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공을 시해하고 간공을 옹립한 정나라 자사子駟 (춘추좌전.9.7.9.)



정나라 희공이 태자였던 성공 16(기원전 575)에 자한과 함께 진나라를 예방했을때 희공은 자한을 예로 대우하지 않았다. 또 자풍과 함께 초나라를 예방했을 때도 희공은 그를 예로써 대우하지 않았다. 즉위 원년(기원전 570)에 희공이 진나라를 조견하자 자풍은 진나라에 희공을 제소하고 그를 폐위하려고 했지만 자한이 이를 제지했다. 이제 위(정나라)에서 제후들이 회합할 때 자사가 보필했는데 희공은 또다시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시종이 희공에게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고 재차 간언하자 그를 죽여버렸다. 에 이르러 자사는 도적을 사주하여 야밤에 희공을 시해하고 학질로 사망했다고 제후들에게 부고했다. 당시 간공은 다섯 살이었는데 그를 받들어 군주로 세웠다.



원문

(9.7.9.)  鄭僖公之爲大子也之十六年與子罕不禮焉. 又與亦不禮焉. 及其元年朝于欲愬諸而廢之子罕止之. 及將會于子駟又不禮焉. 侍者諫不聽; 又諫殺之. 子駟使賊夜僖公而以瘧疾赴于諸侯. 簡公生五年奉而立之.


주석

十有二月公會晉侯·宋公·陳侯·衛侯·曹伯·莒子·: “위”자를 『곡량』에선 “위”로 쓴다. 같은 글자이며 음은 위 혹은 위이다. 두예는 “(위는) 정나라 땅”이라고 설명했다. 현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부근에 해당한다.

鄭伯髡頑如會未見諸侯丙戌: 병술일은 16일이다.

卒于: “완”자를 『공양』과 『곡량』에선 “원”자로 썼다. 고음이 같아 통가한다.

 

鄭僖公之爲大子也之十六年與子罕: 은 노나라의 성공이다. 노 성공 16년은 정 성공 10년이다.

不禮焉: “언”은 “”와 같다. 자한에게 결례했다는 뜻.

又與亦不禮焉: 자한과 자풍은 모두 정 목공의 아들이고 희공보다 연배가 높다.

及其元年朝于: 정 희공 원년, 노 양공 3년에 해당한다.

欲愬諸而廢之子罕止之. 及將會于子駟又不禮焉. 侍者諫不聽; 又諫殺之: 간언한 시자를 살해한 것.

子駟使賊夜僖公: 「정세가」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약을 써 죽였다고 말한다. 즉 적을 요리사로 보고 독약으로 죽였다고 본 것이다.

而以瘧疾赴于諸侯: 유월의 『평의』는 “학질”이 고본에선 “학질虐疾”로 쓰며 『상서·금등』의 “遘厲虐疾”은 급병暴疾 유사하다고 말한다. 즉 시해한 후 급병으로 죽었다고 부고한 것. 일의 정황에 비추어 그럴듯하다.

簡公生五年: 희공의 아들.

奉而立之: 고사기의 『기사본말』에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희공은 이번 행차를 통해 초나라를 버리고 진나라를 추종하려고 했다. 자사는 집관(재상)으로서 진나라를 따르자고 주장하는 여러 대부들에게 성공의 명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반대했다. 초나라를 버리려고 한 것은 희공이지 자사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나라의 자낭이 정나라를 침략하려 하자 자사와 자국 그리고 자이는 초나라를 따르려고 했고, 자공과 자교 그리고 자전 등은 진나라를 따르려했다. 자사는 ‘초나라를 따르십시오. 그로 인한 허물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사는 하루도 초나라를 잊은 적이 없다. 희공이 초나라를 버리고 진나라에 복종하려 하자 결국 시해당하게 되었다. 이 일은 당시 상황에서 필연적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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