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성彭城을 포위한 송나라 (춘추좌전.9.1.1.)

 


⊙ 춘추좌전.9.1.1. (주 간왕 14년, 진 도공 2년, 제 영공 10년, 초 공왕 19년)


팽성을 포위하다


양공 원년 봄 기해일, (맹헌자가 진나라의 난서, 송나라의 화원, 위나라의 영식, 조인, 거인, 주인, 등인, 그리고 설인 회합하고) “송의 팽성彭城을 포위했다. 팽성은 송나라 땅이 아니지만 소급해 기록한 것이다. (8.18.5.) 이번 포위는 송나라를 위해 어석을 토벌한 것이므로 『춘추』는 송나라의 팽성으로 썼고, 또 반란자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않기 위해서였다(1). 이는 송 평공의 뜻이었음을 말한다.

팽성이 진나라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팽성의 송나라 대부 다섯 명을 잡아 돌아가, 호구瓠丘(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쪽)에 감금했다.

제나라는 팽성의 포위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진나라는 제나라를 토벌하려 했다. 2월 제나라의 태자 광이 인질로서 진나라로 갔다.



(1) 염정삼 선생님은어석 등을 굳이 반란군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인데 이는 송나라의 뜻이었다.”라는 해석을 제시하셨다. “謂之의 구법으로 사용된 곳은 은공 원년의 (정 장공의 의도였다)謂之鄭志 밖에 없다. 은공 원년의 기사는 『춘추』에서 을 쓴 까닭은 정 장공의 의도였기 때문이다.”라고 독해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문맥을 살펴보면, 성공 15년 어석 등은 공공이 서거하자 공실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공자비를 살해한다. 화원이 이에 반발하여 망명하려고 했지만 어석 등이 만류하여 머물렀고 오히려 어석 등이 쫓겨나 초나라의 지원 하에 팽성을 탈취하고 송나라를 견제하는 형세였다. 그러므로 송 평공이 이들을 감싸려는 의도는 희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원문


(9.1.1.) 元年春己亥宋彭城. 追書也. 於是爲魚石故稱且不登叛人也謂之.

彭城人以五大夫在彭城者歸寘諸瓠丘.

人不會彭城人以爲討. 二月齊大子光爲質於.


주석


仲孫蔑晉欒黶·宋華元·······人圍宋彭城: 중손멸은 『춘추·선공9년』의 주석을 참조. 난염은 『춘추·성공16년』의 주석 참조. 화원은 문공 7년과 16년의 『좌전』을 참조. 팽성은 『춘추·성공18년』의 주석 참조. 팽성의 포위에 대해서는 성공 18년의 『춘추』와 『좌전』참조. 


춘추시대 지도. 팽성彭城


元年春己亥宋彭城: 두예: “정월에는 기해일이 없다. 착오이다.” 다음 단락에 “2, 제나라 태자광이 인질이 되어”라는 문구가 있는데, 팽성을 포위한 때는 정월의 일이고 “기해”는 혹 “을해”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을해일은 정월 25일이다.

追書也: 정나라와 초나라가 함께 팽성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어석 등을 팽성으로 들였던 일은 『좌전·성공18년』에 보인다. 이때 팽성은 이미 어석 등이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송나라 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어석이 송나라 신하이기 때문에 “소급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썼다.

於是爲魚石故稱且不登叛人也: 어석이 송나라에 반하여 초나라로 망명했던 일은 『좌전·성공15년』의 기사에 보인다. 반인은 어석 등을 가리킨다. 은 성이다. 부등은 찬성하지 않다. 반대의 뜻을 그대로 드러낸 것.

謂之: 『좌전·은공원년』의 “謂之鄭志”와 본문은 모두 해당 인물들의 본심을 깊이 성토한 것이다. 『좌전·은공원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공영달의 『소』는 송나라의 뜻이 팽성을 되찾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彭城: 『좌전·양공26년』에 성자의 언급 “진나라가 팽성을 항복시켜 송나라에 돌려주고 어석 역시 그렇게 처리했다”는 기사를 서술한다. 즉 팽성은 결국 송나라에게 귀속되었다.

人以五大夫在彭城者歸寘諸瓠丘: 오대부는 어석·향위인·인주·향대·어부 등이다. 모두 성공 15년과 18년의 『좌전』에 자세하다. 호구瓠丘는 곧 호구壺丘이고 현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쪽으로 약 50리 떨어진 곳.

人不會彭城人以爲討: 「년표」의 “우리나라(제나라)가 정나라 구원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진나라가 우리를 토벌했다”는 기사에 근거하면 진나라는 제나라 토벌을 위해 출병했다.

二月齊大子光爲質於: 「제세가」에 따르면, 9년 후에야 광이 태자가 된다. 본문의 태자는 후에 소급해서 호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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