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허전과 붕 땅의 교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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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공 원년 봄, 환공이 즉위했고 정나라와 우호를 중수했다. 정나라가 재차 (노나라 대신 허전許田에서) 주공의 제사를 드리고, (산동성 비현)을 교환하는 일을 종결짓기를 청했다. 환공이 이를 수락했다. 3, 정 장공이 옥벽을 노나라에 주고 허전을 빌리는 모양새를 차렸는데, 이는 주공의 제사 및 붕의 교환이었다.

2.1.1. 元年春公卽位修好于. 人請復祀周公, 卒易. 公許之. 三月, 鄭伯以璧假周公·故也.


해설

元年春公卽位修好于. 人請復祀周公, 卒易: 『좌전·은공8년』에선 단지 “완을 보내 붕 읍을 노나라에게 주었고”, “우리는 붕 땅에 가서 살펴 보았다”라고만 기록했고, 노나라 소유의 허전을 정나라에 주었다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에 정나라는 재차 자신들이 주공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祀周公)” 요청하여 이 거래를 종결지으려고 했다. 노나라가 애초에 붕읍을 받고 허전은 주지 않은 까닭은 혹 붕은 작고 허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정나라는 옥을 더해 주었다“위”는 『고문경古文經』에선 “”으로 쓴다금문金文에는 위자가 없고 모두 립으로 쓴다『한서·유흠전』에 보면 『좌씨전』은 고문을 다수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지만현재 전해지는 판본에는 절대적으로 고자古字가 적다전대흔錢大昕의 『잠연당문집潛硏堂文集·답문사答問四』에 따르면 위·진 이후로 경사經師들이 글자를 고친 것이라고 한다.


춘추좌전 지도 - 붕과 허의 교환


公許之. 三月, 鄭伯以璧假周公·故也: 周公·故也”의 뜻은 주공에 대한 제사를 허락받고, 붕읍을 노나라에 귀속시켰다는 말이다. 주공과 붕은 별개의 두 개 일이다. 이것은 은공 8년의 기사를 함께 읽어보면 자명하다. 우창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고, 周公祊”은 말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爲周公祀”로 쓰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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