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혜왕 복귀 (3.21.1.)

장공 21년 봄, 정 여공과 괵공이 미(하남성 밀현)에서 서명胥命을 가졌다. 여름, 여공과 괵공이 왕성王城을 공격했다. 정 여공이 혜왕을 모시고 어문圉門(남문)을 통해 쳐들어갔고, 괵숙은 북문으로 진입했다. 왕자퇴와 다섯 대부를 죽였다. 정 여공이 서쪽 성루에서 혜왕에게 연회를 베풀 때 과거 여섯 왕조의 음악을 모두 구비했다. 왕은 여공에게 정 무공의 영토였던 호뢰虎牢로부터 그 동쪽 땅을 하사했다. 원백이 말하였다. “정백이 허물을 본받는구나. 장차 그 역시 화가 있을 것이다!” 이해 5, 정 여공이 타계했다. 왕이 괵나라를 순시할 때 괵공은 왕을 위해 봉(하남성 민지현澠池縣)에 행궁을 지었고, 왕은 그에게 주천酒泉(소재 미상) 하사했다. 여공이 왕에게 연회를 대접하자 왕은 후의 반감을 하사했다. 괵공은 예기禮器원했기 때문에 작을 하사했다. 정 여공의 아들 문공은 이 일로 인해 왕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 겨울, 혜왕이 괵나라에서 돌아왔다.


원문

(3.21.1.) 二十一年春胥命于. 同伐王城. 鄭伯將王自圉門入. 自北門入. 王子頹及五大夫. 鄭伯享王于闕西辟樂備. 王與之武公之略虎牢以東. 原伯: 鄭伯效尤其亦將有咎!五月鄭厲公. 王巡爲王宮于王與之酒泉. 鄭伯之享王也王以后之鑑予之. 請器王予之爵. 鄭伯由是始惡于王. 王歸自.


관련 주석 

二十一年春胥命: 이 구절은 본래 장공 20년의 『전』을 이은 말로써 이 때문에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정 여공과 괵공이 미에서 서로 약속한 것이다. 서명胥命이란 제후가 서로 회동하여 삽혈의 의식은 없이 구두로 약속하는 것이다. 상세한 설명은 『춘추·환공3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는 정나라 땅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밀현密縣 부근이다.

同伐王城: 현재의 하남성 낙양 옛성 서부지역이 왕성王城 옛 유적지이다. 평왕 때 동천한 이후 경왕景王때까지 11대 동안 이 곳에 거주했다. 경왕敬王 성주로 천도한 후 왕성은 폐해졌다가 왕난王赧때에 다시 그 곳에 거처를 옮겼다. 자세한 내용은 고동고顧東顧『춘추대사표』를 참조하라.

鄭伯將王自圉門入: 『시·주송·아장我將』의(양과 소를 잡아 제물로) 받들어 올리니(我將我享)”에 대해 정현의 전은 “장 받들다()의 뜻”이라고 풀이한다. 어문圉門 왕성의 남문이다. 『좌전·소공22년』과 『좌전·소공26년』에 근거하면 주나라에는 동어東圉 어택圉澤 있는데, 어문圉門은 이 때문에 얻은 이름으로 생각된다. 고사기高士奇 『지명고략地名考略』에 근거한 설명이다.

自北門入. 王子頹及五大夫: 『국어·주어상』: “자퇴와 세 대부를 죽이고 왕이 입성했다.” 한편 「년표」, 「주본기」 그리고 「정세가」는 『좌전』과 같다.

鄭伯享王于闕西辟: 같고, 한쪽 끝()의 뜻이다. 혹은 상위象魏라고 하는데, 천자와 제후의 궁문에는 모두 축대가 있고, 축대 위에는 지붕올리는데 그것을 대문臺門이라고 한다. 대문의 양쪽에 특별히 문의 지붕보다 높게 짓는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을 쌍궐雙闕, 혹은 양관兩觀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의 성루와 유사하다. 闕西辟”은 쌍궐 중 서쪽 궐을 말한다. 장총함張聰咸『두주변증杜注辨證』에선 양관 안의 길 중 서쪽 길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설명이다. 요내姚鼐 『좌전보주左傳補注』에선 이 궐은 묘문廟門의 궐이고 궁문의 궐이 아니라고 하지만 근거가 없어 신뢰할 수 없다. 『예기·교특생郊特牲』의 “천자에겐 객례客禮 없다. 감히 천자에 대해 주인의 예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군주가 신하를 방문했을 때 동쪽 계단인 조귀阼階 계단을 오르는 것은 비록 신하가 그 집의 주인이지만 그가 천자 앞에서 감히 그의 집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에 대해 정현은 “군주에게 향례를 베푸는 것은 예가 아님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고, 『정의』는 “춘추 시대에는 제후가 천자에게 연회를 베푼 사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왕 21년 정 여공이 궐의 서벽에서 왕에게 향례를 베풀며 육대의 음악까지 갖추었으니 난세에는 법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인용한 「교특생」의 내용을 가지고 제후가 왕에게 향례를 베풀 수 없다는 말의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원백이 정 여공을 조롱한 이유는 왕에게 향례를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수를 넘는 음악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왕에게 향례를 베푸는 것은 춘추 시대 당시의 예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쌍궐雙闕혹은 양관兩觀


樂備두예“육대六代 음악을 갖추어 곁들였다.


춘추시대 지도 - 호뢰


王與之武公之略虎牢以東: 왕이 호뢰虎牢 동쪽 지역 즉 정 무공의 옛 영토를 여공에게 하사했다. 무공은 정 무공을 가리키는데 그는 주 평왕이 동천할 때 보좌했기 때문에 평왕이 그에게 호뢰의 동쪽 지역을 하사했는데 후에 잃었다. 이제 혜왕이 다시 이를 회복시킨 것이다. 『설문』: “략은 다스리다(經略경략)이다.” 『좌전·소공7년』의 “천자는 천하를 다스리고, 제후는 봉토를 다스린다는 것은 (옛날부터의 제도입니다.) 봉토 안이 그 어딘들 군주의 땅이 아니겠습니까(天子經略, 諸侯正封, 封略之內, 何非君土)?”라는 기사를 보면 封略之內 곧 제후가 다스리는 강역을 말한다. 『좌전·희공15년』의 “동쪽으로는 괵나라의 땅을(東盡)”은 즉 동쪽으로는 괵국의 영역이 모두 끄트머리가 되었다. 호뢰虎牢는 북제北制 가리키며 『좌전·은공5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原伯: 원백은 원장공原莊公이다.

鄭伯效尤: 『설문』에선 “허물()”로 쓰는데 죄·허물 뜻이다. 『좌전·희공24년』과 『좌전·양공21년』의 “허물을 꾸짖으며 본받는다(尤而效之), 『좌전·정공6년』의 “다른 사람의 허물을 꾸짖으며 그 과실을 본받는 것(尤人而效之)” 등이 모두 이 뜻이다. 양수달 선생의 『독좌전』에 상세하다. 鄭伯效尤”는 음악을 가리켜 한 말이다. 정 여공이 앞에서 왕자퇴가(육대의) 음악과 편무로 다섯 대부에게 연회를 베푼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했으면서 그 스스로 다시 왕에게 향례를 베풀면서 육대의 음악을 곁들이는 과실을 범했다. 이것이 소위 “다른 사람의 잘못을 꾸짖다가 그 허물을 본받는 것(尤人而效之)”이다.

其亦將有咎!: 어기부사로서 불긍정을 표시한다. 재앙의 뜻이다. 『좌전·양공4년』의 주석에 상세하다.

五月鄭厲公: 주석 없음.

王巡: 라고도 쓴다. 『맹자·양혜왕하』의 “천자가 제후에게 가는 것을 순수巡狩라고 한다. 순수는 제후들이 지키고 있는 곳을 돌아보는 것이다(巡狩者, 巡所守也).” “王巡”는 왕이 괵공이 지키고 있는 지역을 순수함이다.

爲王宮于: 의 음은 봉이고 괵나라 땅이며 현재의 하남성 민지현澠池縣 근처이다.

王與之酒泉: 주천酒泉은 주나라 읍이다. 그 소재지는 미상이다. 고동고顧棟高『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에선 현재의 섬서성 대려현荔縣 주천장酒泉莊이라고말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강영江永 『고실考實』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는데 그가 옳다.

鄭伯之享王也王以鑑予之: 큰 허리띠大帶이다. 신대紳帶라고도 한다. 은 거울이다. 본문의 반감은 한 가지 물건이다. 대대인데 거울로 장식한 기물이다. 『관자·경중기편』의 “옥감을 띠로 두르고(帶玉監), “석감을 띠로 두르고(帶錫監)의 감거울이다. 이 문구들을 가지고 입증할 수 있다. 장병린의 『좌전독』과 양수달 선생의 『독좌전』에 자세하다. 현재는 그 실물을 볼 수 없다. 계복桂馥 『설문의증』에선 “왕후의 반은 곧 부인의 반사이다(王后之, 卽夫人絲也)”라고 설명하는데 즉 생사로 만든다. 이이덕李貽德 『가복주집술賈服注輯述』에서 반감은 거울로 주머니를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라고 한다. 심흠한의 『좌전보주』는 반은 작은 주머니를 매우 아름답게 장식한 수건과 두건이며 감은 거울이라고 한다. 즉 반감은 두 가지 사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들은 근거가 부족하다. 혹자는 동경이라고 하지만 이 역시 근거가 없다.

請器王予之爵: 술잔이다. 정세가: “혜왕이 여공에게 작록을 내리지 않았다.” 작을 작록으로 해석한 것이다. 『좌전』과는 상이하다.

鄭伯由是始惡于王: 여기 정백은 여공의 아들 문공을 가리킨다. 작은 예기로서 반감보다 귀한 물건이다. 정 문공은 부친을 괵공보다 하찮게 여긴 것으로 생각하여 왕에게 반감을 품은 것이다. ”는 개사로서 실제로는 꼭 필요하지 않다.

王歸自: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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