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융山戎 (3.30.3.)

겨울, 장공이 노나라 쪽의 제수에서 제 환공과 예를 생략하고 만나 산융山戎에 대해 논의했다. 산융이 연나라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문

3.30.3. 遇于魯濟山戎. 以其病故也.


관련 주석 

遇于魯濟山戎: 금택문고본에는 “모”자 아래에 “벌”자가 있다.



춘추시대 지도 - 산융


以其病故也: 여기의 연은 북연北燕으로 소공召公 후예이다. 목후 7년에 춘추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246년 후인 연왕 희 33년에 진나라에게 멸망되었다. 도읍은 계인데 현재의 북경시 서남쪽이다. 전해지는 이기로는 언후정匽侯鼎, 언공이匽公, 언후지정匽侯旨鼎, 언후재과(+)侯載戈등이 있다. “연”자는 “언 혹은 “언(+)”으로도 쓴다. 작위는 후 혹은 공으로 칭한다. 전국 시대에는 왕을 자처했고, “언”이라는 글자로 썼다. 전해지는 기물로 언왕과郾王戈, 언왕극郾王戟, 그리고 언왕대사검郾王大事劍 등이 있다. 「제세가」: “환공 23, 산융山戎 연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왔다. 제 환공이 연을 구하기 위해 산융을 정벌하였는데 고죽까지 진출한 후 귀국했다. 연나라 장공이 환공을 제나라 국경까지 배웅하자 환공이 말한다. ‘천자가 아니라면 제후의 배웅은 국경을 넘어서지 않는 법입니다. 연나라에 무례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연나라 군주가 배웅한 곳까지 연나라의 땅으로 떼어 주었다. 그리고 연나라 군주에게 소공의 정치를 베풀도록 하고, 주나라 왕실에 공납하기를 성왕과 강왕의 시대처럼 할 것을 명했다. 제후들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모두 제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년표」: “환공 23년 산융을 정벌하였는데 연나라를 위해서였다.” 「연세가」와 「년표」역시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또 「흉노열전」: “당시에 진 양공襄公 융을 정벌하고 기까지 세력이 뻗치니 이 때에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그로부터 65년 후 산융이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제나라 리공(釐公희공)은 제나라의 교에서 이들과 전투를 벌였다. 그로부터 44년 후 산융이 연나라를 정벌했다. 이 사실을 제나라에 보고했고 제 환공은 북쪽으로 산융을 정벌하여 산융이 패주했다.” 제나라 리공의 전투는 즉 노나라 환공 6년의 “북융이 제나라를 정벌했다”는 기사를 가리킨다. 산융山戎 혹은 북융北戎이라고도 부르지만 기실 실체는 같다. 『문물』1973 3기의 당란唐蘭 글에 따르면 하북성 노룡蘆龍부터 요녕성 객좌喀左 이르는 곳이 고죽국의 범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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