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언荀偃에 항명한 난염欒黶 (춘추좌전.9.14.3.)


난염欒黶의 항명



여름, 제후의 대부들(노나라의 숙손표, 진의 순언, 제인, 송인, 위의 북궁괄, 정의 공손채, 조인, 거인, 주인, 등인, 설인, 기인, 소주인 등) 진 도공을 따라 진나라를 정벌하여 역의 전쟁( 9.11.6.)에 보복했다. 도공은 국경에서 기다리고 육경으로 하여금 제후군을 인솔하여 진격하게 했다. 경수涇水에 이르자 선뜻 건너려 하지 않았다. 숙향이 숙손목자(숙손표)를 접견하였는데 목자는 「포유고엽(『시·패풍』) 읊었다. 숙향이 자리를 물러나 배를 준비했다. 노나라와 거나라 군사가 먼저 경수를 건넜다.

정나라의 자교가 위나라의 북궁의자北宮懿子를 접견하고 말했다. “남과 함께 행동하면서 뜻이 견고하지 않으면 그보다 미움을 살 일이 없습니다. 사직을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의자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두 사람은 제후의 진영으로 가서 도강할 것을 권고했다. 경수를 건너 주둔하였다. 이 경수의 상류에 독을 풀자 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정나라의 사마 자교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자 모든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역림까지 이르렀지만 진나라에게서 강화를 얻지 못하였다.

순언荀偃이 명령을 내렸다. “닭이 울면 전차에 멍에를 매고 우물을 메우고 아궁이를 평탄하게 하라. 그리고 오로지 나의 말머리만 쳐다보라.

난염欒黶이 말하였다. “일찍이 진나라의 명에 이런 령은 없었다. 나는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가 버렸다. 하군이 그 뒤를 따랐다. 좌사가 위장자에게 말했다. “중항백(순언)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으십니까?

장자가 말했다. “부자께서 각 군의 장수의 명을 따르라 하셨다. 난백이 우리의 장수이니 나는 그를 따를 것이다. 장수의 명을 따르는 것이 바로 부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백유伯游(순언)가 말했다. “내 명이 실로 잘못되었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많은 아군을 진나라에 포로로 줄 뿐이다.” 이내 총퇴각을 명령했다. 나라에선 이 일을 가리켜 “시일만 끌다가 돌아온 전쟁”이라고 불렀다.

난침欒鍼이 말했다. “이번 전쟁은 역의 패배에 대한 보복이다. 군을 동원하여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진의 수치이다. 나는 융로의 두 번째 서열인데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사앙士鞅과 함께 적진으로 내달렸고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사앙은 살아 돌아왔다. 난염이 사개에게 말하였다. “내 아우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귀하의 아들이 초래한 일이오. 내 아우는 죽고 당신의 아들은 살아 돌아왔으니 이는 그대의 동생이 내 동생을 죽인 것과 같소.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나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소.” 사앙은 진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제나라의 최저, 송나라의 화열, 그리고 중강仲江이 회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런데도 『춘추』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일에 태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향의 회맹에도 참석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기록하지 않았다. 위나라의 북궁괄은 향의 회맹 당시에는 『춘추』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번 정벌에 기록한 것은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이다.

경공이 사앙에게 물었다. “진나라의 대부 중 누가 먼저 멸족할 것 같은가?

“아마 난씨가 아니겠습니까?” 사앙이 대답했다.

“교만하기 때문인가?” 경공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난염은 교만하고 난폭이 매우 심하나 오히려 자신은 화를 면할 것이고 아마 그의 아들 영 때에 멸족할 것입니다.” 사앙이 대답했다.

“무슨 까닭인가?” 경공이 말했다.

“무자(난서)가 백성에게 베푼 은혜는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여 그가 그 아래에서 업무를 보던 아가위나무조차 아꼈던 일과 같습니다. 하물며 그의 아들인 난염은 어떠하겠습니까? 난염이 죽으면 영의 은혜는 아직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했을 것이고, 무자가 베풀었던 은혜도 잊힐 것입니다. 반면 난염에 대한 원망은 실로 크게 드러날 터이므로 난씨의 멸망은 그때일 것입니다.” 진 경공은 그의 말이 지혜롭다고 여겨 그를 위해 진나라에 청을 넣어 돌려보냈다.



원문

(9.14.3.) 諸侯之大夫從晉侯以報之役也. 晉侯待于竟使六卿帥諸侯之師以進. , 不濟. 叔向叔孫穆子穆子匏有苦葉」,叔向退而具舟. ·人先濟. 鄭子衛北宮懿子: 與人而不固取惡莫甚焉若社稷何?懿子. 二子見諸侯之師而勸之濟. 而次. 人毒上流師入多死. 司馬師以進師皆從之至于不獲成焉. 荀偃令曰: 雞鳴而駕塞井夷唯余馬首是瞻.欒黶: 晉國之命未是有也. 余馬首欲東.乃歸. 下軍從之. 左史謂魏莊子: 不待中行伯?莊子: 夫子命從帥欒伯, 吾帥也吾將從之. 從帥, 所以待夫子也.伯游: 吾令實過悔之何及多遺.乃命大還. 人謂之遷延之役.

欒鍼: 此役也之敗也. 役又無功之恥也. 吾有二位於戎路敢不恥乎?士鞅, 死焉. 士鞅. 欒黶: 余弟不欲往, 而子召之. 余弟死, 而子來是而子殺余之弟也. 弗逐余亦將殺之.士鞅.

於是齊崔杼·宋華閱·仲江會伐. 不書惰也. 之會亦如之. 衛北宮括不書於書於伐攝也.

秦伯問於士鞅: 大夫其誰先亡?對曰: 欒氏?秦伯: 以其汏乎?對曰: . 欒黶汏虐已甚猶可以免其在!秦伯: 何故?對曰: 武子之德在民人之思召公愛其甘棠況其子乎? 欒黶之善未能及人武子所施沒矣之怨實章將於是乎在.秦伯以爲知言爲之請於而復之.



주석

夏四月叔孫豹晉荀偃···衛北宮括·鄭公孫·······人伐: 진과 진 사이의 전쟁은 희공 33년 효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68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후로 『춘추』는 다시는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諸侯之大夫從侯伐以報之役也: 전투는 『좌전·양공11년』참조.

晉侯待于竟: 경계(국경)와 같다.

使六卿帥諸侯之師以進. : 경수涇水는 남북에 두 수원이 있다. 두 물줄기가 합해진 후 섬서성 빈현과 경양 그리고 고릉을 지나 위하로 흘러든다. 여기 경수를 건넌 곳은 경양현의 남쪽이다.

不濟: 두예: “제후들의 군사들이 강을 건너려 하지 않았다.

叔向叔孫穆子: 숙향은 『좌전·양공11년』에 언급되었던 숙힐이다. 숙손목자는 노나라의 숙손표를 말한다.



춘추시대-진晉나라와 진秦나라


穆子匏有苦葉」,叔向退而具舟: 『시·패풍』. 「노어하」: “진나라의 숙향이 숙손목자를 보고 말했다: ‘제후들은 진나라가 불경하니 토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경수에 도달해선 건너려 하지 않으니 진나라에 이익이 아니오?’ 그가 답했다: ‘저의 임무는 「포유고엽匏有苦葉」에 있고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이에 숙향이 물러나 주우와 사마를 불러 말했다: ‘맛이 쓴 박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고 함께 강을 건너는데 쓸 수 있을 뿐이다. 노나라의 숙손이 「匏有苦葉」를 노래한 것을 보면 그는 반드시 강을 건널 것이다.’” 포는 표주박인데 호로葫蘆라고도 한다. 고대인들은 혹 호라고 쓰기도 했다. 식용으로 쓸 수 없다. 그래서 숙향이 “떨떠름한 박은 사람에겐 소용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깊은 강을 건널 때 물에 띄워 익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숙향이 “함께 강을 건너는데 쓰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갈관자·학문편』의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신세로 태어나 강 가운데서 배를 잃었을 때 하나의 호리병은 천금과도 같다(一壺千金).”는 말은 바로 이 뜻을 취한 것이다.

·人先濟. 鄭子衛北宮懿子: 與人而不固取惡莫甚焉若社稷何?: 북궁의자는 북궁괄이다. 진나라를 추종하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니 어찌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懿子. 二子見諸侯之師而勸之濟: 노나라와 거나라는 이미 강을 건넜고 정나라와 위나라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후의 군대란 곧 제······기와 소주이다.

而次. 人毒上流師入多死: 두예: “독을 탄 물을 먹어서 죽었다.

司馬師以進師皆從之: 양공 19년에 자교가 죽었을 때, 진 도공은 왕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대로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부탁했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至于: 두예: “역림은 진나라 땅이다.” 현 경양현涇陽縣 경수의 서남쪽이다.

不獲成焉: 두예: “진나라가 복종하지 않았다.” 군사에서 획성이란 적이 굴복함이다.

荀偃令曰: 雞鳴而駕塞井夷竈: 우물을 메꾸고 아궁이를 평탄하게(塞井夷竈) 하는 일은 군대의 진을 펼치기 편리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좌전·성공16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唯余馬首是瞻.欒黶: 晉國之命未是有也: 진나라는 종전에 이런 부류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말.

余馬首欲東.: 진나라 병사는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가겠다는 말은 돌아가겠다는 뜻.

乃歸. 下軍從之. 左史謂魏莊子: 不待中行伯?: 중항백은 순언이다. 장자는 위강이다. 좌사左史는 관직의 이름. 『일주서·사기해』: “정월, 왕은 성주에 계셨다. 이른 새벽 삼공三公 좌사左史 그리고 융부戎夫 불렀다.” 『문선·사현부』의 주석에서 고문 『주서』를 인용하여 “주 목왕이 좌사씨 사표와 사량에게 하문했다.” 『좌전·소공12년』에도 좌사 의상倚相 언급된다. 『진서·직관지』: “낭 짓는 일은 주나라 좌사의 임무이다.” 이 좌사는 종군하여 기록하는 사관이다. 과거 학자들의 많은 설명이 있지만 이보다 불명료하다.

莊子: 夫子命從帥: 부자는 순언이다.

欒伯, 吾帥也: 난염이 하군의 장수이다.

吾將從之. 從帥, 所以待夫子也.: 좌사의 “중항백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不待中行伯)?”에서 대 기다리다의 뜻이다. 중군의 장수가 퇴군명령을 내리지 않았았는데 독단적으로 철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 그리고 여기 “所以待”의 대는 응하다/상대하다의 뜻.

伯游: 吾令實過悔之何及多遺.: 다만. 왕인지의 『술문』에 상세하다.

乃命大還: 대환은 전군의 철수.

人謂之遷延之役: 처음에는 제후들의 군사들이 경수를 건너려 하지 않았다가 정나라가 먼저 건넌 후에야 뒤늦게 건넜다. 그리고 역림에 와서는 장수들간 불화 때문에 철군했다. 천연이란 시간만 끌다가 아무런 성취가 없었다는 것.

欒鍼: 此役也之敗也. 役又無功之恥也. 吾有二位於戎路: 난침은 난염의 동생이다. 당시 융우였다. 융로는 장수가 타는 전차이고 융우는 지위가 두 번째이기 때문에 융로의 위치로 보면 내가 두 번째라고 말한 것. 두예: “이위二位, 난염은 하군의 장수이고, 난침은 융우였다.

敢不恥乎?士鞅, 死焉: 사앙은 사개의 아들이다.

士鞅. 欒黶: 余弟不欲往, 而子召之: 같다. 다음의 두 개 “”자 역시 마찬가지다.

余弟死, 而子來是而子殺余之弟也: 대사로서 주격이나 소유격으로 쓰일 수 있다. 『모공정명』의 “告余先王若德”를 보면 소유격을 나타내는 “”자가 없다. 또 “余之弟”는 금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용법이다. 『연경학보』제6기 용경의 『주금문중소견대명사석례』를 참고했다. 본문의 “余之弟”는 『상서·강고』의 “朕其弟”와 같은 사례이다.

弗逐余亦將殺之.士鞅: 주석 없음.

於是齊崔杼·宋華閱·仲江會伐. 不書惰也: 중강仲江 송나라 공손사公孫師 아들이다. 제와 송은 모두 대국이다. 『춘추』의 범례에 따라 당연히 경의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들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태만하여 마치 경수를 건너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과 같아 그저 “인”이라고만 썼다.

之會亦如之: 향의 회맹에서 다만 제인과 송인이라고 쓴 것과 같은 사례이다.

衛北宮括不書於: 두예: “역시 그의 태만함 때문이다.

書於伐攝也: 에는 정돈의 뜻과 보좌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두 뜻이 모두 통한다.

秦伯問於士鞅: 大夫其誰先亡?對曰: 欒氏?秦伯: 以其汏乎?對曰: . 欒黶汏虐已甚: 이심已甚은 매우 심함.

猶可以免其在!: 은 난염의 아들이다.

秦伯: 何故?對曰: 武子之德在民人之思召公愛其甘棠況其子乎?: 두예: “무자는 난서로서 난염의 부친이다. 소공 석은 소송을 심리할 때 아가위 나무 아래에서 했는데 주나라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그 나무를 없애지 않고 벌목하지도 못하게 했다. 「소남」에 있는 시이다.

欒黶之善未能及人武子所施沒矣: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베풀었던 은혜는 점점 기억되기 어려워진다.

之怨實章: 은 밝게 드러난다.

將於是乎在.: 이 때문에 장차 죽을 것.

秦伯以爲知言爲之請於而復之: 양공 16년 봄, 사앙은 공족대부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귀국한 일은 16년 이전이어야 한다. 진나라가 난씨를 멸한 사건은 『좌전·양공21년』의 기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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