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희의 모략과 공자중이
진晉 헌공이 가賈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얻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제강齊姜과 간통하여 진秦 목공의 부인과 태자 신생을 낳았다. 또 융戎의 여인 두 명을 취했는데 대융호희는 중이를, 소융자는 이오를 낳았다.
또 진나라가 여융驪戎을 정벌했을 때 여융의 군주가 여희驪姬를 헌공에게 바쳤는데 그녀를 데리고 돌아와 해제奚齊를 낳았고, 여희의 동생은 탁자卓子를 낳았다.
여희는 헌공의 총애를 얻자 그녀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총신 양오梁五와 동관폐오東關嬖五에게 뇌물을 주고 다음처럼 아뢰게 하였다. “곡옥은 군주의 종읍(宗邑)이고, 포蒲(산서성 습현隰縣의 서북쪽)와 두 굴屈(길현吉縣의 동북쪽과 그 남쪽)은 변경이나 군주의 영토입니다. 이곳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종읍에 주인이 없으면 백성에 위엄이 서지 않고, 변경에 다스리는 자가 없다면 융에게 침략할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융이 욕심을 품고, 백성이 정치를 업신여기면 이는 나라의 우환입니다. 태자에게 곡옥을 주관하게 하시고, 중이와 이오에게 각각 포와 굴을 맡긴다면 백성에 위엄을 떨치는 한편 융을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군주의 공적을 널리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목소리로 말하게 했다. “적狄의 광대한 땅은 우리가 읍을 세울 만한 땅입니다. 영토를 개척하는 일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헌공은 두 사람의 의견을 흡족하게 여겼다.
여름, 태자를 곡옥에, 중이를 포성에, 이오를 굴에 거처하게 했다. 나머지 공자들도 모두 지방에 머물게 했다. 오직 여희와 그 동생의 자식들만 강絳에 머물렀다. 양오와 동관폐오는 마침내 여희와 함께 공자들을 참소하고 해제를 태자로 세웠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양오와 동관폐오가 꾸민 일이라고 말했다.
원문 (3.28.2.)
晉獻公娶于賈,無子. 烝於齊姜,生秦穆夫人及太子申生. 又娶二女於戎,大戎狐姬生重耳,小戎子生夷吾. 晉伐驪戎,驪戎男女以驪姬, 歸,生奚齊,其娣生卓子. 驪姬嬖,欲立其子,賂外嬖梁五與東關嬖五,使言於公曰: “曲沃,君之宗也; 蒲與二屈,君之疆也; 不可以無主. 宗邑無主,則民不威; 疆埸無主,則啟戎心; 戎之生心,民慢其政,國之患也. 若使大子主曲沃,而重耳·夷吾主蒲與屈,則可以威民而懼戎,且旌君伐.” 使俱曰: “狄之廣莫,於晉爲都. 晉之啟土,不亦宜乎!” 晉侯說之. 夏,使大子居曲沃,重耳居蒲城,夷吾居屈. 群公子皆鄙. 唯二姬之子在絳. 二五卒與驪姬譖群公子而立奚齊,晉人謂之二五耦.
관련 주석
▣晉獻公娶于賈: 가賈는 희성의 나라이다. 『좌전·환공9년』의 주석을 참조.
▣無子. 烝於齊姜: 두예: “제강은 무공武公의 첩이다.” 그러나 「진세가」는 “태자 신생申生의 모친은 제 환공의 여식인
제강인데 그녀는 일찍 죽었다.”고 쓰고 있다. 사마천은 무공의
첩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좌전』의 “증烝”이란 글자는
상음上淫,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간통한 것을 말한다. 두예의 주석은
이것에 근거한 설명이다. 제 환공은 노 장공 9년에 즉위했고, 진 무공은 노 장공 17년에 사망했으므로 제 환공의 여식을 취했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기』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 고동고는
『대사표』권50, 「위이강제강변衛夷姜齊姜辨」에서 이 주장에 대해 의혹을
품고, 제강은 진 헌공이 아직 즉위하기 전에 취한 적부인으로 주장한다.
장병린의 『좌전독』권8에서는 제강은 애후의 첩이 아니라 소자후의 첩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두
억측으로 근거가 부족하다. 이에 대해서는 의심가는 대로 놔두는 것이 낫다.
▣生秦穆夫人及太子申生: 진 목공의 부인을 앞에 쓴 것으로 봐서 그녀가 손위 누이이고, 신생이
동생이다. 「진본기」역시 “목공 4년, 진나라로 부인을 영접하러 갔다.
태자 신생의 누이였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진세가」에선 “신생의 동모 누이동생이 진 목공의 부인이 되었다.”라고 하여 신생을 손위로 보고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又娶二女於戎,大戎狐姬生重耳: 대융호희를『좌전·소공13년』에선 호계희狐季姬라고 쓴다. 염약거閻若璩의 『사서석지四書釋地』는 대융의 땅은 현재의 산서성
교성현交城縣이라고 주장한다. 장주張澍의 『성씨변오姓氏辨誤』권6에선 호희狐姬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녀는 왕자호王子狐(주 평왕의 아들로 정나라에 인질로 갔었다. 『좌전·은공3년』참조. 옮긴이)의 후손이며
융에 살았던 인물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이 비교적 옳아 보인다.
▣小戎子生夷吾: 「진세가」: “중이의 모친은 적翟의 호씨狐氏 여자이고, 이오의 모친은 그녀의 동생이다.” 대융호희와 소융자는 자매이며 소융자는
아마 누이의 잉첩으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반해 두예는 호희와 소융자는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여인으로
봤는데, 「진어3」에 근거하여 괵역虢射을 이오의 외삼촌으로, 호언狐偃을 중이의 외삼촌으로 본다. 『철유재綴遺齋』권27, 7항에 춘추 시대의 력鬲이 소개되어 있다. 그 명문에 □姬가언급되고 있는데 즉 호희狐姬이다. 「진어4」에 보면 “호씨狐氏는 당숙唐叔에게서 갈라져 나왔다. 호희는 백항伯行(위소의 주석에 따르면 “백항은 호돌狐突의자字”이다)의 여식이며 중이를 낳았다.”라고 기록한다. 한편 「진세가」는 “헌공이 태자 시절에 중이는 이미
성인이었다.”고 말하지만 「진어4」는 “진 공자중이는 17세에 망명을 떠났다(晉公子生十七年而亡).”라고 쓴다. 사마천의 설은 신뢰하기 어렵다.
▣晉伐驪戎: 여융驪戎에 대해 이전의 설명은 모두 현재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의 동쪽에 있는 여융성麗戎城으로 비정했는데, 고힐강顧頡剛은 이 주장을 의심하고, 현재의
산서성 석성析城과 왕옥王屋의 두 산 사이이라고 주장한다. 자세한 것은 그의 『사림잡식史林雜識·여융부재여산麗戎不在驪山』을 참조하라.
▣驪戎男女以驪姬: 여女란 딸을 남에게 주는 것이다. 「진어1」의 “헌공이 여융을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고 여의
군주麗子를 멸하고서 여희驪姬를 사로잡아 귀국했다.”는
기사는 『좌전』과 같지 않다. 「진세가」와 「년표」는 이 사건을 헌공 5년의 일로 기록했는데 이 때는 노 장공 22년에 해당한다.
▣歸,生奚齊,其娣生卓子: “탁자卓子”를『사기』에는 “도자悼子”로 쓴다.
▣驪姬嬖,欲立其子,賂外嬖梁五與東關嬖五: 외폐外嬖란 내폐에 상대되는 말이다. 총애받는
여인을 내폐內嬖라 하는데, 『좌전·희공17년』의 “부인처럼 총애를 받는 여인이 여섯
사람(內嬖如夫人者六人)”이라는 말이 이 예다. 그러므로 외폐란 총애받는 신하이다. 본문에서 외폐는 양오梁五와 동관폐오關嬖五 두 사람을
가리킨다. 외폐 동관폐오라는 호칭은 『좌전·소공9년』의 “外嬖嬖叔”이란 호칭과
비슷하다. 왕인지의 『술문』과 전기錢綺의 『찰기札記』는「고금인표」와 『국어』의
위소의 주석에 근거하여 “동관오東關五”로 인용하고 있다. 즉 “嬖五”의 “嬖”자는 연문으로
본 것인데 신뢰하기 어렵다.
▣使言於公曰: “曲沃,君之宗也: 『좌전·양공27년』의 “최崔는 우리 가문의 종읍宗邑이다.”, 『좌전·애공14년』의
“박薄은 종읍이다.”를 보면 본문의 “君之宗也”는 곧 “君之宗邑”이라는 뜻이다. 곡옥은 환숙이 봉건받은 곳이다. 환숙은 진 헌공의 시조로서 진나라의 종묘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종읍이라고 부른다. 그런 까닭에 아래에 “(현재) 종읍에
주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蒲與二屈,君之疆也: 포蒲는 진나라의 읍으로 현재의 산서성 습현隰縣의 서북쪽이다. 민간에선 그 지역을 참거원斬袪垣이라고 부르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환관 피披가 진 문공의 소매를 벤 곳이라고 한다. 이굴二屈은 북굴과 남굴이다. 이 두 곳은 서로 인접하여 도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오 혼자서 그
곳에 주둔했다. 북굴은 현재의 길현吉縣의 동북쪽이고, 남굴은 그 남쪽에 위치한다. 「진세가」에 따르면 포는 진秦나라와의 경계, 이굴은 적狄과의 경계에 있다. 그래서 군주의 변경(君之疆)이라고 말한
것이다. 강疆은 변경의 뜻이다.
▣不可以無主. 宗邑無主,則民不威: 불위不威는 불외不畏와 같다. 불외하면 백성들은 나라의 정치를 업신여기게 된다.
▣疆埸無主,則啟戎心: 역埸의 음은 역亦이고 변경이란 뜻이다. 옛 사람들은 강역疆埸을 항상 함께 사용했다. 계啟는 열어주다의 뜻. 융戎은 널리 포와 굴
경계지역의 이족들을 가리킨다.
▣戎之生心,民慢其政,國之患也. 若使大子主曲沃,而重耳·夷吾主蒲與屈,則可以威民而懼戎,且旌君伐.”: 정旌은 널리 분명하게 드러냄이고, 벌伐은 공적이다.
▣使俱曰: 사使는 여희가 그들에게 말하게 시킨 것이다. 이상은 양오와 동관폐오가 각자 한 말이고, “使俱曰”이하는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심흠한은 『보주』에서
俱曰 이하는 여러 사람들이 과장된 칭찬의 말을 한 것으로 가정하여 옛 사람들의 상조라고 설명하지만 『좌전』이
의도한 바는 아닌 것 같다.
▣“狄之廣莫,於晉爲都: 광막은 끝없이 넓다의 뜻이다. 『장자·소요유』의 “어찌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의 고향인 광막한 들판에(何不樹無何有之鄕, 廣莫之野).”란 말을 보면 이 말의
뜻은 융적의 광야는 끝없이 넓고 넓은데 그 땅을 모두 진나라에 귀속시켜 그 곳에 모두 진의 읍을 건설하자는 말이다.
▣晉之啟土,不亦宜乎!”: 계토啟土는 강토를 개척하다.
▣晉侯說之. 夏,使大子居曲沃,重耳居蒲城,夷吾居屈: 「진어4」에 희부기僖負覊의 말을 기재하고 있는데, 진 문공은 17세에 망명을 떠났다. 이때는 노나라 희공 4년에 해당하므로 중이와 이오는 이 때에 모두 연소한 때였다. 소위
주主나거居의 의미는 반드시 몸소 군민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지역에 거할 뿐이며 이들 외에 보좌하는 이를 둔 것일 뿐이다. 고동고는
그들의 나이가 어려서 이를 의심했지만 반드시 직접 다스리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群公子皆鄙: 개비皆鄙는 모두 변방에 거주하도록 함이다. 금택문고본에는 “皆在鄙”로 쓰는데 “在”자는 어리석은 이가 덧붙인 글자이다. 『좌전·희공24년』에 헌공이 아들이 9명(「진세가」는 헌공의
아들이 8인이라고 한다), 즉 신생申生·중이重耳·이오夷吾·해제奚齊·탁자卓子 외에 네 명이 더 있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킨다.
▣唯二姬之子在絳: 이희二姬란 곧 여희와 그 동생이고, 그녀들의
아들은 해제와 탁자이다.
▣二五卒與驪姬譖群公子而立奚齊: 해제를 태자로 삼은 것으로서 후대에 추술하여 기술한 것이다.
▣晉人謂之二五耦: “二五耦”는 양오와 동관폐오가 함께 이간질함이다. 옛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어떤 일을 공모할 때 우耦란 글자를 썼다. 고염무의 『사해보정社解補正』에 자세하다. 「진어1」
역시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데 『좌전』과 동일하다. 그러나 「진세가」는 이 두 사람의 말을 헌공의
말로 쓰고 있다. 또 「년표」와 「진세가」는 모두 이 일을 헌공12년, 즉 장공29년에 배치하고 있다. 『좌전』보다 1년이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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