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여공 복귀 - ‘요妖’ - 3.14.2.
3.14.2. 역櫟(하남성 우현禹縣)에 머물던 정 여공이 국도를 공격해 대릉大陵(밀현密縣과 신정新鄭의 사이)에 이르렀고 부하傅瑕를 사로잡았다. 부하가 말했다. “저를 풀어주시면 군주의 복위를 돕겠습니다.” 그와 결맹한 후 사면했다. 6월 갑자일(20일), 부하가 정자(자의)와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국도로 들였다.
애초, 궁 안의 뱀과 궁 밖의 뱀이 정나라 도성 남문에서 싸웠는데 궁 안의 뱀이 죽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여공이 복위했다. 노 장공이 뱀의 얘기를 듣고 신수에게 물었다. “정말 ‘요妖’라는 것이 존재하오?”
“사람이 꺼리는 바의 기운이 불같이 일어나 ‘요’가 발생합니다. ‘요’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사람에 틈이 없다면 ‘요’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상심을 잃으면 ‘요’가 일어나니 ‘요’의 발생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여공이 국도로 들어와 곧바로 부하를 죽였다. 원번原繁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부하는 두 마음을 지녔소. 주나라에는 상형이 있으니 그는 그 죄를 치른 것이오. 나를 인정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에겐 모두 상대부의 직무를 맡길 것이오. 나는 백부와 함께 이 일을 의논하고 싶소. 그런데 과인이 밖에 머물 때 백부는 내게 나라 안의 상황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소. 복위한 후에도 과인을 염려해주지 않으니 매우 유감이오.”
원번이 대답했다. “선군 환공께서 저의 선조를 전사종석典司宗祏에 임명하여 종묘의 신주를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사직에 주인이 있는데 밖으로 마음을 돌린다면 이보다 더 큰 두 마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로 사직을 주관하는 자가 있다면 이 나라의 어느 누가 그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하늘의 법도입니다. 자의가 재위한 지 이미 14년이니 군주의 복귀를 모의한 이들을 어찌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공의 아들이 아직 여덟이나 남아 있고 그들 모두가 관직과 작위를 뇌물로 삼아 딴 마음을 품도록 권하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데 군주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은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곧 목을 매 자결했다.
원문
鄭厲公自櫟侵鄭,及大陵,獲傅瑕. 傅瑕曰: “苟舍我,吾請納君.” 與之盟而赦之. 六月甲子,傅瑕殺鄭子及其二子,而納厲公. 初,內蛇與外蛇鬬於鄭南門中,內蛇死. 六年而厲公入. 公聞之,問於申繻曰: “猶有妖乎?” 對曰: “人之所忌,其氣燄[1]以取之. 妖由人興也. 人無釁焉,妖不自作. 人棄常,則妖興,故有妖.” 厲公入,遂殺傅瑕. 使謂原繁曰: “傅瑕貳,周有常刑,既伏其罪矣. 納我而無二心者,吾皆許之上大夫之事,吾願與伯父圖之. 且寡人出,伯父無裏言. 入,又不念寡人,寡人憾焉.” 對曰: “先君桓公命我先人典司宗祏. 社稷有主,而外其心,其何貳如之? 苟主社稷,國內之民,其誰不爲臣? 臣無二心,天之制也. 子儀在位,十四年矣; 而謀召君者,庸非二乎? 莊公之子猶有八人,若皆以官爵行賂勸貳而可以濟事,君其若之何? 臣聞命矣.” 乃縊而死.
[1]“염燄”은 『당석경』과
『금택문고』본에는 모두 “염炎”으로 쓴다. 『한서·오행지』와 「예문지」, 그리고
왕부의 『잠부론』에서 인용할 때도 “炎”으로 쓴다. 『교감기』에서도 “炎”을 올바른 글자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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