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우보羽父의 독단

본문

가을, 제후들이 재차 정나라를 정벌했다. 송 상공이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군대를 요청했지만 은공은 거절했다. 우보羽父(공자휘) 군사를 거느리고 제후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공은 불허했다. 우보는 고집스럽게 요청하고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래서 『춘추』는 “휘가 군사를 거느리고”라고 썼는데 그를 질타한 것이다. 제후들의 군이 정나라의 보병을 물리치고 벼를 탈취해 돌아갔다.


1.4.4. , 諸侯復伐. 宋公使來乞師, 公辭之. 羽父請以師會之, 公弗許. 固請而行. 故書曰: 帥師, 疾之也. 諸侯之師敗徒兵, 取其禾而還.


해설

, 帥師會宋公·陳侯··人伐: 는 노나라 대부 공자휘다. 자는 우보羽父이다. 앞에 공자를 붙이지 않은 것은 사관이 본래 이름만 쓴 사례이다. 『춘추·은공2년』의 “무해가 군사를 이끌고 극에 침입했다(無駭帥師入)”나 『춘추·장공3년』의 “익이 제나라 군사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다(師伐)”와 같은 예이다. 모기령의 『춘추전』에 상세하다. 『휘찬』: “이것은 대부가 정벌에 나선 최초의 사례이다.” 

, 諸侯復伐. 宋公使來乞師: 『춘추』를 살펴보면, 타국이 노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일은 진나라에서 요청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 송나라가 군사를 요청한 일 역시 『춘추』에선 기록하지 않았다.

公辭之. 羽父請以師會之: 우보는 공자휘의 자이다.

公弗許. 固請而行. 故書曰: 帥師, 疾之也: 질지란 공자휘가 은공의 명을 듣지 않은 것을 질타했다는 뜻이다.

諸侯之師敗徒兵: 고대의 전쟁은 모두 전차전이다. 여기서 다만 도병을 패주시켰다고 쓴 것은 정나라가 비록 패하긴 했어도 대패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심흠한의 『보주』에 근거한 설명이다. 고대에는 병기를 병이라 하고, 전투에선 병사들 모두 병기를 들게 되므로 병기를 든 사람 역시 병이라 할 수 있다. 도병徒兵은 곧 보졸로서 전차 옆에서 싸움을 하는 병졸이다. ‘라고도 한다. 『시·노송·비궁閟宮』의 “공의 보병이 3만이니(公徒三萬)”와 『우정禹鼎』의 “우를 보내어 공의 전차 백 량, 마부 2백명, 그리고 보졸 일천 명을(率公戎車百乘, 斯馭二百, 徒千)”등의 문구를 볼 때 서주시대에 이미 도병이 존재했다.

取其禾而還: 대해선 『좌전·은공3년』의 “成周之禾”의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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