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성郕나라

본문 

위나라의 내란 당시, 나라(산동성 복현濮縣 동남쪽)가 위나라를 침략했기 때문에 위나라 군대가 성나라로 쳐들어갔다.


1.5.6. 之亂也, 人侵, 師入.


해설

은 국명이다. 현재 전해지는 이기인 백다보궤伯多父簋의 명문에 “성희다모(成姬多母)”란 문구가 있는데, 성희成姬는 곧 성희. 포정의 『춘추국명고석』: “천문泉文에서 은 읍 부수로 하지 않는다. 은 후대의 글자이다.” 주원 지역의 갑골에 “성숙용(宬叔)”이란 세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서 성숙宬叔 곧 성숙成叔이다. 즉 글자를 으로도 쓴다. 「관채세가」에 따르면, 첫 번째로 봉건된 성숙무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과 주공의 아우이다. 공영달의 『소』: “후대에 기록이 보이지 않고 세가가 없는 까닭에 군주들의 시호를 알 수 없다. 1975년 섬서 기산현 동가촌董家村에서 발견된 성백손부역成伯孫父鬲으로 미루어 보면 혹 성나라가 본래는 서주의 기내에 봉해졌고, 주나라 동천 후에 산동 지역에 다시 봉건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방여기요』와 고동고의『춘추대사표』는 모두 고대의 성나라가 현재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서북쪽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위나라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 문제다. 『원화군현지』12와 『태평환우기』14, 『노사·국명기』5 등에선 모두 동한 시대 성양현郕陽縣 옛 성백국郕伯國이라고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현재의 산동성 복현濮縣 폐현廢縣 동남쪽에 해당한다. 혹자는 견성鄄城 운성鄆城 사이라고도 말한다.


춘추좌전 지도 - 성


之亂也, 人侵, 師入: 에 대해서는 『춘추』의 주석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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