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의 내란과 자산子產의 등장 (춘추좌전.9.10.9.)

 


정나라 자산이 등장하다


애초, 자사子駟와 위지尉止가 다툰 적이 있었는데 제후군을 방어할 때 자사는 위지의 전차의 수를 줄였다. 위지가 포로를 획득하자 이번엔 전공을 두고 다투었다. 자사가 위지를 압박하며 말했다. “네 전차 수는 법도에 맞지 않다.” 이어 포로도 바치지 못하게 했다. 애초, 자사가 토지의 경계를 획정할 때, 사씨·도씨·후씨·자사씨 모두 그에게 땅을 빼앗겼다. 이런 까닭에 다섯 종족이 불량배를 모으고 공자들의 무리들의 도움을 얻어 난을 일으켰다.


당시 자사가 당국이었고 자국이 사마, 자이가 사공 그리고 자공이 사도였다. 겨울 10월 무진일(14), 위지尉止·사신司臣·후진侯晉·도여보堵女父·자사복子師僕 등이 불량배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와 새벽에 서궁의 조정에서 집정을 공격해 자사, 자국, 자이를 살해하고, 간공을 위협하여 북궁으로 끌고 갔다. 자공은 낌새를 눈치챘기 때문을 죽음을 면했다. 『춘추』에 “도”라고 쓴 까닭은 주모자 중에 대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사의 아들 자서子西는 변란 소식을 듣고 경계를 갖추지 않고 나가 시신을 수습하고 도적들을 추격했다. 도적들은 이미 북궁으로 들어간 후였기 때문에 자서는 자택으로 돌아와 가병에게 무기를 주려했지만 많은 노예들이 이미 도망쳤고 집안의 기물 역시 상당수 없어진 상태였다


자국의 아들 자산은 변란 소식을 전해 듣자 문지기를 세우고, 가신들을 배치하고, 창고를 잠그고, 재물을 잘 간수하고, 저택의 수비를 마친 후 가병을 정렬하여 집을 나섰다. 병거는 모두 17대였다. 먼저 시신을 수습하고 북궁에 있는 도적들을 공격했다. 자교는 국인들을 인솔하여 자산을 도와 위지와 자사복子師僕을 주살하고 도적의 무리를 일망타진했다. 후진은 진나라로 도망쳤고, 도여보, 사신, 위편 그리고 사제는 송나라로 도망쳤다.


자공이 당국이 되어 맹세문을 작성했는데 관리들로 하여금 각자의 직분을 지키고 집정의 명만 따르게 했다. 대부들과 여러 관부의 수장 그리고 경대부의 자제들이 맹세를 하지 않으려 하자 그들을 죽이려 했다. 자산이 그를 제지하고 맹세문을 불사를 것을 건의했다. 자공은 거절하며 말했다. “맹약을 작성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한 것인데 저들이 분노한다고 소각하면 이는 저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된다. 다시 국정이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자산이 말하였다. “대중의 분노는 범하기 어렵고 전횡은 성취하기 어려운 데, 두 가지 난제를 결합해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는 것은 위기로 가는 길입니다. 맹약을 불태워 대중을 안정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귀하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고, 저들은 또 안정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정의 전횡은 욕심 내봐야 달성하기 어렵고 대중의 뜻을 범하면 재앙을 불러 일으킬 것이니 반드시 제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그래서 창문倉門 밖에서 맹약을 불태웠고, 국인들은 이후 안정되었다



원문

(9.10.9.) , 子駟尉止有爭將禦諸侯之師而黜其車. 尉止又與之爭. 子駟尉止: 爾車非禮也.遂弗使獻. 子駟爲田洫司氏·堵氏·侯氏·子師氏皆喪田焉. 故五族聚群不逞之人因公子之徒以作亂.

於是子駟當國子國爲司馬子耳爲司空子孔爲司徒. 冬十月戊辰尉止·司臣·侯晉·堵女父·子師僕帥賊以入晨攻執政于西宮之朝子駟·子國·子耳, 鄭伯以如北宮. 子孔知之故不死. 書曰 ”,言無大夫焉.

子西聞盜不儆而出尸而追盜. 盜入於北宮乃歸, 授甲臣妾多逃器用多喪. 聞盜, 爲門者群司閉府庫閉藏完守備成列而後出兵車十七乘. 尸而攻盜於北宮帥國人助之尉止·子師僕盜衆盡死. 侯晉堵女父·司臣·尉翩·司齊

子孔當國爲載書以位序·聽政辟. 大夫·諸司·門子弗順將誅之. 止之請爲之焚書. 子孔不可: 爲書以定國衆怒而焚之是衆爲政也國不亦難乎?: 衆怒難犯專欲難成合二難以安國危之道也. 不如焚書以安衆子得所欲衆亦得安不亦可乎? 專欲無成犯衆興禍子必從之!乃焚書於倉門之外衆而後定.



주석

盜殺鄭公子騑·公子發·公孫輒: 『공양』과 『곡량』에선 “비”를 “비”로 쓴다. 동음으로 통가한다. 공자비의 자는 자子駟이다. 정자로는 “비”로 쓰는 것이 옳다. 경문에서 “도”자를 쓴 사례는 여기가 처음이다.

 

, 子駟尉止有爭: 『수경·거수주』에서 권칭의 『진류풍속전』을 인용하여, 진류陳留 위씨이고 정나라 동쪽 변방 옥관獄官 이름이며 동시에 정나라 대부 위씨의 식읍이라고 말한다. 위씨는 그의 관명으로 씨를 삼은 것이다. 위씨현은 현 하남성 개봉시 남서쪽 90리 떨어진 곳이다.

將禦諸侯之師: 앞에서 말한 “제후가 정나라를 공격했다”의 군대를 말한다.

而黜其車: 자사가 위지의 병거 수를 줄였다.

尉止又與之爭: 위지가 포로를 잡자 자사가 또 그와 공적을 다투었다.

子駟尉止: 爾車非禮也.: 자사가 위지를 억압했다. 이미 그의 병거를 줄여 놓고도 다시 법도를 어겼다고 비난했다.

遂弗使獻: 자사가 그의 병거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그가 사로잡은 포로를 바치지 못하게 했다.

子駟爲田洫: 전휼은 밭 사이의 도랑과 밭두둑을 함께 말한다. 전휼의 제도는 『주례·고공기·장인』에 자세하다. 다만 반드시 각국에 통행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子駟爲田洫”은 혹 관개수리를 말하는 것인지, 밭두둑을 정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司氏·堵氏·侯氏·子師氏皆喪田焉: 네 씨족 모두 밭에 손실을 입었다. 자사가 강탈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를 살해할 것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故五族聚群不逞之人因公子之徒以作亂: 오족은 다섯 씨족, 위씨와 밭을 잃은 네 씨족. 은 쾌의 뜻이다. ‘불령지인이란 불량배들이다. 공자의 무리란 양공 8년 자사에게 피살된 자호, 자희, 자후, 자정 등의 일족의 무리이다. 의지하여.



정나라-주요귀족-칠목-자산


於是子駟當國: 어시는 이때에. 당국當國 집정대신(專大政)을 말한다. 당국의 다음은 청정聽政이고 정사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심동의 『소소』에 자세하다.

子國爲司馬子耳爲司空子孔爲司徒. 冬十月戊辰: 14일이다.

尉止·司臣·侯晉·堵女父·子師僕帥賊以入晨攻執政于西宮之朝子駟·子國·子耳: 『좌전·소공4년』에 정나라 사람들은 부친인 자국을 길에서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자산을 비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 세 사람은 거리에서 살해되었을 수 있다.

鄭伯以如北宮: 서궁과 북궁에 대해선 『춘추·희공20년』에 보인다.

子孔知之故不死: 자공은 공자가이다.

書曰”,言無大夫焉: 두예: “위지 등 다섯 사람은 모두 대부가 아닌 사이다. 대부는 경이라고 부른다.

子西聞盜不儆而出: 두예: “자서는 공손하로서 자사의 아들이다.” 경은 경계함이다.

尸而追盜: 는 시신을 수습함이다. 『좌전·선공12년』에 자세하다.

盜入於北宮乃歸, 授甲臣妾多逃: 신첩이란 집안의 남녀 노예.

器用多喪: 상황이 이와 같으므로 도적을 쫓을 수 없었다.

聞盜: 자산의 부친 자국 역시 피살되었다.

爲門者: 문을 지키는 자를 두고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群司: 두예: “중관 즉 일을 나눠 맡을 관리들을 준비한 것이다.

閉府庫閉藏完守備成列而後出: 사병을 정렬한 뒤 집밖으로 나간 것.

兵車十七乘: 두예: 1,275명이다.

尸而攻盜於北宮: 먼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고 위지 등을 공격했다.

帥國人助之: 자교 공손채이다. 『좌전·양공8년』의 주석에 자세.

尉止·子師僕盜衆盡死: 도중이란 “불량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侯晉: 어떤 학자는 후진을 후선다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堵女父·司臣·尉翩·司齊: 두예: “위편은 위지의 아들이고, 사제는 사신의 아들이다.

子孔當國: 두예: “자사를 대신한 것이다.

爲載書以位序·聽政辟: 이는 맹세의 핵심 내용이다. 은 법의 뜻. 두예: “경이하 모든 관리가 자신의 직분을 지키고 집정의 명령을 받으며 조정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大夫·諸司·門子弗順: 대부는 여러 경이다. 제사는 각 부서의 수장이고 문자는 경들의 적자들이다.

將誅之: 두예: “자공은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죽이려 했다.

止之請爲之焚書: 두예: “자공의 행동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맹세문을 불태울 것을 권했다.

子孔不可: 爲書以定國衆怒而焚之是衆爲政也國不亦難乎?: 두예: “나라를 잘 다스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 衆怒難犯專欲難成合二難以安國危之道也. 不如焚書以安衆子得所欲: 국정을 담당하게 된 것.

衆亦得安不亦可乎? 專欲無成犯衆興禍子必從之!乃焚書於倉門之外: 고사기의 『지명고략』은 창문은 정나라의 동남문이라고 설명한다. 두예: “조정 안에서 맹세문을 불태우지 않은 까닭은 맹세문을 불태우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게 하려 한 것이다.

衆而後定: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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