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나라에 길을 빌리는 진 헌공(가도멸괵: 假道虞伐虢) (5.2.2.)

의 순식荀息이 굴 지역에서 난 네 필의 말과 수극垂棘(산서성 노성현潞城縣의 북쪽)에서 채굴한 옥을 우나라(산서성 평륙현平陸縣 동북쪽)에 주고 괵나라를 공격할 길을 빌리자고 청하였다. 헌공이 말했다. “그것들은 내 보물이다.

“우나라에게서 길을 빌릴 수만 있다면 잠시 나라 밖 창고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궁지기宮之奇같은 신하가 건재한 데 가능하겠는가?

“궁지기란 인물은 나약하고 강력하게 간언하지 못합니다. 또 어려서 궁궐에서 자랐기 때문에 군주 역시 그를 허물없이 대하므로 설사 간언을 해도 수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식이 말했다. 헌공은 순식을 파견하여 우나라에 길을 빌리게 했다.

순식이 아뢰었다. “과거 기나라가 무도하여 전령으로 침입하고 귀국의 명(두 곳 모두 평륙현의 동북쪽)의 세 성문을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기나라의 힘이 약해진 것은 오로지 군주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괵나라가 무도하여 객사에 보루를 쌓고 폐읍의 남쪽 변방을 침략하고 있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귀국에 길을 빌려 괵의 죄를 물으려 합니다.

우나라 군주는 이를 허락하고 게다가 먼저 괵을 치겠다고 말하였다. 궁지기가 간언했지만 듣지 않고 바로 군사를 일으켰다. 여름, 진나라의 이극里克과 순식이 군사를 이끌고 우나라 군사와 회합하여 괵나라를 공격하고 하양下陽(평륙현 대양 남쪽)을 멸망시켰다. 『춘추』에 우나라를 앞에 쓴 까닭은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문 

5.2.2. 晉荀息請以之乘與垂棘之璧假道於以伐. 公曰: 是吾寶也.對曰: 若得道於猶外府也.公曰: 宮之奇存焉.對曰: 宮之奇之爲人也懦而不能. 且少長於君君暱之; 雖諫將不聽.乃使荀息假道於: 爲不道入自三門. 之旣病則亦唯君故. 爲不道保於逆旅以侵敝邑之南鄙. 敢請假道, 以請罪于.虞公許之且請先伐. 宮之奇不聽遂起師. 晉里克·荀息帥師會, 下陽. 先書賄故也.


관련 주석

晉荀息請以之乘與垂棘之璧假道於以伐: 『한서·지리지』는 『죽서기년』을 인용, “진 무공武公을 멸하고 대부 원씨암原氏黯에게 그 땅을 주었다. 이가 곧 순숙荀叔이다.” 『좌전·희공9년』의 기사에 따르면, 순식이 곧 순숙이고 암은 그의 이름이며 식은 그의 자로 생각된다. 숙은 항렬이니 소위 “五十以伯仲(『예기·단궁상』)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뇌학기雷學淇 『의증』을 참고하라.

은 북굴北屈이며 『좌전·장공28년』의 주석을 참조.

은 동사로 쓰였다. 굴에서 난 승이란 북굴에서 나고 길러진 말을 가리킨다. 하휴의 『공양』주석과 조기의 『맹자』주석에선 모두 굴산을 지명으로 본다. 악사樂史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는 이 때문에 견강부회하여 현재의 산서성 석루현石樓縣 굴산천屈産泉 있는데, 이 곳에 준마가 있었고 명마들이 이 샘의 물을 마시면 잘 자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신뢰할 수 없다.

수극垂棘 지명으로 성공 5년에도 언급된다. 심흠한의 『지명보주』는 현재의 산서성 노성현潞城縣 북쪽으로 보고 있다.

는 현재의 산서성 평륙현平陸縣 동북쪽(『좌전·환공10년』의 주석)인데, 이곳은 진남晉南(당시 진의 도읍은 강 있었고, 이곳은 익성현翼城縣 동남쪽이다)이다. 괵이 우의 남쪽에 자리했기 때문에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괵을 정벌하려면 반드시 우의 영역을 지나야 하므로 길을 빌려야 한다. 현재 평륙현 동북쪽에 우판虞坂이란 곳이 있는데 고대의 전령판顚軨坂 해당하고, 중조산中條山 가로지르는 지름길이다. 『태평환우기』는 진나라가 빌리려고 하던 길이 바로 이 길이라고 한다. 또 『의례·빙례聘禮』에 어떤 나라를 경유하는, 즉 길을 빌릴 때의 예가 기술되어 있으므로 참조할 만하다. 「진세가」: 19, 헌공이 말했다. ‘애초 우리의 선군이신 장백과 무공이 진나라의 혼란을 토벌할 때 괵나라는 항상 진나라를 도와 우리를 공격했고, 또 진나라에서 망명한 공자를 숨겨 주어 결과적으로 혼란을 만들었다.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면 후대의 자손에게 우환거리를 남겨주는 것이다.’ 이에 순식을 시켜 굴에서 나는 훌륭한 말을 주고 우나라의 길을 빌리도록 하였다.” 『한비자·내저설內儲說』중 “육미六微”에선 우나라에 보낸 것 중 여악사 여섯이 더 있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지도 - 우나라, 괵나라


公曰: 是吾寶也.對曰: 若得道於猶外府也.: 『공양전』과 『곡량전』에 모두 이 구절이 있다. 『곡량』은 『여씨춘추·권훈편權勳篇』과 『한비자·십과편十過篇』의 내용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公曰: 宮之奇存焉.: 궁지기宮之奇 우나라의 현명한 신하이다. 『춘추번로·멸국상편滅國上篇: “우나라 군주가 궁지기에게 나라의 정사를 위임하니 진 헌공이 이를 걱정했다.” 『설원·존현편尊賢篇: “우나라에는 궁지기가 있었는데 진 헌공이 그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기사들은 대체로 『좌전』의 이 구절로 인해 과장된 칭찬으로 생각된다.

對曰: 宮之奇之爲人也懦而不能. 且少長於君君暱之: 少長於君에 대해 임요수의 『구해』: “궁지기는 어릴 때부터 궁에서 자랐다.” 또는 군주보다 약간 나이가 많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임요수의 해석이 더 그럴싸하다.

雖諫將不聽.: 『곡량전』은 이보다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乃使荀息假道於: 爲不道: 국명이다. 『로사·후기後記11에서 은상殷商시대의 전설을 쓴 뒤에 (기나라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근거한 바가 상세하지 않다. 현재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 동북쪽에 기정冀亭이란 유적지가 있는데 기나라의 도읍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머지않아 진나라에게 멸망된 후 극씨郤氏 식읍이 되었다. 不道 정치가 포악하다는 뜻이다.

入自: 전령 곧 우판虞坂이다. 앞의 주석 참조.

三門: 복건은 명을 진나라 읍이라고 하고, 두예는 우나라 읍이라고 한다. 지리적 측면과 합리적으로 고찰해볼 때 두예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평륙현의 동북쪽에 있다. 삼문三門은 구설에 따르면 모두 오늘날의 삼문협三門峽으로 비정된다. 하지만 삼문협은 황하의 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나라가 정벌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정벌할 만한 곳도 아니다. 이 삼문은 혹 지명이 아닐 수도 있다. 三門”은 명읍의 삼문을 정벌한 것으로 포위 공격했다는 것과 유사하다. 『방여기요』에선 명성鄍城 그 둘레가 4리에 달하므로 성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은 기나라의 서남쪽 약 20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문구는 기나라의 정치가 포악하여 아무 이유없이 우나라의 읍을 공격했음을 말한다.

之旣病則亦唯君故: 뜻이다. 『좌전·성공2년』: “제나라와 진나라 역시 하늘로부터 수여받은 바에 의지하여(·亦唯天所授).” 유자의 용법이 이와 동일하다. 之旣病”은 진나라가 우나라를 도와 기나라를 정벌하여 이미 기나라에 피해를 입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則亦唯君故 의미는 진나라가 기나라를 정벌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나라의 복수 때문일 뿐이었다는 뜻이다. 진나라가 우나라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일을 먼저 거론하여 그들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우창于鬯 『향초교서香草校書』에 자세하다.

爲不道保於逆旅: 『예기·월령』의 “사방의 촌민들이 보루로 들어가서(四鄙入保)”에서의 보 같다. 그 주석에 보면 “작은 성을 보 한다”고 설명했는데 오늘날의 보루와 같다. 여기서는 동사로 쓰였다. 즉 객사에 보루를 쌓아서 멀리 감시하고 굳건하게 지킬 수 있게 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은 고본한의 『좌전주석』을 참조. 역려逆旅는 객사이다. 괵국은 진나라 남쪽 변방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아서 노략질할 궁리를 했다.

以侵敝邑之南鄙: 『좌전·장공26년』에 두 번에 걸쳐 괵나라가 진나라를 침략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敢請假道, 以請罪于.: 청죄請罪란 죄를 묻겠다는 뜻과 같다.

虞公許之且請先伐: 虞請先伐”은 바로 이 전투를 말한다. 비록 진나라가 전쟁을 주도했지만 우나라는 실제로 괵나라 정벌의 향도가 된 셈이다.

宮之奇不聽遂起師: 우나라가 군사를 일으켰다.

晉里克·荀息帥師會, 下陽: 『수경·하수주河水注』에서 『죽서기년』을 인용, 19, 헌공이 우나라 군사와 함께 괵나라를 정벌했고 하양을 멸망시켰다. 괵공 추 위나라로 망명했다. 헌공은 하공여생瑕公呂甥에게 명하여 괵의 도읍을 진나라의 읍으로 삼게 하였다.” 『좌전』과는 내용이 다른 바가 있다. 왕부지의 『패소』는 “멸 반드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세 곳이 있었다. 형택滎澤 괵정虢亭 동괵이고, 본문의 하양下陽은 평륙현 대양大陽 남쪽에 있었는데 황하의 북쪽 변이다. 이곳은 북괵이다. 섬주陝州 있는 상양上陽 남괵 해당한다. 동괵은 괵숙이 봉건받은 곳이다. 남과 북의 두 괵은 모두 괵중이 관할하는 곳이다. 북괵이 본래의 옛 도읍이었는데 우나라에게 핍박을 받아 아마도 후에 황화를 건너 남쪽으로 옮겼기 때문에 종묘와 사직이 하양에 있게 된 것이다. 진나라가 그 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괵나라를 정벌한 일은 그 남괵을 취한 것을 말할 뿐이다.” 그런데 『죽서기년』등에 근거하면 진나라가 괵나라를 멸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이 한 차례일 뿐이지만 『좌전』은 이후 괵이 융을 패퇴시킨 일을 적고 있다. 그리고 희공5년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킨 후에야 괵을 완전히 병탄시킬 수 있었다. 왕부지의 주장과 앞에서 인용한 뇌학기의 설명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부지가 말하는 “북괵”이나 “남괵”은 곧 『좌전·은공원년』에 보이는 “西”에 해당한다. 「년표」와 「진세가」모두 『좌전』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先書賄故也: 이것은 『춘추』의 “·師滅下陽.”을 풀이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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