들이 퇴장한 후 대복은 군주를 인도하여 퇴조한다. 그래서 진 경공이 내조로 들어올 때 다른 신하들은 모두 물러나 흩어지고 한궐만이 따라 들어온 것이다. 고염무의 『일지록』217에선 “복대부는 군주의 근신이기 때문에 홀로 군주를 따라서 침정으로 들어온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즉 친신으로 해석한 것인데 『좌전』의 뜻은 아니다.

公立於寢庭: 침은 노침이며 정침이라고도 한다. 군주가 일반적으로 정사를 돌볼 때 이곳에서 하며, 재계하고 질병에 걸렸을 때도 역시 이곳에 거처한다. 침정은 노침밖의 정원이다.

獻子: 何如?對曰: 不可. ·氏土薄水淺其惡易覯: 오염되고 불결한 것. 고염무의 『보정』과 무억의 『의증』에 설명이 자세하다. 두예는 구를 보이다(遇見)로 해석했다. 가차자로 해석할 수 있다. 『시·소아·사월』의 “(我日構禍)”에서 구는 이룸·결합·결합 뜻이다. 다음에 나오는 “오물을 흘려보냄(流其惡)”과 정반대의 뜻이다.

易覯則民愁民愁則墊隘: 『좌전』에서 “점애”를 세 차례 쓰는데 모두 몰골이 파리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 외 양공 9년의 “숱한 고생으로 몰골이 파리해지다(辛苦墊隘)”와 25년의 “시간이 지나니 몰골이 파리해졌다(久將墊隘)” 등이 있다. 두예는 이 세 곳에서 모두 해석이 다른데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다.

於是乎有沈溺重之疾: 침닉沈溺 풍습병이다. 요즘말로 “종”자로 쓴다. 의 음은 추이고 다리의 종기를 말한다.

不如新田: 신전新田은 현재의 후마시侯馬市이다. 고강에서 50리 떨어진 곳이다.

土厚水深居之不疾·以流其惡: 분수는 신전의 서북쪽을 흐른다. 회수는 신전을 관통하여 분수로 합류된다.

且民從: 백성들이 복종에 길들여 질 수 있다.

十世之利也. 夫山···國之寶也. 國饒則民驕佚: 「노어하」에 공보문백의 모친이 “옛날 성왕들은 백성들의 거주시킬 때, 척박한 곳을 골라 백성들이 힘써 노력하게 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의 왕노릇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노동하며 생각하고, 생각하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면 게으르면 음란해지고, 음란해지면 선함을 망각하게 되며 이렇게 되면 악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옥토에 사는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아 게을러지게 됩니다.” 한궐의 말과 비교 참조할 만하다. 이는 앞의 전과 순의 땅이 옥요함의 이점을 말했던 신하들을 반박한 말이다.

近寶公室乃貧: 신하들의 “근염”을 반박했다. 국도가 산림수택에 가까우면 왜 공실이 가난해지는 것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공영달의 『소』는 국도가 물자가 풍요로운 곳에 가까우면 백성들이 모두 농사를 버리고 상업에 뛰어들어 빈부의 차가 현격해진다. 가난한 자는 관부에 공급할 것이 없게 되고, (상업) 부자는 많이 징수할 수 없어 국가의 부세가 이로 인해 감소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不可謂樂.公說從之. 夏四月丁丑: 정축일은 13일이다.

遷于新田: 만약 진의 시조 당숙이 태원시에 봉건받은 것이 아니라면 진나라는 전후로 네 차례 천도했는데 모두 평양平陽(현 임분현臨汾縣 서남쪽)의 주변 150리 이내에서였다. 현 익성현翼城縣 동남쪽 35리이다. 곡옥曲沃 문희현聞喜縣 동북쪽이고 익에서 약 150리 떨어졌다. 고강은 현 분성현汾城縣 남쪽이고 신강의 북쪽이다. 동쪽으로 익과 약 100리 거리이다. 신전은 후마시로서 익에서 수 십리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다.


👉 참고 포스팅: '도'와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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