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주나라 의보儀父 - 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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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공이 주의 의보儀父와 멸(산동성 사수현泗水縣)에서 동맹을 맺었다 - 의보는 주나라 군주 극이다. 아직 왕명을 받지 않아 『춘추』에 작위를 쓰지 않았다. “의보”라고 쓴 것은 그를 높인 것이다. 은공이 군주의 지위를 대리하여 주나라와 우호를 맺기 원했기 때문에 멸의 동맹이 성립된 것이다.


1.1.2. 三月, 公及儀父盟于 - 子克. 未王命, 故不書爵.  儀父, 貴之也. 公攝位而欲求好於, 故爲之盟.


해설


三月, 公及儀父盟于: 공은 노 은공이다. 『춘추』에서 으로만 칭할 경우 모두 노나라 군주이다.

, 국명으로 조성曹姓이다. 왕국유의 『관당집림·주공종발公鐘跋』을 참조하였다. 최초의 도읍은 현재의 곡부현曲阜縣 동남쪽이었고, 노나라의 부용국이었다. 후에 현재의 추향鄒縣 동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예기·단궁』과 『공양전』에선 모두 “주루”라고 쓰고, 『국어·정어』와 『안자춘추·내편상삼』그리고 『맹자』에선 모두 “추”라고 쓴다. 주루를 빠르게 발음하면 음이 변한다. 전해지는 이기로는 주공경종牼鐘, 주공화종公華鐘(둘 모두 주자를 로 쓴다), 주공종公鐘, 주공탁종饦鐘 등이 있다. 의보는 주나라 군주의 자이고 이름은 극이다. 이외 조성의 주나라가 있는데 초나라의 이웃나라이다. 호북성 황강黃岡(진직의 『금문습유』에 보인다)에 있었다.


춘추좌전 지도 - 주나라


결맹법을 보면, 먼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소나 양 혹은 말 등을 희생물로 삼아 구덩이 위에서 죽여 왼쪽 귀를 잘라 반에 담고, 그 피를 취하여 제기(. 음은 대)에 담는다. 맹약(고대에는 재서載書라고 불렀다. 생략하여 재 혹은 서라고도 부른다)을 신께 낭독하여 고하고, 맹약에 참석한 한 명 한 명이 모두 희생의 피를 마시는데, 고대인들은 이를 삽혈歃血이라고 불렀다. 삽혈을 마친 후 맹약의 정본은 희생의 위에 놓고 구덩이에 매장하며 부본은 결맹한 이들이 각각 가지고 돌아간다. 1972년 제4기 『문물』의 「후마동주맹세유지侯馬東周盟誓遺址」에 그 맹약이 실려 있으니 참고할만하다


, 노나라 땅이다. 정공 12년의 기사에 나오는 “고멸姑蔑”이다. 현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동쪽 45 떨어진 곳에 있다. 고멸을 본문에선 생략하여 이라고 칭했는데, 혜동의 『좌전보주』: “은공의 이름이 고식姑息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관이 피휘한 것이다.” 『춘추경전집해후서』에서 인용한 『죽서기년』: “노 은공과 주 장공이 고멸에서 결맹했다즉 바로 고멸로 쓰고 있다. 『죽서기년』은 위나라 사서이다. 노나라 군주의 이름을 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를 썼다. 역시 혜동의 주장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三月, 公及儀父盟于 - 子克: 온전한 구는 물론 의보, 주자 극이다가 되어야 한다. 의보가 주어인데 앞글을 이었기 때문에 생략했다. 고서에는 다수 이런 문법이 있다. 극은 주나라 군주의 이름이다. 『춘추·장공16년』의 邾子克卒이를 통해 좌씨는 극이 이름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방포의 『춘추직해』: “『춘추』는 를 쓰지 않는 법을 따른다극은 의보의 아들이다등등의 주장이 있다. 고동고는 이 때문에 『춘추에서 자를 쓰지 않는 법에 대한 논고』를 지었다. 『춘추』에서 를 쓰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방포와 고동고의 주장은 개요는 알았지만 특례는 놓쳤다

未王命, 故不書爵儀父, 貴之也: 이 문구는 『춘추』를 해석한 말이다. 『춘추·장공16년』의 邾子克에서 자는 작위다. 본문에서 주자로 언급하지 않은 까닭에 대해 좌씨는 당시 아직 왕명으로 (작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예의 주석은 부용국의 군주가 왕명을 받기 전에는 이름을 칭한다는 예가 있다. 주자 극은 스스로 대국과 교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이름 대신 자를 써서 높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춘추』의 예를 살펴보면, 소국이 문화가 낙후되거나 혹은 변두리에 있는 만·이·융·적 등은 모두 그 군주를 자라 칭하고 있다. 이기의 명문을 보면, 『주공경』, 『주공화』, 『주공탁』 등 세 종에선 모두 으로 호칭하고 있다. 주백격, 주백어융정 등에선 모두 으로 호칭한다

公攝位而欲求好於, 故爲之盟: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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