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장애백臧哀伯 - 군주론

본문


여름 4, 송나라에게서 고나라의 대정을 수취했다. 무신일(9), 대정을 태묘에 안치하였으니 예가 아니다. 장애백臧哀伯이 간언했다. “군주가 된 사람은 덕을 밝히고 허물을 막음으로써 백관에 군림하더라도 오히려 실수가 있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덕을 밝혀 후대에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청묘淸廟의 지붕은 띠풀로 얹고, 군주가 타는 대로大路의 방석은 부들로 엮어 만들며, 제사에 올리는 대갱大羹은 양념을 하지 않고, 주식은 도정하지 않습니다. 검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복, 면류관, , , 허리띠, 하의, 대님, (밑창인 두 겹인 신발), 비녀, (충이를 늘어뜨린 줄), (관의 고정 도구), (면류관의 상판)은 나라의 제도를 드러냅니다. (☞ 상의: 옛 사람들은 상의를 , 하의를 이라고 한다. 상은 군이라고도 한다.)  (옥의 받침대), (허리에 차는 수건), (말에 매는 북), (칼의 장식), (혁대), (혁대의 장식), 기치, 그리고 말목에 가죽으로 덧댄 장식들은 신분에 따른 정해진 숫자를 드러냅니다자수, 즉 화(반원 모양), , (도끼의 머리부분), (대칭의 활 모양) 등은 신분에 따른 무늬를 드러냅니다. 오색으로 사물을 유사하게 그리는 까닭은 물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말방울), (수레에 다는 방울), (수레 횡목에 다는 장식), (깃발에 다는 방울)은 소리를 드러냅니다해·달·별을 그려 넣은 깃발은 그 밝음을 드러냅니다

무릇 덕은 검소하고 법도가 있으며, 신분에 따라 정해진 수가 있으며, 무늬와 색으로 덕의 기준을 세우고, 소리와 밝음으로 덕을 드러내어 백관의 위에 군림합니다. 백관은 이 때문에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규율을 위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덕을 버리시고 허물을 세워 뇌물로 받은 대정을 태묘에 안치하여 백관에 널리 보이시려고 합니다. 그들이 이를 본받으면 무슨 명분으로 죄를 묻겠습니까? 국가의 패망은 관리의 부패로부터 비롯됩니다. 관리의 부패는 군주의 총애와 뇌물수수에 드러납니다. 고나라의 대정을 태묘에 둔다면 뇌물수수를 드러냄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옛날 무왕께서 상나라를 멸하시고 구정九鼎을 낙읍으로 옮기자 의로운 사람들은 오히려 이 일조차 비난하였는데, 하물며 도리를 어기고 반란을 일으킨 자가 바친 기를 대묘에 두다니, 어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환공은 간언을 듣지 않았다

주나라 내사가 이를 전해 듣고 말했다. “장손달臧孫達은 그 후손들이 노나라에서 길이 번성할 것이다. 군주의 과실에 덕으로 간언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2.2.2. 夏四月大鼎于. 戊申納于大廟非禮也. 臧哀伯諫曰: 君人者將昭德塞違以臨照百官猶懼或失之故昭令德以示子孫: 是以淸廟茅屋大路越席大羹不致粢食不鑿昭其儉也. ···········昭其度也. ·······昭其數也. ···, 昭其文也. 五色比象昭其物也. ···昭其聲也. 三辰旂旗昭其明也. 夫德儉而有度登降有數·物以紀之·明以發之以臨照百官. 百官於是乎戒懼而不敢易紀律. 今滅德立違而寘其賂器於大廟以明示百官. 百官象之其又何誅焉? 國家之敗由官邪也. 官之失德寵賂章也. 鼎在廟章孰甚焉? 武王遷九鼎于雒邑義士猶或非之而況將昭違亂之賂器於大廟其若之何?公不聽內史聞之, : 臧孫達其有後於! 君違不忘諫之以德.


해설

는 국명으로 희성姬姓이다. 『좌전·희공24년』에 따르면, 최초로 봉건된 이는 문왕의 아들이다. 국경은 현재의 산동성 무현武縣의 동남쪽이다. 은 고나라에서 주조되었기 때문에 고정으로 부른다. 『춘추·은공10년』의 기사에 따르면, 고나라는 송나라에게 일찌감치 멸망당했기 때문에 정 역시 송나라로 옮겨졌다. 현재 전해지는 이기로 고사석부정郜史碩父鼎과 고중준告仲尊이 있다. 는 곧 고이다. 고중준의 명문을 보면, “고중이 부친인 정을 위해 보배로운 준이를 제작했다(作父)”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명문은 『서청고감西淸古鑑9에 처음 수록되었을 때 “□”를 “”자로 보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여기서는 오기창吳其昌의 『금문세족보金文世族譜』를 따라 “”로 본다.


郜史碩父鼎


夏四月大鼎于. 戊申納于大廟非禮也. 臧哀伯諫曰: 애백哀伯은 노나라 대부이다. 이름은 달이고, 희백僖伯의 아들이다.

君人者將昭德塞違: 과 위는 대립하는 명사로서 위는 사악의 뜻이고 덕과 의에 부합하지 않고, 예에 어긋나는 일을 가리킨다. 위는 “회”라고도 쓴다. 이에 대해선 왕인지의 『경의술문』에 자세하다.

以臨照百官猶懼或失之故昭令德以示子孫: 是以清廟茅屋: 청묘清廟는 곧 태묘이다. 달리 명당明堂 혹은 태실太室이라고도 한다. 지붕을 띠와 갈대茅葦로 덮은 것을 모옥茅屋이라 부른다. 『주례·장인匠人』에선 위옥葦屋이라고 쓴다. 기와로 지붕을 덮은 것은 와옥瓦屋이라 한다. 청묘모옥은 띠풀로 지붕을 얹은 청묘를 가리키는데 소박함과 절약의 뜻을 보여준다.

大路越席: 는 로로도 쓴다. 수레의 일종이다. 여기서는 제사에 쓰이는 수레이다. 은나라는 목로를 사용했고, 주나라는 옥로를 사용했다. 목로는 가장 값싼 재료인 목재로 만들고 가죽으로 위를 덮지 않고 그저 칠만 했을 따름이다. 옥로는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재료로 만들고 가죽으로 수레를 덮었으며 옥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활석越席은 왕골蒲草을 엮어서 만든 방석/자리이다. ‘大路越席清廟茅屋은 서로 대구를 이룬다. 대로활석은 대로의 중간에 놓인 왕골로 엮어 만든 깔개를 의미한다.

大羹不致: 대갱은 육즙이다. 불치不致는 시고·쓰고·맵고·짜고·단, 다섯 가지 맛으로 맛을 내지 않고 그저 끓이기만 한 것이다. 대갱大羹은 제사에 쓰인다.

粢食不鑿: 의 음은 자이고, 의 음은 사이다. 자사粢食는 주식主食과 같은 뜻이다. 『주례·소종백』에 육자六粢가 있는데, 여섯 가지의 주식을 가리킨다. 메기장()·기장()·벼()·조()·보리()·줄(: 벼과의 다년생 수초)이다. 제사 용도로는 서와 직만이 상용된다은 찧다. 『설문』: “방아찧은 쌀()은 현미 열 말을 찧어서 9되를 만든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설명한 착이 바로 본문의 착과 같다. 『운몽진간雲夢秦簡·창율倉律』에도 “현미 한 석을 찧어 9되를 만든다”라는 기록이 있고, 『한비자·오두五蠹』에 “요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현미를 주식으로 삼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사기·이사전』역시 이 말을 기록하고 있다. 『회남자·주술훈主術訓』에선 더욱 상세하다. 이 모두 주식으로 정제한 쌀을 사용하지 않았고 거친 쌀을 먹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병력并力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문사文史』제16집에 보인다.

昭其儉也: 이 네 가지는 절약과 검소를 나타낸다.

···: 의 음은 곤이다. 고대 천자와 상공의 예복으로 제사 때 입던 옷이다. 옷에 구불구불한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대의 예모禮帽이다. 대부 이상이 썼다

, 혹은 불이라고도 쓴다. 불로 연마한 가죽으로 만들어서 배와 무릎 사이를 덮는데 사용한다. 고대 수렵 시대에 들짐승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을 때, 먼저 몸의 앞 부분을 가리고, 그 다음으로 뒷부분을 가리게 되었다. 후대에 베나 비단으로 짐승 가죽을 대체하여 앞을 가리는 습관만 남게 된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정현의 『역위건착도주易緯乾鑿度注』에 보인다. 은 필이라고도 한다. 『예기·옥조玉藻』에 근거하면 필의 아래쪽은 넓이 2, 위는 넓이가 1척 길이는 3척이며 필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은 넓이가 5, 견혁대肩革帶는 넓이가 2촌이다.

, 음은 정이다. 천자가 사용하는 홀로서 길이는 3척이고 일명 대규大圭라고 한다. 고대에 천자로부터 일반 사에 이르기까지 예방할 때, 모두 홀을 손에 들었다. 천자의 홀은 옥으로 만들었고, 제후의 홀은 상아로, 대부와 사는 대나무로 만들었다. 다만 대부의 홀은 상어鮫魚(교어)가죽으로 장식했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후로 홀의 용도는 일종의 수첩으로서 홀에 기록해 두는 비망록備忘의 역할을 했다

·상·폭·석: 여기서 말하는 대는 대대(大帶넓은 허리띠)이다. 두예는 혁대라고 설명했지만 옳지 않다. 대대는 너비가 4촌이고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허리에 매고, 여분은 늘어뜨리는 띠로 활용했다. 대대의 제작에 있어서 천자의 소대素帶는 생비단生帛을 소재로 붉은 색으로 안을 채색하고, 대의 양끝은 무늬가 없는 증채繒彩로 마무리했다. 제후의 소대 역시 생백으로 만들었지만 안쪽에 붉은 색으로 꾸미지 않았으며 끝의 마무리는 대대와 마찬가지로 비단으로 마무리한다. 대부의 소대 역시 소재는 같다. 다만 아래로 늘어뜨리는 부분을 비단으로 꾸몄다. 사의 속대束帶(삶아 표백한 명주로 만든)는 대의 양끝을 꿰매고 증채로 꾸미지 않는다

, 옛 사람들은 상의를 의, 하의를 상이라고 한다. 상은 군이라고도 한다

, 음은 핍이다. 옛 사람들은 베로 발뒤꿈치에서 위로 무릎까지 덮어 정강이를 조여 맨다. 조여 맬 때 위로 비스듬히 해서 올라가기 때문에 대님(邪幅사폭)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사람들은 이를 행등行縢이라고 했고, 오늘날의 방퇴(넓적다리를 감싸는)와 비슷하다

, 소리는 석이다. 옛 사람들은 혜(신발)를 리라고 불렀는데 신발 밑창이 하나인 것을 리, 밑창이 두 겹인 신발을 석이라 한다. 밑창이 하나인 것은 가죽을 사용했고, 겹친 것은 나무를 덧대었다. 고대의 천자와 제후는 길한 일이 있을 때 석을 신었다. 석은 적색, 백색 그리고 흑색이 있었고 신발의 색과 옷은 서로 색깔을 맞춰 신고 입었다. 적색의 석은 면복에 받쳐 신었고 백석은 피변皮弁과 함께 신는 것이며 흑석은 현단玄端과 함께 신었다. 사는 모두 리를 신었다. 경대부는 면복을 입을 때는 적석을 신고, 나머지는 모두 리를 신었다.

·담·굉·연: 이 네 가지는 면관의 장식이다. 은 비녀이다. 비녀()는 두 종류가 있는데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는 것과 관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있다. 형계는 바로 관을 고정시키는 비녀이다. 이 비녀는 길이 1 2촌이며 천자의 것은 옥을 소재로 하고, 제후의 것은 옥과 유사한 것으로 만든다.

, 음은 담이다. 을 늘어뜨린 줄이다. 실을 짜서 만든다. 관의 양쪽 귀까지 늘어뜨려 전으로 드리운다. 여기서 전은 옥처럼 생긴 아름다운 돌로 만드는데 담과 전은 모두 충이充耳라고 부를 수 있다.

, 관을 매는 것. (다음의 설명은 관을 고정시키는 비녀가 있을 경우 왼쪽에서 두 줄을 내려뜨린 것이다. 역주) 한쪽 줄은 왼쪽 비녀의 위에 걸고, 다른 한 쪽은 턱을 지나 오른쪽 비녀 위에 연결하고서 여분은 장식으로 삼는다. 이 역시 관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 연은 판을 소재로 해서 검은색 천으로 싼다. 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권이라 하여 머리 바로 위를 덮는다. 라고도 한다. 다른 부분은 이 권의 윗부분으로서 연 혹은 연이라고 한다. 연은 무에 부속된다.

昭其度也: 곤복 이하 언급한 12가지 물건은 모두 제복祭服이다. 이 물건들에는 신분의 고하에 따라 각각 정해진 제도가 있다. 생각건대 이 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제도와 법도의 도이고, 둘째는 덕도德度와 태도態度의 도이다. 장애백은 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 곧 덕도를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솔·비·봉: 는 소라고도 쓴다. 옥을 바칠 때 쓰는 물건이다. 소옥을 받치는 깔개라고도 한다. 나무판으로 만든다. 바깥은 삶은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흰 색으로 수초 무늬를 그려 놓았다.

, 자를 가차한 것이다. “허리에 차는 수건()”으로도 쓰며 수건佩巾의 뜻이다. 왕소란王紹蘭의 『경설經說』을 참고하라.

, 음은 병이고, 칼집이다.

, 칼집의 장식으로서 음은 붕고 상성이다. 칼을 찰 때 장식하는 물건이다. 진교종陳喬樅 『예당경설禮堂經說』에 「조솔비붕해藻率鞞鞛」가 있다. 두예는 조솔藻率을 하나의 물건으로 보아 옥을 받치는 위 설명했지만 고대에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이자명의 『일기』(광서 戊子 7 10일자)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하지만 취하지 않는다.

···: 대해 복건과 가규 허신 그리고 두예는 모두 대대大帶라고 주석했다. 그러나 단옥재는 『설문해자주』에서 정현의 설을 좇아서 혁대革帶라고 본다. 윗글에서의 대가 이미 대대를 가리키므로 이것은 혁대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는 반대鞶帶 아래로 늘어뜨려 장식하는 것이다.

의 소리는 류이고 글자는 류 쓸 수도 있다. 고대의 깃발 위에 부착하던 기의 표지飄帶(표대)이다. 이 기치의 수는 천자·대부·사 등이 모두 다르다은 마앙馬鞅으로서 말의 목 위에 가죽으로 만들어서 수레를 끌 수 있도록 하는 것. 두예는 영 말의 흉부에 거는 것이라고 했는데 옳지 않은 것 같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좌전·희공28년』의 주석을 참조.

昭其數也: 소자繅籍 8가지 물건은 각각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개수, , 형태 등이 다르다. 기치의 예를 보자. 『주례』에 따르면, 천자는 12개의 기치, 상공은 9, 후백은 7, 자남은 5, 경대부와 사의 기치는 각각 작위 혹은 관직의 품계(命數)에 따른다. 즉 이것을 소위 그 개수의 등급을 두어 밝힌다(昭其數)라고 한다

···: 이 네 가지는 모두 의상에 수놓은 꽃무늬이다. 의 형태는 반원半環모양이다은 용의 형상이다의 음은 부이고 흑색과 백색을 사용하여 자수를 놓았는데 도끼의 머리 형상이다 음은 불이고 흑색과 청색을 사용하여 꽃무늬 자수를 놓았는데 그 형상은 두 개의 활이 서로 대칭(相背)을 이루어 아자亞字 형태를 만든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활이 아니라 두 개의 기자己字 대칭을 이룬 형태로 보았는데 불확실한 주장이다. 여기서는 완원阮元 계복桂馥(『설문의증』)의 주장을 채택했다.

昭其文也: 이 네 가지는 모두 무늬를 말한 것으로서 그 문양을 등급에 따라 달리함을 밝힌 것이다

五色比象: 오색은 청색·황색·적색·백색·흑색이다. 비상比象이란 이 다섯가지 색으로 산·용·꽃·곤충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복장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다. 두예는 “비상이란 천하(天地四方)이다”라고 설명했지만 옳지 않다. 여기서는 유문기劉文淇 『구주소증舊注疏證』의 주장을 따른다

昭其物也: 물색物色 물의 뜻이다. 『주례·보장씨保章氏』의 “다섯 색깔의 구름(以五雲之物)”에 대한 주석을 보면 “물이란 색깔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소리는 양이다. 말의 이마를 장식하는 물건으로서 동으로 만들어 달릴 때에 소리를 내게 한다 고대에 수레를 장식하는 물건으로 말의 재갈(嚼子) 혹은 수레의 횡목(車衡) 위에 매단다. 마형馬衡 『중국금석학개요』에선 “란은 쇠방울鐘鐸처럼 만든다. 위에 손잡이()가 있고, 배 부분에 혀가 나와 있어 한나라 이후의 소나 말 등의 방울 동일하다.

수레 앞의 횡목 다는 작은 방울小鈴이다. 완원의 『연경실집揅經室集』의 「동화고銅和考」에 보면 맹진孟津에서 출토된 것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옳다. 또한 마형의 『중국금석학개요』에도 그 내용이 있다은 여기서 깃발에 매다는 작은 방울을 말한다. 『모공정』의 명문에 “붉은 깃발에 걸린 두 개의 방울(朱旂二鈴)”이란 문구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킨다. 상승조商承祚 『십이가길금도록十二家吉金圖錄』에 령의 사진이 하나 실려 있다. 손잡이의 높이는 1 4분이고, 입 부분의 세로는 7, 가로는 1촌 반분이다. 양쪽 끝은 모가 나있다. 안양에서 출토된 것이다. 용경의 『상주이기통고』에선 “기물이 작은 것으로서 아마도 깃발의 위에 매단 것 같다(器小, 疑綴于旂上者).”라고 설명한다

昭其聲也: 네 가지는 모두 방울에 속한 기물로서 수레 행차시 소리를 내는 물건이다.

三辰旂旗: 삼신三辰이란 해와 달 그리고 별이다. 음은 기이다. 기에는 9가지 종류가 있고 기기旂旗 그 총칭이다. 천자의 기는 태상이라 하고, 해와 달이 그려져 있다. 혹자는 성신星辰 그려 넣는다고도 한다.

昭其明也: 기기旂旗 표지標幟 즉 구분을 나타내는데 그 위에 해와 달 별과 별자리 등을 그려 넣기 때문에 ‘밝음’을 나타내고 구분한다고 말한 것이다

夫德儉而有度登降有數: 여기서 덕이란 윗글의 소덕昭德, 다음에 나오는 멸덕滅德에서의 덕과 같은 뜻이다. 이상 언급된 모든 것은 예물禮物이다. 예물은 예의禮意 나타내고, 예의는 상고시대의 윤리와 강상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덕으로서 예의禮意 말한다은 윗글 “제사에 올리는 국은 조미하지 않고, 주식으로 쓰는 곡물은 찧지 않고 거칠게 먹으며(大羹不致, 粢食不鑿)”를 이어서 말한 것이고, 유탁有度··· 12가지 기물을 이어 말한 것이다. 올리고 내림(登降)이란 신분의 고하에 따라 증감한다는 뜻이다. 왕인지의 『술문』에 상세하다. 유수有數 윗글 昭其數也 말함이다.

·物以紀之: 문양은 화룡보불을, 색깔은 오색비상을 이어 말한 것이다.

·明以發之: 소리는 여러 종류의 방울인 석난화령을, 밝음은 해와 달 그리고 별의 그려 넣은 삼신기기를 이어 말한 것이다.

以臨照百官. 百官於是乎戒懼而不敢易紀律: 은 어김의 뜻. 『좌전·애공원년』의 “저의 선조인 대부 자상이 이를 되돌려 놓은 것(吾先大夫子常易之)”에 대한 두예의 주석. “역 되돌림 같다.” 『여람·금색편禁塞篇』의 “不可易”에 대한 고유의 주석 “역은 어긋남과 같다.

今滅德立違: 위의 “昭德塞違”와 대구.

而寘其賂器於大廟: 음은 지이고, 뜻은 두다.

以明示百官: 앞에서 “선한 덕을 밝혀서 자손에게 보여주다”라고 말했다. 만약 이처럼 행동하면 그 반대의 결과를 얻을 것이다.

百官象之: 모든 관료들이 이를 따라 할 것이다.

其又何誅焉? 國家之敗由官邪也. 官之失德寵賂章也. 郜鼎在廟章孰甚焉? 武王克商遷九鼎于雒邑: 구정九鼎, 『좌전·선공3년』의 기사를 보면, 하나라 때 구주에서 바친 동으로 주조했다. 『전국책·동주책東周策: “옛날 주나라가 은나라를 공격하고 아홉 개의 정을 얻었다. 정 하나를 끄는데 필요한 사람만 9만 명이 필요하여 이를 옮기는데 총 81만여 명이 필요했다.” 비록 과장이 심하지만 구정은 혹 9개의 큰 정으로 당시에 실제로 그런 큰 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좌전·선공3년』의 왕손만의 말을 보면, “성왕이 정을 겹옥郟鄏(낙읍)에 두었다”고 한다. 『상서』에 근거하면, 무왕 역시 낙읍의 조성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 성왕이 낙읍을 건설했는데 먼저 그 땅에 대해 점을 쳐 길한지를 따져 본 것을 보면, 정을 옮긴 것은 무왕 때의 일은 아닌듯싶다. 1962년 출토된 하존何尊은 성왕5년 때의 기인데 그 명문에 보면 “성왕은 애초 성주로 천도하려 했다(唯王初遷宅于成周)”는 기록이 있다. 또 “무왕이 대국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하늘에 보고하여 말하길, 제가 이 천하의 한 가운데에 도읍을 정하여”라는 말을 보면 무왕이 일찍이 왕성을 건설하려는 뜻은 있었고, 성왕은 단지 그 뜻을 이어 무왕의 뜻을 실행한 것이다. 『좌전·소공28년』: “예전 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후, 그 형제의 나라가 15, 희성의 나라가 40여 개였다.” 옛 사람들은 항상 성왕의 일을 무왕 때의 일로 귀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낙읍은 곧 성주이고 하남성 낙양시의 서남쪽에 해당한다.

義士猶或非之: 『한서·왕길공우전王吉貢禹傳』의 “예전에 무왕이 상나라 임금 주를 토벌한 후 구정을 낙읍에 옮겼다. 백이와 숙제 등이 이를 비난하고 수양산에서 굶으면서도 그의 녹을 받지 않았다” 등의 얘기는 백이와 숙제를 의사義士로 여긴 것이며 모두 『좌전』의 뜻이다. 송대 섭적葉適 『습학기언서목習學記言序目·권10』에서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았다는 등의 잡설이 있다.”라고 말하지만 꼭 역사적 사실로 보이지는 않는다.

而況將昭違亂之賂器於大廟, 其若之何?公不聽: 이 구절엔 동사가 없다. ” 또는 “”등의 아래에 ‘두다’란 뜻의 글자가 있어야 한다.

內史聞之: 내사內史는 주나라 왕실의 관직명이다. 장공32년과 희공11년의 『좌전』에 내사 과가 보이고, 희공16년과 28년의 『좌전』에 내사 숙흥叔興이 보인다. 문공원년과 14년의 『좌전』엔 내사 숙복叔服을 볼 수 있다. 이들 기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내사는 주나라 왕실과 제후에 이르기까지 사신의 왕래와 경조사에 대한 예에 대한 권위자이다. 또한 주나라 왕이 책명을 내릴 때의 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시 사람들의 관점으로 볼 때 내사는 신도神道와 인도人道에 두루 통하여 길흉을 예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이 신 강림한 일에 대해 주나라 혜왕이 그에게 물었고, 하늘에서 운석이 송나라로 떨어지고, 여섯 마리 거위가 뒤로 날아간 일에 대해 송나라 양공이 그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문공14년에 북두에서 별이 어긋나자 송나라와 제나라 그리고 진나라의 군주가 모두 죽을 수 있는 혼란이 생길 것을 예언하기도 한 것이다.

: 臧孫達其有後於魯乎: 노나라 대부 장손달에 대한 말이다. 씨는 세록을 가장 오래도록 누렸는데, 애공 24년에는 노나라가 제나라를 칠 때 장씨에게 신령의 도움을 애걸한 적이 있고, 장삭臧石이 군사를 이끌고 늠구廩丘의 땅을 취한 일도 기재되어 있다.

君違, 不忘諫之以德: 는 당시의 예제를 위배함이다. 『논어』의 여러 위자와 같은 의미이다. 孔丘世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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