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곡옥曲沃 장백莊伯

  

곡옥曲沃(산서성 문희현聞喜縣) 장백莊伯이 정나라 및 형나라와 함께 진나라 도성 익翼(산서성 익성현翼城縣 동남쪽)을 공격했다. 환왕은 윤씨와 무씨에게 장백을 지원하게 했다. 익후는 수隨(산서성 개휴현介休縣 동남쪽)로 도망쳤다. 


원문

 (1.5.2.) 曲沃莊伯以鄭人·邢人伐翼. 王使尹氏·武氏助之. 翼侯奔隨. 


주석  


진晉나라는 무왕의 아들 당숙우唐叔虞의 후예다. 성왕이 당을 멸하고 숙우를 그 곳에 제후로 봉했다. 익翼은 현재 산서성 익성현의 동남쪽이다. 현재 전해지는 이기로 진공□晉公 이 있는데, 당란의 『진공□□고석晉公 考釋』에 따르면 진 정공때 제작된 것이라 한다. 그 명문에 “우리 시조 당공께서 대명을 받들어 무왕을 보좌하고(我皇祖□(唐)公, 膺受大命, 左右武王)”라는 언급이 있는데, 『일주서·왕회편王會篇』에서 말한 “성주의 큰 회합(成周之會)”과 “당숙唐叔·순숙荀叔·주공周公이 좌측에, 태공망이 우측에 자리했다”라는 기사의 뜻과 상응된다. 또『국어·진어』에서 숙향이 당숙은 무력으로 봉건한 것이라는 인용을 보면 『여람·중언重言』과 『설원·군도君道』에서 전하고 있는 동엽桐葉 고사(성왕이 어릴 때 오동나무 잎으로 규를 만들어 당숙 우에게 주며 장난삼아 제후로 봉하겠다는 얘길 했고, 주공이 군주의 말엔 장난이 없다는 충고로 그를 제후로 봉했다고하는 고사. 역자)는 신뢰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당숙의 아들 섭보燮父가 나라 이름을 진晉으로 바꿨는데 현재의 태원시에 위치했다. (고염무의 『일지록』권31에선 당숙은 익에 봉건했는데 황여성의 『집석』은 전조망의 주장을 인용하여 그곳이 현재의 태원이라고 말한다.) 4대가 지난 성후成侯 때 남쪽 곡옥으로 옮겼는데 현재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의 동쪽이다. 그로부터 5대 째인 목후穆侯 때 다시 강絳으로 천도했는데, 그곳이 바로 익翼이다. 노나라 성공 6년, 진 경공景公[28대]은 신전新田으로 천도했고, 이후로 신전을 강絳으로 개명했다. 이곳은 현재 산서성 후마시侯馬市이고 이전의 도읍은 고강故絳이라고 불렀다. 춘추 이후 출공出公(35대)이하 5대 65년이 지난 후 한韓·위魏·조趙 세 가문이 진나라의 땅을 분할하고, 정공靖公(40대)을 서민으로 강등시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곡옥장백과 익의 사건의 본말은 『좌전·환공2년』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곡옥은 산서성 문희현의 동쪽 20리 정도에 위치하며 곡옥과 익의 거리는 200여 리 정도 된다.


춘추시대-진나라



▣王使尹氏·武氏助之: 왕은 주 환왕이다. 윤씨와 무씨는 모두 주나라의 세족 대부이다. 윤씨에 대해서는 『소공23년』의 『춘추』와 『좌전』에 자세하다. 식읍이 윤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씨로 삼았다. 
▣翼侯奔隨: 『수경주』에서 정현의 『시보』를 인용, “목후가 강으로 천도한 후 효후가 소후를 이어 즉위하였고, 이때 강을 익으로 개칭했다. 무공의 아들 헌공이 성을 넓혔고, 다시 강이라 불렀다. 『장공26』년의 ‘사위가 강성을 증축하여 더욱 확장하였다(士蔿城絳以深其宮)’란 기사가 이를 말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익과 강은 한 지명으로서 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런 까닭에 『사기』『색은』에선 “익은 본래 진의 도읍으로 효후 이래로 익후라고도 불렀다.” 즉 익후는 진나라 제후인데, 바로 악후鄂侯를 말한다. 수隨는 진나라 땅으로 후에 사위士蔿의 식읍이 되었다. 현재 산서성 개휴현介休縣 동남쪽 약 25리 되는 지점에 옛 수성隨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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