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 장공 서거

 2.11.3. 정 소공(공자홀)이 북융을 격퇴했을 때 제 희공은 그를 사위로 삼으려고 했지만 소공이 사양했다. 채중祭仲이 말했다. “반드시 취해야 합니다. 우리 군주께는 총첩이 많습니다. 외부의 큰 지원이 없으면 태자께서 즉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 공자 모두 군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여름, 정 장공이 타계했다.

애초,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동북쪽)의 봉인 중족仲足이 장공의 총애를 받았고 장공은 그를 경으로 삼았다. 그는 장공을 위해 등만鄧曼을 부인으로 취하게 하여 소공을 낳았다. 채중이 소공을 옹립한 까닭이다. 한편 송나라 옹씨雍氏의 여식이 정 장공에게 출가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옹길雍姞고 여공厲公을 낳았다. 옹씨의 일족은 송 장공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채중을 송나라로 유인하여 억류한 후 협박하였다. “돌(여공)을 옹립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옹씨는 여공까지 사로잡고 대가로 뇌물을 요구했다. 채중이 송인과 결맹하고 여공을 모시고 귀국하여 그를 군주로 옹립했다.

가을 9월 정해일(13), 소공이 위나라로 망명했고, 기해일(25) 여공이 즉위했다.




원문


鄭昭公之敗北戎, 人將妻之. 昭公. 祭仲: 必取之. 君多內寵, 子無大援, 將不立. 三公子皆君也.弗從鄭莊公 封人仲足有寵於莊公莊公使爲卿. 爲公娶鄧曼, 昭公. 祭仲立之. 宋雍氏女於鄭莊公, 雍姞厲公. 雍氏, 有寵於宋莊公故誘祭仲而執之: 不立將死.亦執厲公而求賂焉. 祭仲人盟厲公歸而立之秋九月丁亥昭公. 已亥, 厲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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