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잘못된 이름 짓기 - 구仇, 성사成師


진나라 내전과 잘못된 이름



애초, 목공의 부인 강씨가 조(산서성 안읍진)의 전쟁 당시 태자를 낳아 구라고 이름지었다. 그의 아우는 천무千畝(산서성 안택현)의 전쟁 때 출산했고, 이름을 성사成師라고 지었다.

사복師服이 말했다. “기이하다, 군자가 아들의 이름지음이! 무릇 이름은 만물의 를 제정하고, 에서 물의 예가 나오며, 예로써 정치를 구현하고, 정치로 백성을 바르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가 성취되고 백성들은 이에 순종한다. 이것이 바뀌면 혼란이 발생한다. 올바른 인연을 비라 하고 잘못된 짝을 구라 하는데 이것이 고대로부터의 이름지음이다. 지금 군주는 태자를 구라 이름짓고, 동생을 성사成師라 하였으니 혼란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형이 쇠퇴해지지 않겠는가?

노 혜공 24, 진나라에 분란이 시작되었는데 환숙桓叔을 곡옥曲沃에 봉건했기 때문이다. 정후靖侯의 서손 난빈欒賓이 그를 보좌했다.

사복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나라의 존립은 뿌리가 크고 말단이 작아야 견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자는 제후를 봉건하고, 제후는 경대부를 세우며 경은 측실(側室: 장자를 제외한 아들 중 하나를 세운다)을 두고, 대부는 이종(貳宗: 종실 자제 중 하나를 세운다)을 두며, 사는 자신의 자제들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며, 서인, 공인, 그리고 상인들은 각각 친소를 나누어 모두 등차가 있게 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윗사람을 섬기며 아랫사람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지 않게 된다. 지금 진나라는 왕실의 기내에 있는 제후인데, 또 나라를 봉건하여 이미 본가가 쇠약해졌으니 오래 지속될 수 있겠는가?

노 혜공 30, 진의 반보潘父가 소후를 시해하고 환숙을 옹립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진나라는 효후를 세웠다. 혜공 45, 곡옥 장백이 익(산서성 익성현 동남쪽. 진 국도)을 정벌하여 효후를 죽였다. 익의 사람들은 효후의 아우 악후를 옹립했다. 악후는 애후를 낳았다. 애후는 형정陘庭(익성현 동남쪽)을 공격했다. 형정의 남쪽 지역 사람들이 곡옥이 익을 공격할 수 있게 길을 인도했다.


원문

(2.2.8.) 晉穆侯之夫人姜氏之役生太子命之曰. 其弟以千畝之戰生命之曰成師

師服: 異哉, 君子之名子也! 夫名以制義義以出禮禮以體政政以正民是以政成而民聽. 易則生亂. 嘉耦曰妃怨耦曰仇古之命也. 今君命大子曰弟曰成師始兆亂矣. 兄其替乎?

之二十四年始亂故封桓叔曲沃. 靖侯之孫欒賓傅之

師服: 吾聞國家之立也本大而末小是以能固. 故天子建國諸侯立家卿置側室大夫有貳宗士有隸子弟庶人··各有分親皆有等衰. 是以民服事其上而下無覬. 甸侯也; 而建國本旣弱矣其能久乎?

之三十年晉潘父昭侯而立桓叔不克. 人立孝侯. 之四十五年曲沃莊伯孝侯. 人立其弟鄂侯. 鄂侯哀侯. 哀侯陘庭之田. 陘庭南鄙曲沃.


주석

晉穆侯之夫人姜氏之役生太子命之曰: 『사기·진세가』: “헌후獻侯가 재위 11년 만에 죽었다. 아들 목후穆侯 비생費生이 즉위했다(비생費生은 본래 비왕費王으로 쓴다. 여기서는 「십이제후년표」와 풍산楓山, 삼조三條본을 따라 교정했다). 목후 4년 제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7년 조를 공격할 때 태자 구를 얻었다.” 「연표」에 근거하면, 목후가 조를 토벌한 일은 주나라 선왕 23년이고, 노나라 효공2년이었다. 는 조융條戎으로서 『죽서기년』은 “왕의 군대와 진나라 목후가 함께 조융條戎과 분융奔戎을 공격했다. 왕의 군대가 패주했다”고 기록한다. 왕의 군대가 패주했다면 진나라의 군대 역시 패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후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고 이로 인해 아들의 이름을 구라고 지었다. 산서성의 옛 안읍현에 현재 안읍진安邑鎭의 북쪽 3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조강鳴條岡이 있었는데 옛 조융의 영역이다. ‘之役은 조에서의 군역/전투의 뜻이다.

其弟以千畝之戰生命之曰成師: 천무千畝란 지명은 두 곳이 있고, 천무에서의 전쟁 역시 두 번이 있다. 하나는 주나라 땅으로 전쟁은 주 선왕 39년에 있었다. 『국어·주어』의 “선왕이 즉위하여 천무를 친히 경작하지 않았다. 39년 천무에서 전쟁이 있었는데, 왕의 군대가 강씨姜氏의 융에게 패했다”라는 기사가 이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진나라 땅으로 현재 산서성 안택현의 북쪽 90리 떨어진 곳이다. 두예의 주석을 보면 천무를 현재의 개휴현介休縣으로 보고 있는데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은 주 선왕 26년에 있었다. 『사기·진세가』의 “(목후)10년 천무를 공격하여 공적이 있었다. 차남을 얻었는데 이름을 성사成師라고 지었다”라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전쟁은 주 선왕의 전쟁보다 13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또 진나라가 승리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주 선왕과 함께 했던 전쟁(주 선왕 23년의 조융 공격)에서 패했던 것과는 다르므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제소남齊召南 『주소고증注疏考證』을 참고하라.

師服: 사복은 진나라 대부이다.

異哉, 君子之名子也! 夫名以制義: 이름에는 반드시 그 뜻이 있고 또 의에 부합해야 한다. 『논어·자로』의 “그러므로 군자가 이름을 부여한 일은 반드시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故君子名之, 必可言也)”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義以出禮: 예는 의에서 나온다. 의는 예의 근원이다.

禮以體政: 체는 “체용”의 체이다. 즉 예란 정치와 정법의 근간이라는 뜻이다.

政以正民: , 모두 소리로 뜻을 풀이한 예다. 『좌전·정공15년』의 “무릇 예란 삶과 죽음의 근간()이다”와 『논어·안연』의 “정이란(바르게 하다)이다”라는 것들이 모두 그 예다.

是以政成而民聽. 易則生亂: 은 어긋나다.

嘉耦曰妃怨耦曰仇: 아름다운 인연을 비라 한다. 비는 곧 배우자이다. 악연을 구라고 한다.

古之命也: 곧 명이다.



춘추시대-진나라내전-곡옥
춘추좌전 - 곡옥의 내전


今君命大子曰弟曰成師始兆亂矣: 命大子 名大子 즉 장자의 이름을 지음이다. 조란兆亂 혼란의 조짐이다.

兄其替乎: 는 쇠미하다. 『사기·진세가』: “진나라 대부 사복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로다, 군주께서 아들의 이름을 지음이! 장자를 구라 이름지었는데 구란 원수이다. 차남을 성사라 지었다. 성사는 큰 이름이며, 크게 성취하다의 뜻이다. 이름은 명으로 비롯되고; 정해진 분수()로서 비롯된다. 이제 적서의 이름이 뒤바뀌었으니 차후에 진나라에 혼란이 생기지 않겠는가?’” 사마천이 인용한 사복의 말은 『좌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가 말한 “적서의 이름이 뒤바뀌었다”는 그 자체 한 뜻을 이룬다. 이것을 가지고 본문의 “易則生亂”의 “역”을 해석할 수는 없다. 『좌전』의 역자는 여전히 위반의 뜻이다. 문후 구 주나라 왕실을 평화롭게 안정시켰고, 천자로부터 큰 영광을 받았다. 『상서·문후지명』에서의 문후가 바로 이 사람이다. 문후가 죽은 후에 비로소 진나라에 혼란이 발생하며 그후 68년이 지나서야 곡옥의 무공이 진나라 땅을 병합한다. 주나라 희왕은 괵공을 시켜 곡옥의 백을 진나라 제후로 인정하도록 했다.

之二十四年始亂故封桓叔曲沃: 『석경』과 대부분의『경』과 『좌전』에서는 “二十”을 모두 “입廿”으로, 三十”은 “삽”으로 쓴다. 이하 모두 같다. 혜는 노나라의 혜공을 말한다. 혜공 24년은 주나라 평왕 26년이며 춘추 시대 개시 23년전이다. 『좌전』에서 과거의 일을 서술할 때, 노나라의 년대를 사용할 때는 “혜공 24년” 등으로 쓰고, 타국의 년대로 쓸 때는 “진 문공의 마지막 해(季年), 제 양공 2, 정나라의 사건을 기록할 때, 4, 원년 등으로 쓴다. 여러 제후국이 문서로 경위를 통보할 때, 해당 본국의 해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예가 있는데, 예를 들면 과군寡君 즉위 3, 14 7, 15 5, 문공 2 6, 4 2, 2 6, 4 3월 등이다. 또 통보해 오는 나라의 해를 기준으로 쓰는 경우로는 진 선군先君 도공悼公 9년 등이 있다. 어떤 경우는 군주가 아닌 특별한 사건을 기준으로 한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사수沙隨에서 회합이 있었던 해, 이의夷儀에서 회합이 있었던 해, 노나라 숙중혜백叔仲惠伯이 승광承匡에서 극성자郤成子와 회합을 가졌던 해, 호량淏梁의 다음 해, 형서를 주조했던 해, 제나라와 연나라가 화평을 맺은 달, 범선자范宣子가 제후들에게 정빙政聘을 한 해 등이 있다. 당시 제후의 기년은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않았는데, 주나라가 명목상으로는 천하의 공통된 주인이었지만 주나라의 모왕 모년을 사용하여 기준을 잡은 사례는 없다. 곡옥에 대해서는 『좌전·은공5년』의 주석을 참조.

靖侯之孫欒賓傅之: 『사기·진세가』: “문후文侯 구가 죽자 아들 소후昭侯이 즉위했다. 소후 원년 문후의 동생 성사를 곡옥曲沃 봉건했다. 곡옥 읍은 익보다 컸다. 진나라 군주의 도읍이다. 성사는 곡옥에 봉건되자 환숙桓叔이라 칭했고, 정후靖侯의 서손庶孫 난빈欒賓이 환숙을 보좌했다. 환숙은 이때 58세로서 덕이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좌전』의 부는 곧 보좌함의 뜻이다. 『사기색은』은 『세본』을 인용하여 “난숙은 빈보賓父이다”라고 했는데 빈보는 곧 난숙의 자이다. 정후는 공영달의 『소』에서 서술한『사기·진세가』를 따르면 정후는 희후僖侯, 희후는 헌후獻侯, 헌후는 목후穆侯, 목후는 환숙桓叔 낳았으므로 정후는 환숙의 고조가 된다. 난빈은 정후의 서손이므로 환숙의 작은 조부叔祖父이다.

師服: 吾聞國家之立也本大而末小是以能固: 『사기·진세가』와 「연표」는 모두 사복의 말을 군자의 말로 쓰고 있다.

故天子建國: 천자가 제후를 봉건하다.

諸侯立家: 제후는 채읍을 나누어 경대부와 함께 한다. 경대부를 가 한다.

卿置側室: 측실側室의 뜻은 상당히 많다. 『좌전』에선 측실이란 말을 세 번 쓴다. 두예는 “측실이란 중자이며 그중 하나를 세워 이 관직을 내린다(側室, 衆子也, 得立此一官)”라고 설명하여 측실을 관직명으로 보고 있다. 『좌전·문공2년』의 “조씨에게는 측실이 있는데 이름이 천穿이다(有側室曰穿)”에 대해 두예는 “측실은 방계의 자식(支子)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다른 의미로 본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관직명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조돈趙盾 진나라의 정경이고, 조천은 조숙趙夙의 서손이다. 조돈에게는 종부형제가 된다(자세한 것은 『좌전·문공12년』의 주석을 참조). 즉 측실로 세워지는 인물이 반드시 친자제가 될 필요는 없고 종가의 여럿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이것이 좌씨의 측실의 의미이다. 『한비자·팔간편八姦篇』의 “군주가 어리석고 측실이 현명하며, 태자의 자질이 가볍고, 서자가 강건하며, 관리가 약하고 백성들이 뛰어나다. 이와 같으면 나라가 시끄러워진다. 나라가 혼란해지면 멸망할 수도 있다.” 이는 측실을 군주의 여러 동생으로 본 것이다(왕선신王先愼은 측실을 군주의 부형 항렬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의미이다. 『예기·단궁하』의 “먼 형제의 상을 전해듣게 되면, 측실에서 곡을 한다. 측실이 없을 경우에는 문 안의 오른쪽에서 곡을 한다”와 『예기·내칙』의 “처가 아이를 낳으려 할 때 출산월이 되면 측실에 거한다. 지아비는 몸을 재계하고 측실의 문에 들어가지 않는다”등에서 말한 측실은 어떤 특정한 방을 가리키고 오늘날의 옆방과 같다. 또 하나의 의미이다. 『한서·남월전南粤傳』에 기재된 『문제사조타서文帝賜趙佗書』의 “짐은 고황제 측실의 자손이다”에 대해 안사고는 “정비의 소생이 아니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했다. 『회남자·수무편修務篇』의 “측실들이 북을 다투다”와 『남사·양종실전하粱宗室傳下』의 “안성강왕安成康王 그의 모제인 시흥왕始興王 대해 문제는 그가 어릴 적에 고아가 된 것을 애석해했다. 측실인 진씨에게 명하여 두 아이의 어미 노릇을 하도록 했다.” 또 『위방전韋放傳』의 “방 오군吳郡 장솔張率 모두 측실이 회임을 했기 때문에 사돈을 맺기로 했다.”는 여기서는 측실을 애첩의 통칭으로 본 것이다.

大夫有貳宗: 이종貳宗 역시 관명이다. 대부의 종실 자제를 임명한다.

士有隸子弟: “사”는 자신의 자제를 노역시킨다. “사” 스스로는 “종자宗子 즉 가장家長이다. 상세한 내용은 양관楊寬 『예신탐禮新探』을 참조하라.

庶人··各有分親皆有等衰: 음가는 최이고, 차등의 뜻이다. 생각건대 『춘추·은공5년』에서의 “등렬”의 뜻, 즉 등급으로 보인다. 이 말은 서민으로부터 공상까지는 그 안에서 다시 등급을 나누지 않고, 친밀함과 소원함의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분별만이 있다는 의미이다.

是以民服事其上: 복사服事는 『좌전·희공21년』의 “여러 중원의 나라를 섬기고 있었다(以服事諸夏)”의 주석을 참조하라.

而下無覬: 의 음은 기이다. 의 음은 유이다. 기유는 분수가 아닌 것을 바란다는 뜻이다.

甸侯也: 은 전복甸服이다. 『국어·주어상』의 “선왕의 제도에 따르면 방내를 전복이라 한다”에 대해 위소는 “방내邦內 천자의 기내에 속하는 사방 천리의 땅을 말한다. 「왕제」에 보면, ‘사방 천리의 안을 전이라 한다’ 주나라 양왕이 진 문공을 가리켜 ‘옛날 우리 선왕들이 천하를 지배할 때, 사방 천리를 전복甸服으로 삼았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주석했다. 고힐강: “진나라를 왜 전복의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분하와 심하의 영역(진나라의 영역)은 과거에 왕계가 연경 지역의 융을 공격하고, 서백 문왕이 려를 공격하고, 주나라 여왕이 체로 유배되고, 주나라 선왕이 태원의 백성들을 다스린 것으로 충분히 주나라의 왕기임을 알 수 있다. 숙우를 진나라에 봉건한 것은 전복의 영역 안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사림잡식史林雜識』을 참조하라.

而建國既弱矣其能久乎: 어찌와 같다.

之三十年晉潘父昭侯而立桓叔不克. 人立孝侯: 『사기·진세가』: “소후7년 진나라 대신 반보潘父가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의 환숙을 맞아들였다. 환숙이 진으로 들어서려 하자 진나라 사람들이 병기를 들고 환숙을 공격했다. 환숙이 패배하여 곡옥으로 되돌아갔다. 진나라는 소후의 아들 평을 군주로 세웠는데 이가 효후이다.

之四十五年曲沃莊伯孝侯. 人立其弟鄂侯: 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로서 즉 고강故絳이다. 그 옛성은 현재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 동남쪽에 있다. 『좌전·은공5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진세가」: “효후 8년 곡옥의 환숙이 죽었다. 그 아들 선 환숙의 뒤를 이었다. 이가 곧 곡옥 장백이다. 효후 15년 곡옥 장백이 진 효후를 익에서 시해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곡옥 장백을 공격하여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되돌아갔다. 진나라는 다시 효후의 아들 극 군주로 세웠는데 이가 악후이다.” 「연표」: “효후 9년에 곡옥 환숙 성사가 죽었다. 아들이 대를 이었는데 이가 장백이다. 효후 16년 곡옥 장백이 효후를 시해하였고, 진나라 사람들은 효후의 아들 극 악후로 세웠다.” 두 기사가 일년의 차이가 나는데 사마천은 소후가 시해되고, 효후가 즉위한 해를 소후 7년이라고 쓰고 있고, 「연표」에선 효후원년이라고 쓰고 있다. 노나라의 기년으로 따지면 즉 차이가 없다. 다만 『사기·진세가』와 「연표」그리고 『한서·고금인표』에선 모두 악후를 효후의 아들이라 적었고, 『좌전』은 효후의 동생이라고 기재하였는데, 『좌전』의 기록이 신뢰할 만하다.

鄂侯哀侯: 곡옥 장백이 일찍이 익을 공격한 적이 있는데 악후는 이때 수나라로 도망쳤고, 이에 주나라 환왕이 애후를 익에 세운 일은 이미 은공 5년에서 다뤘다.

哀侯陘庭之田: 소리는 형이다. 형정陘庭 현재 익성현翼城縣 동남쪽 75리 떨어진 곳인데 예전에 형정성熒庭城 있었다.

陘庭南鄙曲沃: 두예의 주석을 보면 다음해 곡옥이 익을 공격한 장본인이라고 쓰고 있다. 는 인도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