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기근을 구제한 진 목공, 배를 띄워 수송한 사역汎舟之役 (5.13.4.)

겨울, 연이어 흉년을 겪은 진나라가 에 사신을 보내 곡식을 팔 것을 요청했다

진 목공이 자상子桑에게 물었다. “저들에게 곡식을 줘야 하는가?” 

자상이 대답했다. “거듭 은혜를 베풀고 그 보답을 받는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거듭 은혜를 베풀고도 진 보답하지 않는다면 필경 진의 백성들도 군주를 이반할 것이고 민심이 이반하면 저들을 토벌했을 때 돕는 자들이 없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목공이 백리百里에게 물었다. “저들에게 곡식을 보내야 하는가?” 

“자연재해는 돌고 돌아 나라마다 번갈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재난을 구제하고 이웃을 돕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도리를 실천하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비정의 아들 비표가 당시 진나라에 있었는데 진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목공이 말하였다. “진의 군주를 미워할 뿐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은 이때 진나라로 곡식을 수송했는데 수송 행렬이 진의 도성 옹에서 진의 국도 강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이를 ‘배를 띄워 수송한 사역(汎舟之役)이라고 불렀다.


원문 5.13.4. 

薦饑使乞糴于. 秦伯子桑: 與諸乎?對曰: 重施而報君將何求? 重施而不報其民必而討焉無衆, 必敗.百里: 與諸乎?對曰: 天災流行國家代有救災·恤鄰道也. 行道, 有福.㔻鄭之子請伐. 秦伯: 其君是惡其民何罪?於是乎輸粟于相繼命之曰汎舟之役.


관련 주석

薦饑: 『이아·석어』: “천은 거듭 뜻이다.” 「석천」: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을 기라 하고, 연이어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을 천이라고 한다.” 즉 연이어 수확을 하지 못함이다. 두예는 보리와 쌀이 모두 익지 않는 것을 천기薦饑라고 해석했는데 옳지 않다.

使乞糴于. 秦伯子桑: 與諸乎?: 자상子桑은 진나라 대부 공손지公孫枝이다. 여기서 “제”자는”의 뜻으로 쓰였다.

對曰: 重施而報: 중시란 이오가 즉위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다시 기근을 구제하는 일을 가리킨다.

君將何求? 重施而不報其民必: 이반하다.

而討焉無衆, 必敗.百里: 與諸乎?: 「진본기」와 「제세가」모두 이 일을 다루고 있는데 백리를 백리해百里奚 쓴다. 백리는 씨인데, 『여씨춘추·불구편』에선 백리해를 백리씨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고서에선 다수 백리해를 백리로 간략히 호칭한다. 『순자·성상편成相篇』의 “오자서는 피살되고 백리는 쫒겨 갔다(子胥見殺百里), 『초사·석왕일惜往日』의 “백리가 포로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百里之爲虜), 『이관자鶍冠子·지편知篇』의 “진나라가 백리를 등용하여(百里)” 「世賢篇」의 “백리가 진나라의 병통을 고쳤다(百里), 『역립수지복易林隨之復』의 “진 목공이 백리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百里), 『승지곤升之坤』의 “백리가 남쪽으로 떠났다(百里南行)” 등이 모두 그 증거이다. 그런 까닭에 혹자는 백을 씨로 보고 리를 이름으로 보기도 하고(우창의 『향초교서』), 혹자는 본문의 백리는 백리맹명시百里孟明視(양리승의 『보석』)로 보기도 하지만 모두 근거가 없다.

對曰: 天災流行國家代有: 『설문』: “대는 바꾸다 뜻이다.代有란 각국이 교대로 재난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救災·恤鄰道也. 行道, 有福.㔻鄭之子請伐. 秦伯: 其君是惡: 惡其君 도치문.

其民何罪?於是乎輸粟于: 호위胡渭 『우공추지禹貢錐指19에서는 당시 열국 간 곡식을 운송했던 일을 열거하며, “수송에 앞서 거리와 장애물 그리고 길이 등을 고려할 때, 곡식을 껍질 채 수송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본문의 곡식이란 도정한 쌀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도정된 쌀 오래 보존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주장이다. 쌀은 여름이 지나면서 벌레가 생기기 때문에 모두 낟알로 저장했다. 현재 발견되는 원시사회 창고에는 낟알 있었다는 사실을 논하지 않더라도 낙양 수함가창隋含嘉倉 유적지에도 역시 낟알 발견되고 있다. 또한 절구로 탈각하는 것은 매우 시간이 걸린다. 운반하는 양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탈곡하여 보내는 것은 낭비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껍질 채 낟알로 운반하여 백성들이 탈각하는데 드는 힘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 호위의 설명은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춘추시대 지도 - '옹'에서 '강'까지


相繼: 진나라의 도읍으로 『사기·진본기』: “덕공 원년 비로소 옹성雍城 대정군大鄭宮 거주하게 되었다.” 이 당시는 노 장공 17년에 해당한다. 현재의 섬서성 봉상현鳳翔縣 남쪽 7리 떨어진 곳에 옛 옹성이 있는데 진 덕공이 거주했던 대정궁이다. 은 진나라의 도읍이다. 현재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 동남쪽이다. 옹에서 강까지는 위하渭河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화음華陰 이르러서 황하로 물길을 갈아타고 다시 동쪽으로 분하汾河 들어섰다가 회하澮河 들어가야 한다.

命之曰汎舟之役: 『국어·진어3』역시 이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까닭에 황하에 배를 띄워 진나라에 곡식을 보냈다(是故氾舟於, 歸糴於)”고 하는데, 위소는 “범이란 물에 띄움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설문』은 “범”과 “범”을 서로 다른 글자(異字)라고 설명하지만 때에 따라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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