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공을 시해한 진의 경대부, 도공을 옹립하다 (춘추좌전.8.18.1.)


진 도공을 옹립하다


성공 18년 봄 왕력 정월 경신일(5), 진의 난서와 중항언이 정활程滑을 사주하여 여공을 시해하고, 수레 하나만 사용해 익성의 동문 밖에 매장했다

순앵荀罃과 사방士魴을 경사로 보내 주자周子를 영접하여 옹립했는데 그의 나이는 14세였다. 대부들이 청원(산서성 직산현稷山縣 동남쪽)에서 주자를 영접했다. 주자가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이르지 않기를 원했다. 비록 이 자리에 이르렀지만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군주를 원하는 까닭은 그로 하여금 명을 내리게 함이다. 군주를 세우고도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장차 군주를 어디에 쓸 것인가? 그대들이 나를 군주로 세울 것인지 아닌지 모두 오늘에 달렸다. 공경하고 군주의 명을 따른다면 신이 복을 내릴 것이다.” 신하들이 대답했다. “뭇 신하들이 원하는 바이니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경오일(15), 도공이 대부들과 결맹하고 진나라로 들어와 백자동伯子同의 집에 머물렀다. 신사일(26), 무궁武宮을 참배했다. 복종하지 않는 신하 일곱 명을 축출했다. 주자에겐 형이 있었지만 백치라 콩보리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주로 옹립할 수 없었다.


원문

(8.18.1.) 十八年春王正月庚申晉欒書·中行偃使程滑厲公葬之于東門之外以車一乘. 使荀罃·士魴周子于京師而立之生十四年矣. 大夫逆于. 周子: 孤始願不及此雖及此豈非天乎! 抑人之求君使出命也. 立而不從, 將安用君? 二三子用我今日否亦今日. 共而從君神之所福也.對曰: 群臣之願也敢不唯命是聽.庚午盟而入館于伯子同. 辛巳朝于武宮. 逐不臣者七人. 周子有兄而無慧不能辨菽麥故不可立.


주석


十八年春王正月庚申: 이것은 노나라 달력이고 진나라 달력으로는 지난해 12월이다.

晉欒書·中行偃使程滑厲公: 「진어6」과 『여씨춘추·교자편』, 『회남자·인간훈』에선 모두 난서와 순언이 진 여공을 장려씨의 집에 가두고 석 달 후에 죽였다고 말한다. 『좌전』의 내용으로 보면, 진 여공 17 12월에 사로잡혀 중간에 윤월이 있고 18년 정월에 피살되었으므로 3개월이 시간이 흘렀다. 「진세가」는 “여공은 갇힌 지 6일만에 죽었다.”고 쓰고 있어서 여러 문헌들이 서로 다르다.

葬之于東門之外以車一乘: 진 여공은 익에 머물 때 잡혔고, 피살 역시 익에 있을 때였다. 익은 진의 옛 도읍이다. 은공 5년과 환공 2년의 『좌전』주석을 참고하라. 본래 진나라의 군주들은 강에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주례·춘관·총인』에서는 “무릇 병기로 사망한 사람은 묘역에 장사지내지 않는다(凡死于兵者, 不入兆域)”라고 하여 고대에 피살된 군주는 그 일족의 묘지에 장례를 지내지 않았다. 진 여공은 익에서 사망했고 익에 묻혔다. 『좌전·양공25년』에 제나라의 최저가 제 장공을 살해한 후 장사를 지냈는데 당시와 비교할 때 의례 절차에 생략된 바가 있지만 그래도 그때는 “下車七乘”을 지켰고, 그에 대해 두예는 “제후의 장례는 칠승의 수레가 사용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공의 장례는 일승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두예는 “군주의 예로써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使荀罃·士魴周子于京師而立之: 사방士魴 사회의 아들이다. 그의 식읍이 체 있기 때문에 그를 체계彘季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어7」에서 그를 체공자彘恭子라고 부르는데 그의 시호가 공이다. 체는 본래 선곡의 식읍이었는데 선곡이 멸족된 후에 다시 사방에게 주어졌다. 체는 『좌전·선공12년』의 주석 참조. 주자는 지난해 『좌전』에 언급된 손주이다.

生十四年矣. 大夫逆于: 청원은 『좌전·희공31년』의 주석 참조.

周子: 孤始願不及此雖及此豈非天乎!: 군주가 된 것을 하늘에 돌리고 군신들이 추대한 힘이 아니라는 뜻을 표시한 것.

抑人之求君使出命也. 立而不從, 將安用君? 二三子用我今日否亦今日: 『좌전·성공16년』의 “진나라의 정치는 세력이 큰 여러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도공은 즉위 전 정권을 그들에게서 회수할 뜻을 보인 것이다.

共而從君神之所福也.: 두예: 『좌전』에선 도공이 어리지만 유능하여 스스로 지위를 견고하게 할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對曰: 群臣之願也敢不唯命是聽.庚午: 경오일은 15일이다.

盟而入: 「진세가」: “형계刑雞하고 대부와 맹세한 후 즉위했다.

館于伯子同: 백자동은 당시의 진나라 대부. 진 도공이 처음 입국할 때 백자동의 집에서 묵었다.

辛巳朝于武宮: 신사일은 26일이므로 경오일과는 11일 차이다. 공영달의 『소』는 복건의 본에 “신미”로 쓰여 있다고 인용하고 있다. 경오일 바로 다음날이다. 장림의 『경의잡기』, 이이덕의 『집술』, 전기의 『찰기』등은 모두 복건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 희공 24년 진 문공 역시 바로 다음날 무궁을 찾은 바 있다. 그러나 「진어7」과 「진세가」는 모두 “신사”일로 쓰지 “신미”라고 쓰지 않았다. 복건의 주장이 꼭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무궁에 대해선 『좌전·희공24년』의 주석 참조.

逐不臣者七人: 불신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여공을 패악으로 이끈 이들로서 당시의 도덕에 근거할 때 신하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여공의 무리로서 새로운 군주에게 복종하지 않은 이들이다. 두예는 “이양오의 무리”로 해석했다.

周子有兄而無慧: 두예: “불혜는 세간에서 말하는 백치이다.” 아마 두예가 근거한 판본에는 “무”자가 “불”자로 쓰여 있었던 듯하다.

不能辨菽麥故不可立: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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