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取’, ‘멸滅’ 그리고 ‘입入’의 범례 (춘추좌전.9.13.2.)
시나라의 변란
여름, 시邿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 나라가 삼분되었다. 노나라 군이 시邿나라의 변란을 구제하러 나섰다가 결국은 시나라를 취했다. 범례에 따르면 ‘취取’는 일의 성사가 쉬운 것을 말한다. 대규모 군사를 동원했을 때는 ‘멸滅’을 쓰고, 땅을 점유하지 않을 경우에는 ‘입入’을 쓴다.
원문
(9.13.2.) 夏,邿亂,分爲三. 師救邿,遂取之. 凡書取,言易也. 用大師焉曰滅; 弗地曰入.
주석
⊙夏,取邿: 시邿를 『공양』은 “시詩”로 쓴다. 『석문』: “시의 음은 시이다.” 『설문』에 근거하면 시邿는 부용국이다. 또 『산동통지』에 따르면 현 제녕시濟寧市 남쪽 50리 떨어진 곳이다.
전해지는 이기에 시백정邿伯鼎과 시견기邿遣旣가 있다. 또 시계정寺季鼎과 시계기寺季旣가 있는데 사寺가 곧 시이다. 『시백정』의 명문에 “시백邿伯이 맹임孟妊을 위해 선정膳鼎을 처음 제작했다”라는 문구가 있다. 즉 시邿는 임성妊姓이다. 맹임은 아마도 그의 부인일 것이다.
▣夏,邿亂,分爲三: 나라도 작은데 내분까지 있어 셋으로 분열되었다.
▣師救邿: 노나라가 시나라 구원에 나섰다. 노나라를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노나라 사관의 기술이기 때문에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遂取之: 『사계기명』에 “시계고공寺季故公이 보배로운 기를 만들었다”등의 언급이 있다. 유심원의 『기고실길금문술』권16에서 완원을 인용, “사寺는 시邿의 생략된 형태이다. 시계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군주일 것이다. 그래서 ‘고공’이라 썼다.”고
설명한다.
▣凡書取,言易也: 『춘추』전체를 통틀어 다른 나라 혹은 어떤 읍을 “취했다”라고 쓴 경우는 모두 11차례이다. 노나라가 주체가 된 사례가 7번, 제나라가 노나라의 읍을 취한 경우가 애공 8년에 한 차례; 타국이 함께 정벌하여 취한 경우가 3차례이다. 『좌전·선공9년』의
주석을 함께 참조.
▣用大師焉曰滅: 『춘추』에서 “멸滅”을 쓴 경우는 모두 31차례인데 모두 어떤 나라를 대상으로 한다. 시邿 역시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역시 하나의 나라이다. 『좌전·문공15년』의 주석 참조.
▣弗地曰入: 어떤 나라를 쳐서 얻긴 했어도 그 땅을 점유하지 않는 경우 때때로 “입”자를 쓴다. 은공 2년과 문공 15년의 『좌전』주석을 함께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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