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환공의 죽음과 요리사 역아 - (춘추좌전.5.17.5.)

제 환공에게 부인이 셋이었는데 왕희, 서영 그리고 채희에겐 자식이 없었다. 환공은 여인을 좋아하여 총첩도 많았다. 그들 중 부인처럼 총애받은 여인이 여섯이 있었다. 장위희는 무맹을 낳았고, 소위희는 혜공을, 정희는 효공을, 갈영葛嬴은 소공을, 밀희는 의공을, 송화자는 공자옹을 낳았다. 환공과 관중은 효공을 송 양공에게 위탁하고 태자로 삼았다. 옹무雍巫는 장위희의 총애를 받았는데, 환관 초를 통해 환공에게 진귀한 요리를 바치고 환공의 총애까지 얻었다. 환공이 무맹을 태자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관중이 타계하자 다섯 공자는 모두 자신이 환공의 후계가 되려고 했다. 겨울 10월 을해일(7), 제 환공이 타계했다. 역아易牙(옹무)가 궁궐로 들어가 환관 초와 함께 부인의 도움을 얻어 여러 관리들을 살해하고 공자무휴公子無虧(무맹) 옹립했다. 효공은 송나라로 망명했다. 12월 을해일(8)이 되어서야 환공의 부고를 냈고, 신사일 밤에 시신을 빈소로 옮겼다.


원문 5.17.5.

齊侯之夫人三王姬·徐嬴·蔡姬, 皆無子. 齊侯好內多內寵 內嬖如夫人者六人: 長衛姬, 武孟; 少衛姬, 惠公; 鄭姬, 孝公; 葛嬴, 昭公; 密姬, 懿公; 宋華子, 公子雍. 公與管仲孝公宋襄公以爲大子. 雍巫有寵於衛共姬寺人貂以薦羞於公亦有寵. 公許之立武孟. 管仲五公子皆求立. 冬十月乙亥齊桓公. 易牙寺人貂因內寵以殺群吏而立公子無虧. 孝公. 十二月乙亥. 辛已夜殯.


관련 주석

齊侯之夫人三王姬·徐嬴·蔡姬: 왕희는 장공 11년에 출가했다. “서영徐嬴”은 『사기·제세가』에선 “서희徐姬”로 쓴다. 채희는 『좌전·희공3년』의 주석에 설명되어 있다.

皆無子. 齊侯好內: 고대엔 남녀를 외·내로 쓰기도 한다. 『좌전』에 외폐外嬖 내폐內嬖 쓰는 것과 같다. 는 부녀를 가리킨다. 『공자가어·곡례자하문曲禮子夏問』의 “남자를 좋아하는 여인은 남자가 그녀를 죽이게 되고, 여인을 좋아하는 남자는 여인들이 그를 죽인다(好外者, 士死之; 好內者, 女死之).”는 말은 부녀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전국책·한책韓策1』의 “공중이 여인을 좋아하는 까닭에, 솔이 그를 호사라고 불렀다(公仲好內, 曰好士)”라는 말로도 증명이 된다.

多內寵: 완원이 『교감기』에서 진수화陳樹華 주장을 인용한 것과 홍량길의 『좌전고』는 공히 『한서·오행지』의 주석에서 인용한 문구들에 근거하면 “”자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총”의 “내”는 연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기·제세가』에서는 “多內寵”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본래 “내”자가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內嬖如夫人者六人: 長衛姬, 武孟: 위희가 두 명이기 때문에 장과 소로 구분했다. 「제세가」는 “장위희가 무궤無詭 낳았다”고 전한다. “무궤”를 『좌전』에선 “무휴”로 쓰기도 한다. 무휴가 이름이고 무맹은 그의 자이다.

少衛姬, 惠公: 「제세가」: “소위희가 혜공 원을 낳았다.” 다음에 서술하는 여러 부인들은 아마 그녀들의 소생이 군주가 된 순서대로 나열한 것으로 생각된다. 효공·소공·의공의 순서이다. 혜공이 맨 마지막에 군주가 되었는데도 앞에 쓴 이유는 두 위희에 대한 글을 따로 떼어놓기 어려워서인 것 같다.


산동성 치박시 관중의 묘


鄭姬, 孝公: 「제세가」: “정희가 효공 소 낳았다.

葛嬴, 昭公: 갈에 대해선 『춘추·환공15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제세가」: “갈영이 소공 반 낳았다.

密姬, 懿公: 본래 상나라 때 있었던 길성姞姓 나라로서 『통지·씨족략氏族略2』에서 『세본』을 인용한 것에 보인다. 『시·대아·황의皇矣』의 소위 “밀나라 사람들이 공손하지 못하고 감히 대국에게 저항한다(人不恭, 敢拒大邦)”에서의 밀이다. “밀수密須”라고도 쓰는데, 『좌전·소공15년』의 “밀수의 북과 대로는 문왕이 크게 밀수를 정벌하여 얻은 것이었고.”는 기사의 밀수가 그러하다. 이 나라는 문왕이 멸했고, 그 땅에 희성을 분봉했다. 『국어·주어상』의 “공왕恭王 경수 근처에 유람을 떠났는데 밀 강공密康公 따랐다. 일년 후 공왕은 밀을 멸망시켰다.”는 기사 속의 나라이다. 그래서 위소는 “강공은 밀의 군주로서 희성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밀국은 감숙성 영대현의 서쪽에 있던 나라로서 제나라와는 거리가 너무 멀고 또 일찍이 서주시대에 공왕에게 멸망당했었으므로 본문의 밀희의 본국이 아닌 것 같다. 『로사·국명기』에서 『사색』을 인용하여, “밀수는 지금의 하남성 밀현에 있었고, 안정현安定縣의 희성의 밀과는 별개의 나라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의 근거는 알 수 없다. 양리승梁履繩은 『보석』에서 본문의 밀은 주 왕실의 경의 채읍으로서 『좌전·희공6년』에 보이는 신밀新密이며 현재의 하남성 밀현密縣 소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 밀은 이미 정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심흠한은 『보주』에서 “밀희의 나라는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제세가」에선 “밀희가 의공 상인商人 낳았다”고 전한다.

宋華子, 公子雍: 『좌전·성공15년』에 근거하면, 송나라 화씨는 송 대공戴公 후손이기 때문에 자를 성으로 삼았다. 송은 나라, 화는 그 씨이며 자는 그의 성이다.

公與管仲孝公宋襄公以爲大子: 『한비자·난삼편難三篇』의 “환공에게 수수께끼를 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물었다. ‘첫 번째 어려움 두 번째 어려움 그리고 세 번째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환공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양백준의 원문은 대를 사로 잘못 쓰고 있다. 옮긴이)관중에게 묻자 대답했다. ‘첫째 어려움은 광대를 가까이하고 선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려움은 도성을 떠나 자주 바다로 가는 것입니다. 셋째 어려움은 군주가 늙을 때까지 태자를 늦게 세우는 일입니다.’ 환공은 ‘옳다’라고 대답하고서 굳이 날을 택하지 않고 종묘에서 태자를 세우는 예를 거행했다.” 심흠한의 『보주』는 “본문의 일을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雍巫有寵於衛共姬: 『주례·천관』의 내옹內雍 외옹外雍으로서 고기를 자르고 삶는 일을 주관한다. 는 그의 이름이고 역아易牙 그의 자이다. 『좌전』은 여기서 옹무와 환관寺人를 언급하고, 다음에선 역아와 시인초를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역아와 옹무는 동일인이다. 『관자·소광편』에 보이는 당무當巫 곧 『여씨춘추』에 나오는 상지무常之巫로서 여기서 무는 박수무당巫覡 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삶과 죽음을 볼 수 있으며 큰 병을 고칠 수도 있는 인물이고 본문의 옹무와는 별개의 사람이다. 심흠한은 『보주』에서 옹무와 당무 그리고 상지무를 동일인으로 봤는데 그렇지 않다. 『좌전』을 세밀하게 읽지 않은 까닭이다.

寺人貂以薦羞於公: 천수薦羞는 동의연면사이다. 『주례·천관·포인庖人』의(여섯 가지 가축과 여섯 가지 들짐승과 여섯 가지 날짐승을) 공급하여 왕의 찬이나 그 밖의 반찬을 장만하여 공양한다(以共王之膳與其薦羞之物).”에 대해 정현은 “천 역시 진상 뜻이다. 물품을 준비하는 것을 천이라 하고, 그 물품의 맛을 풍부하게 내는 것을 수 한다.”고 설명했고, 또 「재부宰夫의 “제사에 쓰일 기물戒具 물품薦羞 관장한다.”에 대해 “천 고기 젓갈이고, 곡물內羞 포함한 여러 물품庶羞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변인籩人」의 “제사에 제기 물품 등을 공급한다.”에 대해 “천수는 모두 진상품이다. 아직 들기 전의 음식을 천이라 하고, 음식을 든 후의 것을 수라 한다.”고 설명한다. 손이양의 『주례정의』는 “정현의 이 세 가지 주석은 각각 하나를 들어 해석한 것이고 뜻은 모두 서로 통한다.”고 설명한다. 「제세가」는 “옹무는 위 공희에게 총애를 입었기 때문에 환관 두도를 시켜 환공에게 많은 재물(음식)을 바쳤다.”고 전한다. 여기서는 “以厚”로서 “천수”를 해석한 것인데, 옹무는 고기를 자르고 삶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환공에게 바친 것은 일반적인 재물이 아니라 음식이었을 것이다.

亦有寵: 『관자·소칭편小稱篇: “관중이 의관을 바로 하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대답했다. ‘신이 원하건대, 역아와 수조와 당무와 위 공자 개방을 멀리 하십시오. 역아는 요리로 군주를 모셨습니다. 군주께서 ‘아기 삶은 요리는 먹어 보지 못했다’고 하시니, 그는 제 자식을 죽여 삶아서 군주에게 바쳤습니다. 사람의 정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공을 진정으로 아끼겠습니까? 군주께서 여색을 좋아하시고 남자를 꺼리니, 수조는 스스로 환관이 되어 공을 위해 궁녀를 다스렸습니다. 사람의 정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음이 없는데, 자기 몸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군주를 진정으로 아끼겠습니까? 공자 개방은 군주를 섬기느랴 15년이나 자기 부모를 보지 못했는데, 제나라와 위나라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입니다.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군주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꾸밈은 오래가지 못하고, 은폐된 거짓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착한 일을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죽음 또한 반드시 좋지 않을 것입니다.’ 환공이 대답했다. ‘알겠소.’ 관중이 죽고 장례를 마쳤다. 환공은 네 사람을 미워하여 그들의 관직을 폐했다. 당무를 내쫒은 후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고, 역아를 내쫓고는 입맛을 잃고, 수조를 내쫓으니 궁중이 어지러워지고, 공자 개방을 내쫒았더니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환공이 탄식했다. ‘아! 관중 같은 성인도 도를 어지럽히는가?’”

公許之立武孟. 管仲: 「제세가」: “환공 41, 관중과 습붕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희공 15년에 해당한다. 관중이 이 해에 사망한 것은 『국어』를 읽어보면 신뢰할만 하다. 『국어·진어4』의 “문공이 적에 망명한 지 12, 호돌이 ‘제 환공은 노쇠했고, 관중은 죽었습니다.’”라는 기사를 보자. 진 문공이 적에 망명한지 12년 되는 해는 노 희공 16년인데, 관중의 죽음은 이미 해를 넘겼기 때문에 호언이 “관중은 죽었다(管仲歿矣).”고 말한 것이다.

五公子皆求立: 환공의 아들은 여섯이라고 상술했지만 효공이 이미 태자가 되었기 때문에 효공은 제외하고 나머지를 말한 것이다. 『관자·계편戒篇: “환공이 죽자 여섯 아들이 모두 그 지위를 다퉜다.” 여기서는 효공까지 포함하고 있다.

冬十月乙亥: 을해일은 7일이다.

齊桓公: 『관자·소칭편』: “환공은 네 사람을 복직시켰다. 1년이 지나자 네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을 방에 가두고 외출도 못하게 했다. 이때 한 부인이 담 구멍을 통해 환공이 있는 곳까지 들어왔다. 환공이 말했다. ‘나는 굶어서 밥도 먹고 싶고, 목이 말라 물도 마시고 싶으나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부인이 대답했다. ‘역아·수조·당무·공자개방, 이 네 사람이 제나라를 쪼개 가지고 교통이 두절되어 열흘이 걸려도 오가지 못합니다. 공자 개방이 700사의 토지와 호적 대장을 정리하여 위나라로 내보냈기 때문에 음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슬프도다! 관중(聖人)의 말이 옳도다! 죽은 사람이어서 알지 못하니 그만이지만 만약 알고 있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서 중보를 만난단 말인가?’ 그리고는 흰 두건에 머리를 파묻고 절명했다. 죽은 지 11일째, 시체에서 구더기가 나와서 이에 환공이 죽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버드나무로 된 문짝을 뜯어내 관으로 삼아 환공을 장사지냈다. 환공은 죽은 지 열하루가 된 까닭에 시신에서 구더기가 나왔으나, 시신을 염습할 사람도 없었으니, 현인을 믿지 않은 결과의 끝을 보여준다.” 환공이 편안한 죽음을 얻지 못한 일은 전국시대에도 널리 전해졌다. 『장자·서무귀편徐無鬼篇』『관자·계편戒篇』『여씨춘추·귀공편貴公篇』「지접편知接篇」『한비자·십과편十過篇』등에 모두 그 일에 대한 기사가 있다. 「제세가」: “환공이 병이 들자 다섯 공자는 각각 자신의 무리를 만들어 자리를 다퉜다.” 이것이 환공이 편안한 죽음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易牙寺人貂因內寵以殺群吏: 복건은 내총을 “여섯 명의 부인”이라 했고, 두예는 “내관으로서 권력과 총애를 받는 자”라고 설명했다. 복건의 주장이 비교적 옳은 것 같다. 군리群吏 대해 복건은 “여러 대부들”이라고 설명한다.

而立公子無虧. 孝公. 十二月乙亥: 을해일은 8일이다.

. 辛已: 신사일은 14일이다

夜殯: 임종일로부터 빈소로 옮겨질 때까지 67일이 걸렸다. 「제세가」: “환공이 죽자 드디어 공자들이 서로 싸움을 시작하여 궁궐을 비어있고 아무도 감히 입관을 하려들지 않았다. 환공의 시신은 침상에 67일간 내버려져 있었으므로 벌레들이 시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12월 을해일 무휴가 즉위하자 비로소 입관하고 부고를 냈다. 신사일 밤 염을 하고 빈소로 옮겨졌다.” 『좌전』과 같다. 『관자·계편』의 “환공이 죽은 지 7일 동안 염을 하지 못했다”, 『설원·권모편』의 “환공이 죽은지 60, 벌레들이 시신에서 기어 나왔지만 수습하지 않았다.” 등등의 기사를 보면 일수는 모두 약간의 차이는 있다. 심흠한의 『보주』는 “예를 따르면, 빈소에 옮기는 일은 동이 틀 때 하는 것으로서 밤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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