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전. 초 무왕, 등나라와 우나라를 공격하다

2.9.2. 나라의 군주가 한복韓服을 초나라에 파견하여 등나라와 화친을 맺을 수 있도록 부탁했다. 초 무왕이 도삭道朔에게 파나라의 사신을 대동하고 등나라를 예방하게 하였는데, 등나라 남쪽 변방의 우나라가 그들을 공격하고 예물을 탈취했으며, 도삭과 파나라의 사신을 죽였다. 초 무왕은 위장薳章을 파견해 등나라를 문책했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

여름, 초나라가 투렴鬬廉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파나라 군대와 함께 우나라를 포위하게 했다. 등나라의 양생養甥과 담생聃甥이 군사를 이끌고 우나라를 구원했다. 파나라 군사를 세 번 추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투렴이 초군을 파군의 중앙에 횡렬로 배치하고 싸움이 벌어지자 패배한 척 도망쳤다. 등나라는 그 뒤를 추격하자 배후에 파군이 있게 되었다. 파군과 초군이 등나라를 앞뒤로 협공했다. 등나라 군사가 대패했고, 우나라 군사도 밤에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원문

巴子使韓服告于, 請與爲好. 楚子使道朔客以聘於, 南鄙人攻而奪之幣, 道朔行人. 楚子使薳章讓於. 人弗受.

, 使鬬廉帥師及師圍. 鄧養甥·聃甥帥師救. 三逐, 不克. 鬬廉衡陳其師於師之中, 以戰, 而北. 人逐之, ; 而夾攻之. 師大敗. 人宵潰.



관련 주석 

巴子使韓服告于, 請與爲好: 국명으로 『좌전·소공13년』의 “초나라 공왕共王과 파희巴姬 땅에 묻었다”라는 기사에 근거하면 희성이다. 구설로는 사천성 중경시 강주江州에 옛성이 있다고 하고 이곳이 곧 파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좌전』의 기사를 살펴보면 파나라는 반드시 지리적으로 등나라와 가까워야 한다. 또『좌전·장공18년』의 “파인이 초나라를 배반하고 나처那處 토벌했다”는 기사나 『좌전·문공16년』의 파가 초나라의 군사를 따라 드디어 용나라를 멸망시켰다”라는 기사를 보건대, 필히 파국은 초나라의 서북쪽에 위치해야 맞다. 춘추 시대의 파는 현재의 호북성 양번시襄樊市 부근일 가능성이 있고, 기문夔門으로 천도한 것은 전국 시대의 일이다. 동서업童書業 『고파국고古巴國考』와 고힐강의 『사림잡식史林雜識·목서팔국牧誓八國』을 참조하라. 는 거성으로 우호의 뜻이다.

楚子使道朔客以聘於: 거성으로 이끌다/인솔하다의 뜻이다.

南鄙人攻而奪之幣: 음은 우이다. 고동고顧棟高 『대사표』에선 나라의 이름으로 보고 있다. 『방여기요方輿紀要』에 근거하면 우성鄾城은 현재의 호북성 양양襄陽 구성舊城 동북쪽 12리 떨어진 곳에 있다. 『좌전·애공18년』의 “파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고 우를 포위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서 우는 이미 그 당시 초나라에게 멸망되어 초나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상태였다. ’는 ‘’와 용법이 같다. 奪其幣 뜻이다. 폐는 예방에 사용되는 예물이다.

(이하 생략...) 


춘추시대 지도 - 등나라, 우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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