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유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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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여름, 항성이 보이지 않았는데 밤하늘이 밝았기 때문이다. 『춘추』의 “星隕如雨”는 유성이 비와 함께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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恆星不見夜明也. 星隕如雨與雨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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恆星不見: 항성은 늘 볼 수 있는 별이다. 『곡량』에 대한 양사훈楊士勛 『소』는 “주나라의 4월은 하력 2월이므로 그때 늘 볼 수 있는 별자리는 남방칠수”라고 설명한다

夜中星隕如雨: “운”을『공양』에선 “운”으로 쓴다. 두 글자는 서로 통가될 수 있다. 『공양』과 『곡량』은 모두 운석이 비처럼 내렸다(星隕似雨)고 쓰고 있고, 『좌전』은 “與雨偕”라고 풀이하여 “”를 “”로 봤다. 프랑스의 천문학자 장 밥티스티(Jean Baptiste: 1774-1862)는 『중국유성』에서 기원전 687 3 16일에 유성비가 발생했다고 기록했고, 아울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문고자리(天琴座)의 유성비를 기록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진준규陳遵嬀 『중국고대천문학간사』를 참조하라. 거문고자리 유성우란 즉 거문고자리 근처에서 발생한 유성우인데 중국 역사상 유성우에 관련된 기록은 총 180차례가 있고, 그 중 거문고자리 유성우는 대략 9차례이다

恆星不見夜明也: 유성 때문에 밤하늘이 밝았다는 뜻. 유성이 비와 함께 내려 밤하늘이 밝았다. 그래서 별자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항성이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星隕如雨與雨偕也: 『논형·설일편說日篇』에서 『좌전』을 서술할 때 “星霣如雨與雨偕也”로 쓴다. 두예 역시 “해”를 “함께()”의 의미로, ”는 “유성우와 함께()”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나라 영시2년 “2월 계미일 밤 유성과 함께 비가 내렸다(星隕如雨).”라는 기록이 있어서 『춘추』가 뜻한 바를 알 수 있게 한다. 왕벽지의 『수연담록·권9』에 북송시대 건륭建隆 경우景祐 때 두 차례 있었던 유성우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그때는 『공양전』의 의미(비처럼 유성우가)이지 『좌전』의 뜻(유성우가 비와 함께)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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