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이생陰飴甥과 진 목공의 '화이부동' - (춘추좌전.5.15.8.)
10월, 진晉나라의 음이생陰飴甥이 진 목공과 회합하고 왕성王城(섬서성 대려현大荔縣 동쪽)에서 동맹을 맺었다. 진 목공이 물었다. “국인들은 화목한가?” 음이생이 대답했다. “화목하지 못합니다. 소인들은 군주를 잃은 것을 수치로 여기고 또 전사한 친척들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세금을 걷고 무기를 수선하여 태자 어圉를 옹립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반드시 원수에 복수할 것이다. 어떻게 융적戎狄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반면 군자들은 군주를 아끼지만 그의 죄를 알기에 세금을 걷고 무기를 수선하는 데 꺼리지 않으면서도 진의 처분을 기다리며, ‘반드시 진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죽더라도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이 화목하지 않습니다.” 목공이 물었다. “국인들은 군주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음이생이 대답했다. “소인들은 걱정하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 하고, 군자들은 용서받아 반드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인들은 ‘우리가 진에게 해를 끼쳤는데 어찌 군주를 돌려보내겠는가?’라고 말하지만, 군자들은 ‘우리가 죄를 알기 때문에 진이 반드시 돌려보낼 것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사로잡고 복종하면 용서하니, 이보다 더 큰 덕이 없고 이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없다. 그러므로 복종하는 이는 덕을 생각하고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은 형벌을 두려워할 것이니 이번 일로 진나라는 패자가 될 수 있다. 군주를 돌려보내 그의 지위를 안정시키지 않고 그를 폐하여 세우지 않으면 지난 날의 은혜를 원한으로 만드는 일이므로 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공이
말했다. “바로 과인의 생각이다.” 목공은 혜공의 객사를
수리하고 제후의 예에 해당하는 칠뢰를 보내주었다.
아석蛾析이 경정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도망치지 않는가?” 경정이 대답했다. “군주를 패배로 몰아넣었고 전쟁에 패했는데도 죽지 않았다. (☞ 5.15.4.) 그것도 부족해 도망쳐 형벌의 엄정함을 잃게 한다면 이는 신하가 아니다.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도망간 들 어디로 가겠는가?” 11월, 혜공이 귀국했다. 정축일(29일), 경정을 죽인 후 도성으로 들어왔다.
이해 진晉나라에 다시 기근이 들었다. 진 목공은 다시 곡식을 보내주며
말했다. “비록 과인이 진의 군주는 원망하나 그 백성들은 긍휼이 여긴다. 또 내가 듣건대, 당숙을 진晉에 봉건했을 때, 기자箕子가 ‘당숙의 후예들은 필시 크게 번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찌 진나라를 얻기를 바라겠는가? 그 곳에 덕을 베풀고 유능한 이가
나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이때 진秦나라는 처음으로 진晉의 하동河東에서 부세를 징수하고 그곳에 관사를 설치했다.
원문 5.15.8.
十月,晉陰飴甥會秦伯,盟于王城.
秦伯曰: “晉國和乎?” 對曰: “不和. 小人耻失其君而悼喪其親,不憚征繕以立圉也,曰: ‘必報讎,寧事戎狄.’ 君子愛其君而知其罪,不憚征繕以待秦命,曰: ‘必報德,有死無二.’ 以此不和.” 秦伯曰: “國謂君何?” 對曰: “小人慼,謂之不免; 君子恕,以爲必歸. 小人曰: ‘我毒秦,秦豈歸君?’ 君子曰: ‘我知罪矣,秦必歸君. 貳而執之,服而舍之,德莫厚焉,刑莫威焉. 服者懷德,貳者畏刑,此一役也,秦可以霸. 納而不定,廢而不立,以德爲怨,秦不其然.’” 秦伯曰: “是吾心也.” 改館晉侯,饋七牢焉.
蛾析謂慶鄭曰: “盍行乎?” 對曰: “陷君於敗,敗而不死,又使失刑,非人臣也. 臣而不臣,行將焉入?” 十一月,晉侯歸. 丁丑,殺慶鄭而後入.
是歲,晉又饑,秦伯又餼之粟, 曰: “吾怨其君, 而矜其民. 且吾聞唐叔之封也,箕子曰: ‘其後必大.’ 晉其庸可冀乎? 姑樹德焉,以待能者.”
於是秦始征晉河東,置官司焉.
관련 주석
▣十月,晉陰飴甥會秦伯,盟于王城: 왕성王城은 현재의 섬서성 대려현大荔縣의 동쪽이다.
▣秦伯曰: “晉國和乎?” 對曰: “不和. 小人耻失其君而悼喪其親: 실군이란 혜공이 포로로 잡혀 있음을 말하고, 상친이란 전쟁에서 죽은 가족들을 가리킨다. 정현은 『시전』: “도悼는 슬퍼함哀傷과 같다.” 도悼와 상喪은 같은 뜻이다.
▣不憚征繕以立圉也,曰: ‘必報讎,寧事戎狄.’: 어찌
융적의 나라에 굴종하여 섬길 수 있겠는가 반드시 진나라에 복수하자라는 뜻.
▣君子愛其君而知其罪,不憚征繕以待秦命,曰: ‘必報德,有死無二.’ 以此不和.” 秦伯曰: “國謂君何?”: 본국에서
혜공의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물어본 것이다.
▣對曰: “小人慼,謂之不免; 君子恕,以爲必歸. 小人曰: ‘我毒秦,秦豈歸君?’ 君子曰: ‘我知罪矣,秦必歸君. 貳而執之,服而舍之,德莫厚焉,刑莫威焉. 服者懷德,貳者畏刑,此一役也: 차역此役이란 한원에서의 전쟁의 전말을 가리킨다. 진의 정벌과 혜공의 석방에 대한 가정 두 가지 모두 포괄한 말이다.
▣秦可以霸. 納而不定: 혜공을 돌려보내고도 그의 지위를 안정시키지
않는 일.
▣廢而不立,以德爲怨,秦不其然.’”: 『국어·진어3』은
“君其不然”으로 쓴다. 『좌전·양공26년』의 “秦其不然”과 『예기·단궁상』의
“其不然乎”와 구어가 동일하다. 본문의
“秦不其然”은 고대 어법이 보존된 모습이다. 복사卜辭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不其雨)”, “큰 바람을 만나지 않을 것(不其遘大風)”, “오지 않을 것(不其來)”등의 구절이 있고, 『상서·반경』의 “그것을 생각하기 않는다면(不其或稽)”, 「소고」의 “不其延” 「낙고」의 “불길을 끄지 못할 것(敍弗其絶)”등이 모두 이런 구법이다.
▣秦伯曰: “是吾心也.” 改館晉侯: 앞서 영대에 구속해 놓았던 그를 객관으로
옮겼다.
▣饋七牢焉: 제후의 예로써 그를 대접한 것은 귀국을
준비하는 것이다. 『예기·예기禮器』의 “제후에 대해서는 일곱 사람과 칠뢰를 쓴다(諸侯七介七牢)”, 『주례·추관·대행인大行人』의 “제후의 예는 따르는 사람이 7인이고, 7뢰를 사용한다(諸侯之禮, 介七人, 禮七牢).”를 보면 본문의 칠뢰는 제후를 대접하는 예임을 알 수 있다.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를 일뢰一牢라 한다. 칠뢰와
함께 쌀米·벼禾·꼴芻·땔감薪 등을 함께 보낸다. 상세한 내용은 『주례·추관·장객掌客』을 참조.
▣蛾析謂慶鄭曰: 아蛾는 의蟻와 같다.
아석은 진의 대부이다.
▣“盍行乎?” 對曰: “陷君於敗: 즉 혜공이 구원을 요청했는데 구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또 한간에게 구원하라 시키는 바람에 그가 진 목공을 사로잡는데 실패하게 했다.
▣敗而不死,又使失刑: 도망쳤는데도 나라에서 처벌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형벌의 엄정함을 잃은 것이다.
▣非人臣也. 臣而不臣,行將焉入?” 十一月,晉侯歸. 丁丑: 정축일은
29일이다.
▣殺慶鄭而後入: 『국어·진어3』은
이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므로 참고할 것. 「진세가」: “진후 즉 혜공이 귀국하여 경정을 주살하여 정교政敎를 가다듬었다.”
▣是歲,晉又饑,秦伯又餼之粟, 曰: “吾怨其君, 而矜其民: 긍矜은 긍휼히 여김이다. 『논어·자장』: “백성들의 사정을 알았다면 불쌍히 여길 일이지 기뻐해서는 안 된다(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且吾聞唐叔之封也,箕子曰: 기자에 대해서 혹자는 은왕 주紂의 아버지 항렬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도 하고, 주의 서형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其後必大.’ 晉其庸可冀乎?: 기其와 용庸 두 글자의 용법은 모두 “어찌豈”와 같다.
동의허사연용에 해당한다. “其庸”의 연용은 『좌전·소공12년』의 “어찌 정을 아끼겠는가(豈其愛鼎)?”와 『순자·왕제편王制篇』의 “어떻게 그 나라가 밖으로부터의 위해를 면할 수 있겠는가(豈渠得免夫累乎)?”, 「정론편正論篇」의 “어찌 모욕을 당한 것이 욕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인가(是豈鉅知見侮之爲不辱哉)”의 “기기豈其”와 “기거豈渠”, “기거豈鉅”의 연용과 유사하다. 기冀는 기幾로 해석해야 한다. 『좌전·선공2년』의
“어찌 그 나라를 얻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庸可幾乎)”로서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기幾는 없앰盡의 뜻이다. 이 문구는 진의 후대가 무궁하다는 의미이다.
▣姑樹德焉,以待能者.”: 주석
없음.
▣於是秦始征晉河東,置官司焉: 『사기·년표』에선 이 사건을 다음 해에 배열하고 있다. 『좌전』은 이 말로써 사건을 종결짓고 있다. 정征이란 부세를 매기다. 하동은 황하의 동쪽으로 『좌전』의 소위 “동쪽으로는 괵략, 남으로는 화산, 안으로는 해량성에 이른다”는 말은 현재의 산서성 혹은 하남성의 경내로써 희공 17년에 다시 진에게 귀속되었다. 『좌전·성공11년』의 “진백이 황하를 건너는 것을 꺼려 왕성에 주둔하며 사과를 진후에게 보내 하동에서 맹약을 맺게 하는 한편, 진의 극주는 진백과 하서에서 맹약을 맺었다.”는 기사를 보면, 하동과 하서는 황하를 경계로 함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진본기」는 “이오가 하서의 땅을 바쳐 이때 비로소 진의 세력이 황하에 미치게 되었다.”고 전한다. 혹자는 하동을 “河外列城五”로 보고 하서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지만 『좌전』의 뜻은 아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