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공을 사로잡은 초성왕, 우盂의 회합 - (춘추좌전.5.21.3.)

가을, 제후들(송 양공, 초 성왕, 목공, 채 장공, 정 문공, 허 희공 그리고 조 공공)이 우(하남성 수현睢縣)에서 송 양공과 회합했다. 자어가 말한다. “재앙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군주의 탐욕이 매우 심하니 어찌 감당할 것인가?” 이때 초나라가 양공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정벌했다. 겨울, 제후들이 박(하남성 상구시商丘市 북쪽)에서 회합을 열고 양공을 석방했다. 자어가 말한다. “재앙이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군주의 징벌은 부족하다.


원문 5.21.3.

諸侯會宋公. 子魚: 禍其在此乎! 君欲已甚其何以堪之?於是宋公以伐. 會于以釋之. 子魚: 禍猶未也未足以懲君.


관련 주석

 

宋公·楚子·陳侯·蔡侯·鄭伯·許男·曹伯會于: 『공양』에선 “우”를 “곽”으로, 『곡량』에선 “우”로 쓴다. 는 송나라 땅이다. 『일통지』에 따르면, 현 하남성 수현睢縣 우정盂亭 있는데 그곳이라고 한다. 『춘추』에서 초나라 군주를 “楚子”라고 쓰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후로는 간혹 “楚人”이라고도 하지만 선공 9년 이후로는 모두 “초자”라고 호칭한다.

宋公以伐: 『공양전』: “누가 잡았는가? 초나라 군주가 잡았다. 그런데 왜 그가 잡았다고 쓰지 않았는가? 이적의 군주가 중국의 제후를 사로잡은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공양』의 해석이다. 두예: “초나라 군주가 송 양공을 사로잡은 것을 밝히지 않은 까닭은 송 양공이 덕은 없으면서 맹주의 자리를 다뒀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 모든 제후가 함께 그를 잡은 것처럼 글을 꾸민 것이다.” 경문에선 다음에 나오는 송 양공의 석방 역시 모든 제후가 한 일로 쓰고 있으므로 『춘추』의 뜻에 부합하는 것 같다.

 

춘추좌전 지도 - 송나라와 초나라 

諸侯會宋公: 『사기·년표』: “양공 12년 초나라를 동맹에 초대했다.

子魚: 자어는 곧 목이이다. 그에 대해서는 『좌전·희공9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禍其在此乎! 君欲已甚: 매우()의 뜻이다.

其何以堪之?於是宋公以伐: 주석 없음.

會于以釋之. 子魚: 禍猶未也未足以懲君: 『공양전』: “송 양공과 초 성왕이 승거지회乘車之會를 하기로 약속했다. 공자목이가 조언하였다. ‘초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로 힘은 세고 의로움을 모르는 나라입니다. 청컨대 군대를 거느리고 가십시오.’ 양공은 ‘그럴 수 없다. 내가 그와 승거지회를 하기로 약속했으니 내가 말한 것을 어길 수는 없다. 안 된다.’라고 대답하고 끝내 호위병 없이 수레를 타고 회합에 갔다. 초나라는 과연 군사를 매복해 놓고 양공을 사로잡아 송나라를 공격했다. 송 양공은 공자목이에게 ‘그대는 돌아가 나라를 지키라! 송나라는 그대의 나라, 그대의 조언을 따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하게 했다. 공자목이가 대답했다. ‘군주께서 나라를 언급하시지 않더라도 송은 실로 소신의 나라입니다.’ 그는 즉시 귀국하여 나라를 수비하였다. 초나라 군사가 와서 송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양공을 죽일 것이다.’ 응답했다. ‘우리는 사직의 신령을 믿고 의지한다. 우리는 이미 다른 군주가 있다.’ 대답을 들은 초나라는 비록 양공을 죽인다 해도 송나라를 얻을 수 없음을 알고서 송 양공을 석방했다. 양공은 풀려나자 위나라로 도망쳤다. 공자목이가 ‘국인은 군주를 위해 나라를 지켰는데, 군주께선 왜 귀국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을 전한 후 양공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기·송세가』는 『좌전』의 내용을 모두 채록하고 있고, 「초세가」는 “성왕 33, 송 양공이 회맹을 주관하고 초나라를 불렀다. 초 성왕이 분노했다. ‘과인을 부르다니, 내 가서 그를 욕보이리라.’ 드디어 맹회 장소로 떠났고, 우에 이르러서 송 양공을 잡아 욕보인 후 귀국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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