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713년) 1.10.1. 중구中丘 결맹 - 노나라, 제나라, 정나라

본문

은공 10년 봄 왕력 정월, 은공이 중구中丘(산동성 임기현臨沂縣 동북쪽)에서 제 희공 및 정 장공과 회합했다. 계축일(2 25), (노나라)에서 결맹하고,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정하였다.


1.10.1. 十年春王正月, 公會·鄭伯中丘. 癸丑, 盟于, 爲師期.


해설

十年春王正月, 公會·鄭伯中丘. 癸丑: 계축일은 『춘추』로 입증해보면, 건축을 기준으로 2(인월)의 계축일로서 2 25일이다. 『좌전』에선 정월로 썼는데, 왜『춘추』는 건축을 기준으로 하고, 『좌전』에선 건인을 기준으로 하였을까?


춘추좌전 지도 - 중구中丘


盟于, 爲師期: 은 노나라 땅이다. 은공 9년 방의 회합에 정 장공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회합했다. 『춘추』는 회합만 쓰고 결맹을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해 두예는 노 은공이 귀국하여 조묘에 보고할 때, 회합은 보고했지만 결맹은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유사배劉師培의 『춘추좌전답문春秋左傳答問』에선 “등의 결맹에 대해『좌전』에선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정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보가 은공에 앞서 제와 정의 군주들과 회합했기 때문에 군사를 낸 시점이 결맹의 증표와 부합하지 않는다. 『춘추』는 노나라의 좋지 않은 일의 노출을 피하기 위해 맹약을 기록하지 않았다.” 모두 억측이다. 『춘추』의 전체를 통해, 각기 다른 곳에서 열린 것을 함께 기록한 경우는 양공 25년 여름 이의夷儀에서 회합했고 그해 가을 중구重丘에서 결맹한 사실을 기록한 단 한 차례이다. 또 그 회합이 대규모였으며 회합은 여름에 결맹은 가을에 열려 3개월이라는 시차가 존재했고, 또 그 사이 정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한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구분하여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외 경우는 혹은 맹약이 회합을 포괄한 사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은공 8년의 온에서의 회합과 와옥瓦屋에서의 결맹이 있었지만 『춘추』에선 다만 결맹만 기록한 경우이다. 혹은 회합으로 맹약을 포괄한 적도 있는데, 본문이 그런 예이다. 반드시 어떤 심원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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