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 은공 (춘추좌전.1.1.0.)


노 혜공의 원비元妃는 맹자孟子이다. 맹자가 죽자 혜공은 성자聲子를 계실로 삼아 은공隱公을 낳았다.송 무공이 중자仲子를 낳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손바닥에 무늬가 있었는데 부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 연유로 중자는 우리나라로 시집을 왔다. 그녀는 환공을 낳았고 (그가 어릴 때) 혜공이 서거했다. 이 때문에 은공이 즉위했고 환공을 섬겼다.


1.1.0. 惠公元妃孟子. 孟子. 繼室以聲子, 隱公宋武公仲子, 仲子生而有文在其手, 曰爲夫人, 仲子歸于我. 桓公惠公, 是以隱公立而奉之.



관련 주석

惠公元妃孟子: 혜공, 『사기·노세가』는 그의 이름을 불황弗湟으로 쓰고, 『색은』에서 인용한 『세본』은 불황弗皇으로 쓴다. 또 인용한 「년표」에선 불생弗生으로 쓴다. 은공과 환공의 부친이고 재위 46년만에 타계했다. 『좌전·문공2년』의 범례에 따르면, 군주가 즉위하면 원비를 얻어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 효이다.” 또 『좌전·선공3년』의 길성은 길한 여인이며 후직의 원비이다즉 원비는 첫 번째로 얻은 정부인이다. 금문金文에서는 “원배元配”로 쓴다. 예를 들면, 진역궤陳逆簋의 명문: “길한 청동을 선택하여 원배 계강의 상서로운 기를 만들었다.” 

주나라와 춘추시대에는 여아는 생후 3개월 후에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면, 『좌전·양공26년』에 송 평공이 라는 이름의 첩을 얻는 기사가 있고, 『좌전·소공27년』에는 제 경공의 부인의 이름이 으로 기재되어 있다. 『예기·단궁하』는 공구의 모친 이름을 징재徵在라고 쓰고 있다. (인용문들과 여아 출생 후 3개월 명명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옮긴이) 출가를 허락받고 비녀를 꽂으면(호배휘의 『의례·사혼례』『정의』와 『예기·내칙』『주소』를 참고했다)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혼사가 오고갈 때 사용한 이름만을 사용하게 된다. 『예기·곡례상』의 남녀는 중매가 오가지 않으면 서로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기사로서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맹자라고 쓴 것을 보면, 은 장유의 순서로서 장녀를 말한다. 소위 맹·중·숙·계혹은 백·중·숙·계등이 이런 배행이다. “는 친가의 성이다. 송나라의 성은 자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송나라의 여인이다. 이와 다음의 중자는 모두 장유의 순서를 성 앞에 쓴 것이다. “로 쓰는 변이도 있다. 예를 들면 소강少姜이 그 예다. 이외 본국의 나라 명을 성 앞에 덧붙이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제강齊姜과 진규陳嬀가 그러하다. 또 남편의 나라 명을 앞에 두는 경우로는 한길韓姞과 진희秦姬가 있으며, 남편의 시호를 성에 덧붙이는 경우로는 장강莊姜·선강宣姜이 있고, 남편의 집안의 씨를 친가의 성위에 덧붙인 경우로는 란기欒祁 등이 있다. 별도로 시호를 지어 성 앞에 두는 사례도 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성자聲子와 여규厲嬀, 대규戴嬀 등의 예가 그러하다. 노나라는 문강 이후로 대체로 부인에게 남편의 시호를 따르지 않게 하고 별도로 시호를 지어 높였다. 재가로 인해 개칭한 경우도 있는데 진 목공은 여식을 진 회공에게 출가시켜 회영으로 불렀다가 후에 문공에 재가시켜 진영으로 고쳐 불렀다. 한편 주나라 천자의 여식은 왕희王姬로 호칭한다

孟子. 繼室以聲子: 『좌전』에선 계실繼室을 모두 4차례 쓴다. 모두 동사로 쓰였고 재취하다(續娶)의 뜻이다. 『좌전·소공3년』에 진 평공이 제나라의 소강을 취하여 총애했지만 (일찍) 죽고 말았다. 이때 제나라는 진나라에 계실을 청하였다. 소강은 진 평공의 적부인이 아니었고 재취한 여인이 오히려 적부인이었다. 『사기·노세가』는 성자聲子를 출신이 미천한 여인으로 본다. 혹 어떤 근거가 있을 수는 있다. 『좌전·애공24년』: “예로부터 첩을 정실부인으로 삼는 예법은 없었다.” 노나라에선 첩을 처로 삼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성자를 정실부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곡량전·희공9년』과 『맹자·고자하』에 기재된 규구癸丘의 맹약의 “첩을 처로 삼지 않는다(毋以妾爲妻)”란 내용을 보면 필시 앞서 이런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맹약에서 이를 금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좌전』에는 그런 언급이 없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두예: “성자는 맹자의 질제姪娣이다. 제후가 처음 결혼할 때, 부인과 동성의 질제를 잉첩으로 삼는다. 원비가 죽을 경우 그를 차비로 하여 내전의 일을 처리하도록 하나 정실부인이 될 수는 없어 계실繼室이라 말한 것이다.” 옮긴이)

宋武公仲子: , 국명으로 자성子姓이며 상나라 성탕의 후예다. 주 무왕이 상나라 주 임금을 멸망시키고 그 아들 무경을 제후로 봉건했다. 무경은 상나라 왕실을 부활코자 관숙과 채숙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주공 단에게 패하였다. 그후 주의 부친인 제을帝乙의 장자인 미자微子를 송공宋公으로 세웠다. 은나라 혹은 상나라로 호칭하는데 모두 옛 호칭을 이은 것이다

도읍은 상구商丘로서 현재의 하남성 상구商邱시가 그곳이다. 송 목공7년은 은공 원년에 해당하고 송 소공 득의 원년은 노 애공27년에 해당하는데 『좌전』은 여기에서 멈춘다. 소공 이후 6 170년간 이어지다가 『사기·송세가』와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제나라, 위나라 그리고 초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나 오사도가 주석한『전국책』에선 이에 의문을 가졌고, 고동고顧棟高의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표列國爵姓及存滅表』에선 “제나라에게 멸망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송세가」에 따르면, 미자부터 무공까지 모두 12군주이다. 무공의 이름은 사공이고 미중의 9세손이다. 전해지는 이기로 송공경종宋公䪫鐘이 있다. 『사기·십이제후년표』: “송 무공 18년 노 환공의 모친을 낳았다.” 

仲子生而有文在其手, 曰爲夫人: 은 곧 자이다. 선진시대에는 아직 “자”란 글자가 없었다. 『주례·외사』, 『의례·빙례』에선 모두 명으로 쓰고, 『좌전』, 『논어』 그리고 『중용』에선 문으로 쓴다. “자로 을 뜻하게 된 것은 『사기·진시황낭야대석각秦始皇瑯邪臺石刻』의 “문자를 통일하다(同書文字)”가 처음이다.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과 단옥재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敍注』에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는 손바닥이다. 『논형·뇌허편』과 「기요편」에선 “文在掌”으로 고쳐 쓰고 있는 것으로 입증할 수 있다. 「자연편」에선 그대로 “”로 쓴다. 즉 『좌전』의 원문을 인용한 것이다. 『좌전』에선 본래 夫人으로 쓰여 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 성계의 有文在其手曰友”(민공2년과 소공32년의 『좌전』), 당숙에 대해 有文在其手曰虞”(『좌전·소공원년』)와 같은 구법의 예이기 때문이다

仲子歸于我: 두예: “부인이 출가하는 것을 귀라 한다.” 공영달의 『소』: “『석경』고문은 , “ 로 쓴다. 손바닥의 무늬가 혹 이와 같았을 수 있다.” 공영달에 의하면 손바닥에 실제 문자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손금이 노부인세 글자나 자 유사한 무늬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인이나 후대인이 견강부회한 것이다. 송 중자가 노나라로 출가하였는데 아마 그 손바닥의 손금이 “노부인과 유사하게 생겼을 따름일 것이다. 다음의 『좌전』문장에 따르면, 귀우아歸于我는 혜공에게 출가하여 적처가 된 것이다. 「노세가」: “공의 천첩 성자가 아들 식을 낳았다. 식이 장성하자 송나라에서 부인을 얻었다. 부인이 도착하였는데 아름다웠다. 혜공이 그녀를 빼앗아 자신의 처로 삼았다.” 『색은』: “태사공이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초주 역시 매우 이에 대해 불신을 표시했다.” 

桓公惠公: 두예: “노나라로 출가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환공을 낳은 해에 혜공이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공영달의 『소』는 두예의 주석을 확대했는데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좌전·은공원년』의 혜공이 서거했을 때 송나라 군사가 쳐들어왔고 태자는 어렸다태자는 곧 환공이다. 그가 어렸다고 말했으므로 막 태어난 영아는 아니다. 또 이해 겨울 10월에 혜공의 장례를 다시 치렀는데 은공이 참석하지 않고 환공이 상주가 되었다. 만약 그의 나이가 두 살 미만이라면 상주노릇을 감당하기 어렵다. 또 우보가 은공을 살해할 때 환공과 공모했었다. 만약 환공의 나이가 겨우 12세라면 군주를 살해하는 모의를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공영달의 이 주장은 매우 일리가 있다. 『사기·십이제후연표』과 「송세가」를 다시 살펴보면, 송 무공은 중자를 낳았을 때 그의 나이 18세였고, 무공은 이해에 죽었다. 당시는 아직 춘추시대에 접어들기 전이었고 주 평왕 22년 즉 기원전 748년이다. 노 은공 원년은 주 평왕 49년으로서 이때 중자의 허세는 이미 27세였고 그녀가 출가한 때는 이보다 앞이었음이 확실하다. 아들을 낳은 시기 역시 이때[혜공의 서거시기]보다는 일찍이었을 것이다

是以隱公立而奉之: 두예: “은공은 부친 혜공의 뜻을 이루어 주려고 했지만 환공이 매우 어렸기 때문에 태자로 삼아 국인을 거느리고 섭정으로서 그를 섬겼다. 『춘추』원년 봄에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배경이다.” 그러나 다음 글 은공은 군주의 지위를 섭정하여 주나라와 우호 관계를 추구하려 했다”, “은공은 즉위하여 우호 관계를 추구하려 했다등의 구절을 보면, 이는 은공이 군주의 정치를 수행하며 실제 환공을 군주로서 받든 것이지 그를 태자로 세운 것이 아니다. 환공이 태자가 된 것은 혜공이 죽기 이전부터 이미 그러했던 것이지 은공이 다시 그를 태자로 세운 것이 아니다. 환공이 비록 영아는 아니지만 나이가 매우 어려 군주 노릇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은공이 섭정을 했을 뿐이다. 공영달의 『소』는 극구 두예의 주석을 지지하고 정중과 가규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 정중과 가규의 설은 환공을 태자로 세웠다는 점에서는 두예와 마찬가지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은공의 시대에 즉위를 칭하지 않았고, 혜공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환공의 모친 중자의 죽음에 부인의 예를 사용하고, 자신의 모친의 상에는 단지 군씨졸로 기록하고 부인의 예를 사용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충분히 이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섭위로서 공을 호칭한 것은 주공이 섭위하면서 왕을 칭한 것과 유사하다. 실로 주나라의 예인 것이다. 본문과 다음의 원년 봄 왕력 정월 즉위를 쓰지 않은 까닭은 섭정이었기 때문이다는 하나의 『전』이다. 후대인이 『전』을 분류할 때, 반드시 모년을 첫머리에 두려고 이 단락과 따로 떼어 놓은 것이다. 두예의 주석, “『춘추』에서 원년 봄 즉위를 쓰지 않는 배경은을 보면 그가 본 판본은 이미 망녕되게 분할해 놓은 것이었다. 『좌전』에는 이와 같은 예가 적지 않게 있다. 유월의 『좌전고본분년고』와 양수달 선생의 『독좌전』, 양향규의 『논좌전지성질급기여국어지관계』에서 모두 지적한 바다. 본 주석에서도 수시로 이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 여인의 이름 - 숨기는 자, 드러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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